[세븐틴/최승철] 소개팅 성공이 현실에서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요? 00

[세븐틴/최승철] 소개팅 성공이 현실에서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요? 00 | 인스티즈

"아, 아침부터 비가 와."

오늘도 운이 안 좋으려나. 고등학교 때부터 쭉 친구로 지내왔던 이석민은 이제 나도 연애 좀 하라며 소개팅을 시켜준다고 난리를 치다 결국엔 나의 승낙을 받아냈다. 그리하여 오늘이 바로 대망의 소개팅날인데 아침부터 비가 온단 말이다. 소개팅은 성공해 본 적이 없는데 비까지 오니 기분이 꿀꿀할 수 밖에.

어찌됐든 약속은 잡아 놨으니 집에서 나가야겠는데 날씨도 안 좋지, 직장 탓에 일주일 중 쉴 수 있는 날이 일요일 밖에 없는데 이 금 같은 일요일을 대상이 직장 상사가 아닐 뿐이지 직장에서 하듯이 하루종일 표정관리하고 괜찮지 않아도 괜찮은 척, 기분 나빠도 좋은 척 하자니 영 기분이 안 좋다. 이불로 내 몸을 꽁꽁 감싸고 시계를 쳐다보며 5분만 더, 10분만 더 누워있다 준비하자, 라고 한 지 30분이 지나서야 침대에서 일어났, 아니, 기어나왔다.

소개팅이라는 것이 너무 귀찮고 나 따위가 성공할 확률이 매우 적다는 걸 알면서도 나도 여자인지라 첫 인상이 매우 신경 쓰인다. 내가 조금 더 깨끗이 씻는다고 딱히 달라질 게 없을 건 알지만 괜히 온 몸 구석구석 깨끗하게 샤워를 하고 평소에는 아무렇게나 열거해 놓고 랜덤으로 집어 쓰던 샴푸와 린스를 오늘은 그래도 향을 맞춰 사용했다. 괜히 뿌듯한 마음으로 샤워를 마친 후 시계를 보니 약속 시간까지 1시간이 남았다. 가는 데에만 적어도 20분은 걸릴 텐데, 망했다. 알람이 처음 울렸을 때 바로 침대에서 일어났어야 됐는데. 매일 저녁에 내일 아침에 일어날 시간을 계산해서 알람을 맞춰서 뭐해, 잘 일어날 때가 없는데.

급한 마음에 머리를 말리면서 무엇을 입고 나갈지 고민했다. 아, 몇 달 전에 사 놓고 거의 안 입은 원피스를 입어야겠다. 그럼 옷은 완료. 머리만 빨리 말라주고 화장만 잘 먹으면 좋을 텐데. 어차피 옷 입고 화장하는 사이에 머리는 마를 테니 대충만 말리고 옷장을 열어 뒤졌다. 어디 갔지? 분명히 여기 걸어 놓았는데... 아. 어제 입었다. 그 원피스를 평생 안 입다 어제 입었다. 난 도대체 왜 이러고 살지? 딱히 부지런하지 않은 성격 덕에 세탁을 자주 하는 편이 아니라 세탁기에 원피스가 어제 상태 그대로 있었다. 어제 상태 그대로라면... 매우 좋지 않다는 말이다. 나는 나 자신에게 온갖 욕을 퍼부으며 입을 만한 옷이 있는지 옷장을 다시 뒤지기 시작했다.

우여곡절 끝에 약속시간을 15분 남기고 모든 준비를 마친 후 택시를 잡아 최대한 빨리 가달라고 기사님께 부탁드렸다. 달리는 차 안에서 비 내리는 창 밖을 내다보며 소개팅 상대가 이러이러했음 좋겠다, 하는 생각을 하던 중에 이석민한테서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

"야, 성이름, 너 지금 어디냐?"

"어...?"

"어디냐고!"

"왜 소리를 지르고 난리야. 지금 가는 중인데요?"

"지금 가는 중이라고? 미쳤어?"

"왜! 뭐! 내가 왜 미쳐! 아직 10분이나 남았는데!?"

"...에효 진짜 병신 같은 성이름 기억력을 믿은 내가 바보지, 내가 바보야."

"뭐? 병신?"

"예, 약속 시간 잘못 알고 계시네요, 병신님."

"...뭐?"

"지금 현재 20분 늦으셨습니다, 고객님."

"뭔 소리야. 1시까지 00카페로 오라며."

"응, 맞아. 1시까지 00카페로 오라고 했었지, 내가. 저번 주에. 그리고 우리가 어제 밤에 통화를 했었지. 30분 당겨졌다고."

"그걸 지금 말해주면 어떡해!!!!"

"내가 어제 밤 일을 네가 까먹을 줄 알았겠냐고!!!!!"

"나 어제 뭐 입었었는지도 까먹고 오늘 또 입으려고 했었는데! 통화 내용을 어떻게 기억해!"

"그래, 알았다, 미안해. 네 기억력을 믿은 내가 잘못했어. 상대한테는 내가 연락해 놓을게. 아 너도 연락처 있지?"

"있긴 한데, 네가 연락해 줘라. 아... 진짜 미안해서 어떡하냐."

그렇게 10분 후에 나는 겨우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카페에 들어가 두리번거리던 중 소심하게 '이름씨...?'하고 내 이름을 부르며 손을 흔들고 있는 남자가 앉아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아, 승철씨? 맞나? 제가 진짜 죄송해요, 시간이 바뀐 걸 까먹고... 아침에 하도 정신이 없어서... 아니 어제 밤에도 정신이 없긴 했지만 어쨌든..."

아, 이번 소개팅도 망했구나.

"예? 아, 아니에요. 약속 바로 전 날에 갑자기 시간 조정한 제가 잘못했죠, 뭐."

"아효, 아니에요. 오래 기다리셨을 텐데, 어떡해. 뭐 커피라도 드실래요? 아 벌써 드셨으려나?"

"아 ㅋㅋㅋ, 아니에요. 사실 저도 조금 늦었거든요. 지금 같이 주문해요."

"그래요, 그럼. 저는 헤이즐넛 자바칩 라떼로 마실게요."

"저는 그럼... 뭐가 뭔지 모르겠네. 그냥 바닐라 라떼 한 잔이나 마셔야겠어요. 제가 주문하고 올게요, 잠깐만 기다리세요."

벽에 붙어 있는 메뉴를 눈으로 계속해서 읽다 결국엔 뭐가 뭔지 알아차리지 못했는지 아무거나 고르고서 자신이 주문하고 오겠다며 벌떡 일어나 계산대 앞으로 갔다. 커피 종류를 잘 모르는 거 같아 보였던 사람이 주문은 과연 잘 할 수 있을까, 하는 마음에 계속 지켜보고 있었는데, 역시나 내가 말한 음료의 이름을 제대로 못 대고 있다.

"어, 그, 바닐라 라떼 하나하고요, 아 예 따뜻하게요. 그리고, 그, 어... 헤이늘 아니 헤이즐넛? 자... 무슨 칩? 맞다, 맞아요 자바칩. 프라페요? 프라페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어... 저거! 저거요! 헤이즐넛, 자바칩, 라떼. 주세요. 따뜻한... 어... 잠시만요,"

내가 주문한 커피 이름을 찾아내는 것을 왠지 모르게 뿌듯한 미소를 지으며 지켜보고 있었는데 최승철은 주문하다 말고 갑자기 도로 달려왔다.

"저, 이름씨? 따뜻한 거 드실 거세요, 차가운 거 드실 거세요?"

"앗... 그걸 안 말씀드렸네. 저는 따뜻한 거요! 밖에 추우니까..."

"네! 잠깐만 기다리세요."

또 다시 허겁지겁 달려가 주문을 마저 하고 진동벨을 가져와 내 앞에 앉았다.

"하하, 제가 커피를 잘 안 마셔서..."

"괜찮아요! 커피 어차피 몸에 좋지도 않은데 안 마시면 좋죠 뭐!"

나 뭐라고 말했니. 이번에도 소개팅 말아먹으려 작정했나?

"그렇죠...? 이름씨는 커피 자주 드시나 봐요."

"예? 아니에요, 저도 딱히. 그냥 막 자주 마시진 않는데 저번에 한 번 마시고 꽂힌 게 있어서요. 커피 마실 일 있으면 그것만 마셔요."

"아, 그러시구나. 헤이즐넛 자바칩 라떼? 기억해 둬야겠네요 ㅋㅋㅋ."

"아, ㅎㅎㅎ..."

"이름씨 나이가 25이라고 했었나요? 석민이랑 동갑 맞죠?"

"예, 맞아요. 승철씨는 25...?"

"...아니요, 26이에요. 제가 26보다는 조금 젊어 보이나요?"

"아... ㅎㅎㅎㅎㅎ 예, 좀 젊어 보이시네요. 죄송해요... 제가 기억력이 많이 안 좋아서..."

"괜찮아요, 뭐 기억할 일 있으면 옆에서 제가 계속 알려주면 되죠, 뭐. 아, 커피 가져올게요."

진동벨이 울리기 시작했고, 최승철은 커피를 가지러 가기 위해 일어섰다. 난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잘한 말이 없는 것 같은데 최승철은 내 말을 정말 제대로 잘 받아친다. 연애를 많이 해 본 건가?

"저... 뭐가 바닐라 라떼인 거죠?"

커피를 들고 와서는 나에게 묻는다. 둘 다 따뜻한 라떼라서 담긴 컵이 똑같아 구분을 못 한 모양이다. 이럴 때엔 웬만하면 컵에 음료 이름을 써 놓을 텐데.

"어, 이게 제꺼네요. 여기 써 있어요."

"...그렇네요."

그러고선 한참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 예전에 누군가 그랬었지, 어색할 때에는 날씨 얘기를...!

"비가 오네요... 한 겨울에."

"그렇네요."

"요즘 날씨가 정말 이상한 것 같아요. 12월 말에 아침부터 비가 오다니, 괜히 기분 안 좋게."

"아, 이름씨는 비 안 좋아하시나 봐요? 저는 오늘 아침에 일어났을 때 비 오길래 되게 설렜는데."

"비 오는 거 좋아하세요?"

"네? 아니, 뭐. 그냥 비 오면 왠지 모르게 설레요, 저는."

그렇게 우리는 한참 동안 의미 없는 대화를 나누었다. 아니, 의미 없는 대화는 아니었다. 대화 내용 자체는 전혀 쓸 모 없고 내일이 되면 기억나지 않겠지만 대화를 하는 것 자체가 의미 없이 느껴지진 않았으니까. 3시가 되어서야 우리는 카페에서 나왔다. 비를 피해 버스 정류장에 서서 30분 가량 더 얘기하다 둘은 헤어졌다. 조심히 들어가세요라는 말만 남긴 채로. 나는 집으로 가는 버스에 올라 비어 있는 좌석에 앉았다. 빗방울이 계속해서 부딛히는 창문을 바라보며 깊은 생각에 빠졌다. 아, 비 정말 싫다. 이렇게 오랫동안 얘기를 하면 뭐해, 다시 만나자는 얘기는 없잖아? 아마 최승철이라는 그 사람이 많이 심심했나보다. 그러고 보니 무슨 일 하는 사람인지도 모르네. 이석민에게 역시 이번 소개팅도 실패라고 문자를 보내려고 핸드폰을 들었는데 이석민이 이미 전화를 걸고 있었다.

"여보세요?"

"너 졸리냐? 목소리가 왜 이렇게 우울해?"

"안 졸려. 그냥 기분이 별로 안 좋아서. 비 오잖아."

"아까부터 왜 이렇게 비 타령을 해대. 또 실패냐?"

"... 응."

"에효... 내가 보기엔 약속 시간만 지켰어도 넌 됐을 거다. 승철이 형한테 내가 네 사진 보여주고 소개할 때 반응 되게 좋았는데."

"그렇냐."

"...너랑 통화하니까 내 힘이 다 빠진다. 그냥 오늘은 들어가서 잠이나 자라, 내일 출근해야지?"

"응. 너도 쉬어."

한숨을 쉬며 전화를 끊고 다시 창 밖을 내다 봤다. 반응이 좋기는 무슨. 좋았으면 집 들어가서 연락해요 한 마디라도 했겠지.

내가 내려야 할 정류장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내리기 싫다. 내리기 귀찮다. 한숨을 푹 푹 쉬며 계속 빗방울로 그림이 그려지는 창문을 쳐다보고 있었다. 집 앞 정류장에서 내린 후 우산을 피며 핸드폰을 확인했더니, 문자가 한 통 와 있었다.

말 할 게 한 가지 더 있었는데 빼먹었네요.

우리 다음 약속은 언제인 거죠?

-최승철

지금 우산을 쓴 채로 생각해 보니 나는 비가 내리는 걸 보면 조금 설레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