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홉수, 메인작가
EP 01 < 2016년은 병신년 >
" 시청자 여러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엔딩을 알리는 엠씨의 마무리 멘트가 세트장 안에 크게 울려 퍼지고 엔딩곡의 반주가 요란한 치어리딩과 함께 시작됐다. 그와 동시에 출연자들은 마이크를 잡고 다 함께 엔딩곡을 떼창했고 화면에 출연자들이 잡힐수록 팬들의 함성은 더욱 커져갔다. 복 많이 받아야죠. 세 번째 아홉수. 스물아홉이니까.
" 정작가. 대본 정리 좀 해주고 가서 카메라 충전 좀 시켜. 카메라 충전 어떻게 하는지 알지? "
" 네? 제가요? "
" 어. 우리 팀에 정작가가 정작가 말고 또 있어? "
" 아니, 그게 아니라 저 작간데요? 그런 건 막내나 FD를 시키시는 게 낫지 않을까요? "
" 그래서 내가 대본 정리도 하라고 시켰잖아. "
" 아, 네. 카메라 주세요. "
권피디님에게 카메라를 받아 들고 터덜터덜 편집실로 들어갔다. 요즘 작가는 만능이어야 한다며 편집, 카메라 사용법까지 알려준 교수님이 원망스럽다. 막내작가 때 무슨 일 하나라도 맡으려고 카메라도 만질 줄 안다며 나댄 내 주둥이는 더 원망스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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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실 한구석에 카메라 충전기를 꽂아 놓고 털썩 주저앉았다. 다리 아파. 어떻게 연말 무대는 매년 해도 적응이 안 될까. 하는 일이 많아서 그런가... 얼마 앉아 있지도 않았는데 뒷주머니에서 진동이 짧게 울린다. 느릿느릿 핸드폰을 꺼내 수신함을 확인하는데 한숨만 푹 나온다.
[권피디님]
정작가.
어디서 농땡이 피우는 거 아니야?
얼른 들어와
바빠 - 12 : 17 AM
사람 참 귀찮게 하시네요. 권순영 피디님.
피디님의 문자를 받고 세트장 안으로 들어가니 무대에는 출연자들도 별로 안 남았고 객석에는 마지막까지 자기 가수를 보겠다는 굳은 의지를 보여주는 팬들이 남아 있다. 그리고 언제 뿌렸는지 형형색색의 종이가루들이 흩날린다. 아주 많이. 저거 누가 치우니.
" 왔어? 조금 있으면 출연자들 내려가니까 종이가루 좀 치워. "
내가 치우네.
" 피디님. 저 작가라니까요? 청소부도 아니고, FD도 막내도 아니고 서브작가라고요. "
" 나도 알아. 근데 지금처럼 바쁜데 그런 거 따질 겨를이 어딨어. 다 같이 일하는 거지. "
내가 이딴 허드렛일이나 할 만큼 여유로운 사람이 아니라 작가임을 몇 번이고 계속 말해도 권피디님은 내 말을 귓등으로도 안 들으시고 자기 볼 일 보러 가신다. 얼마 전부터 권피디님은 날 못 갈궈서 안달이시다. 덕분에 피곤에 찌드는 건 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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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객석에 앉아 있다가 모든 카메라가 꺼지고 전 출연자가 내려가는 걸 확인한 후 무대 위로 올라가 흩뿌려진 종이가루를 하나하나 수거했다. 그니까 이걸 왜 뿌리냐고. 그냥 폭죽이나 터뜨리지. 이게 다 돈 지랄이야. 돈 지랄. 무대 위를 엉금엉금 기어 다니며 종이가루를 주워 품에 한 아름 안고 밑으로 내려오자 FD들이 밀대를 가지고 무대 위로 올라가 종이가루를 한 곳에 모은다. 멍청하면 고생한다더니. 그게 딱 날 두고 하는 말이네.
쓰레기통에 종이가루를 버리고 그 옆에 주저앉아 한숨을 푹 쉬니 내 앞에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니 윤선배가 내게 손을 내밀며 환하게 웃고 있다. 내가 제일 존경하고, 좋아하는 윤정한 선배.
" 정수연. 오랜만이다. 한 세 시간 못 봤나? "
" 그러게요. 권피디님이 워낙 절 부려먹어야죠. "
정한 선배를 보니 긴장이 풀렸는지 선배의 손을 잡고 일어나다 다리가 풀려 선배 쪽으로 약간 기울었다. 그걸 놓치지 않고 받아준 선배가 네 어깨를 꽉 끌어안아 넘어지지 않게 단단히 지탱해줬다.
" 그렇게 힘들어? 어째 막내들 보다 더 힘들어하는 거 같다. "
" 연말 무대는 매년 해도 익숙해지지가 않네요. 체질이 아닌가? "
" 밤샘 작업은 그렇게 잘 하면서. 어어, 정수연 조심. 또 넘어질라. "
정한 선배에게 기대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는데 저 멀리 권피디님이 헤드셋을 목에 걸고 그 매서운 눈빛으로 우리 둘을 바라보는 게 느껴진다. 눈치가 보여 정한 선배에게서 떨어져 빠른 걸음으로 피디님 앞에 가 서니 날 보시곤 한숨을 푹 쉬신다.
" 여기가 직장이지, 니네 데이트 코스냐? "
" 아니요. "
권피디님이 나 혼낸다. 순간적으로 기가 팍 죽어 어깨를 잔뜩 움츠린 채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하니 뒤따라온 정한 선배가 내 어깨를 감싸고 두어 번 쓰다듬는다.
" 넌 무슨 말을 그렇게 하냐. 이러니까 우리 수연이 기가 죽지. "
" 얼씨구. 직속 후배라고 챙기냐? "
" 꼬우면 너도 수연이 같은 직속 하나 만들던가. "
" 지랄. 한 트럭 갖다 줘도 그대로 유턴 시킬 거야. "
권피디님은 언제나 말을 참 예쁘게 하신다. 갑자기 힘이 힘이 쭉 빠지는 기분에 어깨에 올려진 정한 선배 팔을 내리고 권피디님께 고개를 살짝 숙인 뒤 발걸음을 옮겼다.
" 정수연! 어깨 좀 피고 걸어. 권순영 이 지랄인 거 하루 이틀이냐. 그래도 이따 회식은 나와! 알았지? "
정한 선배의 말에 돌아보고 대답하는 거 대신 손을 두어 번 흔들었다. 내 뒤로 야박하게 굴지 좀 말라는 정한 선배의 목소리와 자기가 뭘 어쨌냐는 권피디님의 목소리가 들린다. 연초부터 힘이 쭉쭉 빠진다. 기도 쏙쏙 빨리는 거 같고. 병신년을 정말 병신처럼 보낼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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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회의실에 회식에 갈까 말까 고민을 하다가 정한 선배가 한 말도 있고, 오랜만에 동기들 좀 볼까 하는 마음에 서둘러 화장을 고치고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내 차가 주차된 곳으로 터덜터덜 걸어가는데 내 앞에 정한 선배와 권피디님의 뒷모습이 보인다. 정한 선배 말로는 둘은 고등학교, 대학교 동기고 매우 친하다. 그런데 성격은 정반대. 완전히 딴판이다. 정한 선배가아낌없이 주는 나무인 천사 스타일이라면 권피디님은 직설적이고 무섭고 자기주장 뚜렷한 한 마디로 싹수가 노란 스타일이다. 뭐, 나만 그렇게 느끼는 걸 수도 있지만 인생은 내 주관대로 살아가는 거니까. 괜히 둘 사이에 끼어들기 싫어 - 끼워주지도 않을 거 같지만. 물론 권피디님이. - 얼른 주차된 내 차에 시동을 걸고 급하게 주차장을 빠져나왔다. 지하를 빠져나오니 자정인 시각에도 불구하고 방송국 건물은 환했다. 불이 꺼진 곳보다 켜진 곳이 더 많았고 가로등이 켜진 길거리도 예뻤다. 방송국하고 얼마 떨어지지 않은 회식 장소로 도착해 문을 열고 들어가니 저 안쪽에서 내 이름을 부르며 손을 흔드는 이석민이 보인다. 허리를 숙여 선배들에게 인사를 하고 자리에 앉기가 무섭게 내 잔에 술이 채워진다.
" 워, 처음부터 너무 달리는 거 아니냐. 아직 사람들도 덜 온 거 같은데. "
" 괜찮아. 시작이 중요하냐. 끝이 중요하지. "
" 정작가님 술 잘 마시지 않아요? 매번 회식 때마다 끝까지 남잖아요. 맞죠? "
" 네? 아, 그렇게 잘 마시는 것도 아니에요. 그냥 즐기는 거죠. "
" 얘는 뭐 타고났죠. 체질이잖아요. 술 체질. "
이석민의 말에 작게 웃은 뒤 가득 채워진 잔을 비워내니 주변에서 작은 함성이 터진다. 그래. 이 분위기 때문에 마시는 거지. 어디 나 갈구는 사람도 없고 얼마나 좋아?
" 여자가 술 잘 마시는 게 뭐 자랑이라고. "
나 갈구는 사람 여기 오셨네. 권피디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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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피디님. 축하드려요. 이제 메인 피디라면서요? "
" 어휴, 전 한 거 없죠. 진짜 숟가락만 얹은 건데. "
" 그래도 이피디님 그거 꽤 오래 하셨잖아요. "
" 맞아. 너만큼 그 프로그램 잘 아는 사람도 없고. 야, 이석민 잘 됐네. 축하한다. "
" 고맙다. 정수연 너도 인마, 곧 메인 될 거야, "
" 돼야지. ... 되겠지? 메인. "
이석민이 말없이 내 등을 두어 번 토닥인다. 답답한 마음에 입안에 털어 넣은 술이 오늘따라 쓰다. 이제 내 동기도 하나둘씩 메인이 된다. 지난달에는 박피디가 메인이 됐고, 지지난달에는 김작가가 메인이 됐고 오늘은 이석민까지 메인 피디가 됐다. 나도 처음엔 잘 나갔다. 어쩌면 먼저 메인이 된 동기들보다 더. 스물하나에 시작해 통통 튀는 아이디어 덕분에 막내 생활도 햇수로 3년밖에 하지 않았다. 선배들 말로는 막내 생활 3년 하고 서브 된 작가는 내가 처음일거랬다. 그래서 난 내가 천재인 줄 알고 자만했다. 그 자만 때문에 내가 서브를 6년 동안 하고 있는 거 같다. 아. 2016년 새해가 존나게 밝았으니 햇수로 7년째네. 하여간에 6년이든 7년이든 난 아직 서브작가다.
" 정작가. "
" 예. 권피디님. "
" 저번에 방송 기획안 써서 제출한 거 있지. "
" 아, 그거 수정할 부분이 좀 있기는 한데... 왜요? "
" 괜찮더라. 수정해서 제출해. 피디에 내 이름 적고, 작가에 네 이름 적고. "
" 네? "
" 나랑 같이 그거 하자고. 오늘부터 메인작가해. "
방금 메인작가가 됐다. 좀 당황스럽긴 하지만. 어쨌거나 난 이제 메인작가다.
주저리 주저리 |
질러버렸네요. 침대에 누워 있다가 갑자기 생각이 나서 새벽 2시부터 컴퓨터 붙들고 쓰긴 했는데 참... 제가 봐도 노답입니다. 전 나름 재미있을 줄 알았어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근데 막 쓰고 나니까 분량도 적고.. 새삼 다른 작가분들 존경스럽습니다! 아, 그리고 이름에 받침이 있으신 분들이 치환하셔서 보기가 편하실 거예요. 받침이 없으신 분들은 불편하시더라도 스킵 하시고 봐주셨으면 좋겠습니다.. ♡ 그리고 아직 남주는 미정입니다. 하하하. 응팔 처럼 남주 찾기 한 번 해보려고요! (굳은 다짐) (의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