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O/찬백] Omnibus 01 |
난 지금 매우 화가 난 상태였다. 기다림에 지치다 못해 이젠 참을 수 없는 분노에 사로잡히고 만 것이다. 대학로로 이어지는 학교 남문 담벼락에 기대 팔짱을 끼고 다리를 떨고 있는 내 모습은 가히 쉽게 다가올 수 없는 오라를 풍기고 있을 게 분명했다. 내가 이렇게 화가 난 이유는 바로 고등학교 동창이자 사랑하는 내 연인, 변백현 때문이었다. “왜 전화기도 꺼져 있냐고. 아, 짜증 나.” 수많은 사람이 지나다니는 이 남문 앞에 서 있는 것도 벌써 두 시간째에 접어 들어가고 있었다. 분명 오늘은 일찍 끝날 것이니 함께 저녁 먹자 자기가 먼저 약속했었는데. 강의가 끝난 후 정확히 5시 30분에 이곳 남문에 도착했고, 휴대폰으로 확인한 현재 시각은 7시 30분. 이제 끝날 것 같다며 전화한 것을 마지막으로 백현이의 휴대폰은 꺼져 있었다. 이제 끝날 것 같다고 하더니 왜 한 시간 반이 지나도록 나타나질 않는 건지. 약속에 늦는 건 항상 그랬으니 이제 그러려니 하지만, 휴대폰이 꺼져 있는 것은 어떤 이유를 대서든 절대 용납되지 않았다. “오기만 해, 죽었어. 변백현.” “미안, 화났어?” “깜짝이야! 야!” 오면 가만 안 두겠다는 다짐을 하며 입술을 곱씹는 순간 내 옆으로 변백현의 머리통이 툭 튀어나왔다. 이렇게 가까이 다가왔는데도 왜 몰랐을까, 역시 키가 작아서 그런가. 내가 잔뜩 심술 난 표정을 짓고 있자 백현이가 미안하다며 두 손을 맞대고 울상을 지었다. 이 녀석은 날 너무 잘 안다. 귀엽고 안쓰러운 표정을 지으면 내가 당해내질 못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엔 절대 안 넘어가, 매번 늦는 버릇 단단히 고쳐 줄 거야. 각오해라 변백현! “응? 미안, 화났어? 화 풀어-. 응?” “…화 안 났어.” “정말? 역시 네가 짱이야.” 안 넘어가기는 개뿔. 눈을 크게 뜨며 날 올려다보는 얼굴에 결국 또 넘어가고 말았다. 이렇게 귀여운 얼굴로, 애절한 표정을 지으면 누가 안 넘어가고 배기겠는가. 반한 게 죄지. 백현이의 말이라면 끔뻑 넘어가는 내가 미워졌다. “얼른 밥 먹으러 가자-. 나 배고파-.” “그보다, 휴대폰은 왜 꺼놨어?” “배터리가 다 됐더라고, 너한테 연락 올 텐데 꺼져버려서 나도 당황했다니까?” “왜 이렇게 늦은 건데?” “일단 밥부터 먹자, 응? 나 쓰러질 것 같아 찬녈아-.” 저 애교에 넘어가고만 마는 내가 원망스럽다. 변백현한테 반한 죄가 이렇게 클 줄이야.
Omnibus 01 찬열 X 백현
“바빠 죽겠는데 배는 고프지, 일은 끝날 기미가 안 보이지, 진짜 죽는 줄 알았어.” “오늘 일찍 끝날 것 같다고 했잖아.” “그럴 줄 알았는데 1학년 여자애가 실수한 게 있어서 그거 수습하느라-.” “그러게 왜 굳이 힘든 일을 하겠다고 해서 고생이냐?” “그래도 성취감이라는 게 있다고?” 귀찮은 일이라면 한사코 마다하던 녀석이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몰라도 대학에 들어오자마자 총학생회라는 곳에 들어가더니, 이제는 축제 위원회에서도 활동하고 있단다. 덕분에 학기 초와 학기 말에는 바빠서 만나지도 못하는 일이 허다하고, 축제가 있는 봄과 가을에도 만나기는커녕 오늘처럼 연락조차 안 되는 일이 수두룩했다. 그래, 바빠서 못 만나는 거야 눈 감아 줄 수 있다. 하지만 백현이를 이렇게 바쁘게 만드는 녀석은 절대로 용서하지 못한다. 그리고 그 대상은 언제나 동일 인물이었다. 백현이를 총학생회로 끌어들인 장본인이자, 백현이의 1년 선배인 우이판! “성취감은 무슨, 오늘 늦게 보낸 것도 그 자식이지?!” “그 자식? 누구?” “누구긴 누구야 우이판이지!” “또 그런다! 크리스 형이 얼마나 착한데! 형은 일을 시키고 싶어서 시키냐?” “어쨌든 그 자식 맞네!” “그 자식이 아니라 형이라니까!” 우이판은 처음 만났을 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던 녀석이었다. 같은 총학생회고 한 학년 위의 선배라며 백현이가 소개해준 우이판은 큰 키에 샤프한 외모를 하고 있었다. 같은 남자인 내가 봐도 ‘잘생겼다.’라는 말이 무의식적으로 나올 정도로. 물론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중국인이지만 외국에서 살다가 왔다는 이유로 ‘우이판’이 아닌 ‘크리스’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는데 난 그것조차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백현이의 옆에 저렇게 잘난 사람이 항상 붙어있을 걸 생각하니 도저히 ‘크리스’라는 멋진 이름으로 부르고 싶지 않았다. 물론 이게 질투라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그 자식, 맨날 너한테만 일 시키는 거 아니야?” “그런 거 아니라니까!” “위원이 너만 있는 것도 아니고, 진짜 짜증 나.” “왜 네가 짜증 나?!” 여자에게 감이 있다면 남자에겐 ‘촉’이 있다랄까, 백현이에게 보내는 눈빛이며, 스킨십이며, 외국에서 살다 와서 그런지는 몰라도 우이판 그 녀석은 나와 동류일 것이라는 의심이 들었다. 쓸데없이 친절한 부분이 특히 그러했다. 여자도 아닌 백현이에게 도가 지나친 친절을 베푸는 것부터가 이상하지 않은가? 우이판의 행동이 의심스러우니 항상 조심하라고 백현이에게 당부해주고 싶지만, 백현이는 우이판을 너무 믿고 있었다. 내가 조금이라도 우이판을 험담하려고 하면 이렇게 발끈할 정도니. 그리고 난 그 사실에 더욱 질투심을 느낄 수밖에 없다. “그래도 크리스 형이 저녁 같이 먹자는 거 내가 뿌리치고 왔다고.” “어? 진짜?” “흥, 당연하잖아.” “아…. 백현아….” “흥…. 나 잘했지?” 야살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마치 칭찬해 달라는 듯한 행동을 취하는 백현이에게 또 한 번 반하고야 말았다. 나는 예전부터 밀고 당기는 연애에는 익숙지 않았다. 하지만 백현이가 없는 내 세상 역시 익숙지 않을 것 같았다. 평생, 이 익숙한 연애를 하고 싶다. “얼르은, 얼른 잘했다고 해줘.” “아, 응! 진짜 잘했어! 역시 내 강아지-.” 서로 마주앉아 밥을 먹고 있는 이곳이 대학로 식당이 아니라 내 자취방이었더라면 머리를 헝클이는 것으로 안 끝났을 것이다. 당장에라도 입술을 들이받고 침대로 넘어트렸을 텐데, 어쩔 수 없이 저릿해져 오는 아랫도리를 진정시킬 뿐이다. “헤헤, 밥 먹고 뭐할 거야?” “어? 글쎄, 뭐하고 싶어?” “나는…. 집에 가고 싶어.” “어? 집?” “응, 찬녈이네 집.” 집에 가고 싶다는 말에 뭐 벌써 집에 가고 싶어 하나 의아했는데, 살짝 얼굴을 붉히며 내 집에 가고 싶다고 재차 말하는 백현이의 얼굴에 그만 진정시키던 아랫도리에 힘이 들어가고 말았다. 붉어진 얼굴에 귀여운 미소를 띠고 나를 바라보는 백현이가 너무 예뻐 정신이 아득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이런 요물이 또 어디 있을까. 난 아마 평생 변백현이라는 나무의 그림자로 살 것이 분명했다. - “왠지 오늘은 더 공격적이었던 것 같은데….” “그럴 수밖에, 아파? 주물러줘?” “그럴 수밖에는 뭐야…. 팬티는 입고….” “이미 다 봤는데 뭘 또 가려.” “그래도 싫어, 창피해.” 튼실한 허벅지랑 탱탱한 엉덩이. 예전에 저 말을 했다가 호되게 맞은 적이 있었다. 귀여운 외모와는 다르게 다부진 몸이 나는 정말 좋아서 말했던 것인데, 백현이는 그게 창피한 모양이었다. 옷으로 가려도 윤곽은 숨길 수가 없는데. 눈앞에 자리한 탱글탱글한 엉덩이에 그만 웃음이 흘러나오고 말았다. 백현이는 아마 모르고 있을 것이다. 딱 달라붙는 바지를 입을 때면 내가 항상 자기 허벅지만 보고 있다는 것을. “여기?” “아야야…. 으응….” “익숙해진 줄 알았는데, 아직 아프구나.” “그게 어떻게 익숙 해지냐? 맨날 하면 모를까….” “맨날? 그럼 매일 할까?” “아, 시끄러워!” 헛소리 그만하라는 말과 함께 백현이의 손이 허공을 저어 나를 향해 날아왔다. 얼굴 근처에도 닿지 못하는 고사리 같은 손에 또 한 번 웃음이 흘러나오고 말았다. 매일 이렇게 같이 있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맞아, 이번에 우리 학교 축제 초대 가수 누구 오게?” “나야 모르지.” “너한테만 알려주는 거야.” “누구 오는데?” 솔직히 초대 가수로 누가 오든 말든 관심도 없고, 보러 갈 일도 없었지만 말하고 싶어서 안달 나 있는 백현이의 얼굴이 귀여워서 일단 들어주기로 했다. 관심 없다는 행동을 보이면 삐칠 게 당연하고, 그럼 또 바로 돌아가겠다는 말을 하겠지. 작년에는 초대 가수로 래퍼와 남자 아이돌이 온다며 두 시간 동안 불평불만을 들어야 했다. 사귀는 건 남자인데 왜 좋아하는 연예인은 여자인 거지. “놀라지 마, 소녀시대가 온대!” “소녀시대? 우리 학교가 그렇게 돈이 많았어?” “놀랐지? 이게 바로 우리 총학생회의 기획력이라고-.” “대단하네, 그래서 보러 가게?” “당연하지-. 총학에 들어가서 다행이야, 제일 앞에서 볼 수 있잖아? 수영 누나 봐야지!” 소녀시대 수영을 볼 생각에 아픈 것도 싹 잊어버렸는지 백현이의 얼굴에 화색이 돌기 시작했다. 백현이는 고등학생 때부터 소녀시대의 수영이라면 끔뻑 넘어가는 녀석이었다. 무대에서 소녀시대가 노래할 때에도 항상 수영만 눈으로 쫓았으며, 핸드폰 배경화면이니 프로필 사진이니 전부 수영으로 도배할 만큼. 맨날 소녀시대 수영 누나를 실제로 보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던 녀석이었는데 이번에 그 소원을 이루게 되어서 기분이 최고조에 이른 것 같아 보였다. 근데 백현아 그거 알아? 네가 수영보다 키 더 작을걸? “이벤트도 있다? 응모권 넣어서 소녀시대랑 춤추는 것도 있고 안아주는 것도 있고.” “너도 응모하게?” “당연하지! 수영 누나한테 안기고 싶어-.” “뭐? 야, 그게 내 앞에서 할 소리야?” “왜-. 너랑 수영 누나는 다르잖아-.”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순간 손에 힘을 줘 백현이의 허리를 꾹 눌러버렸다. 꾹 누르자마자 비명을 지르며 일어난 백현이에게 한동안 맞아야 했지만, 그만큼 백현이도 질투 섞인 내 핀잔을 쉴 새 없이 들어야만 했다. - “입장번호 0506번!” “아, 씨발 1506번인데.” “0506번 안 계십니까?” 난 지금 혼란이라는 커다란 웅덩이에 빠져 있었다. 내가 들고 있는 종이에 적혀진 숫자는 정확히 0506번. 축제 당일 실없이 웃고 다닐 백현이가 걱정돼 결국 찾아간 중앙무대. 입장번호나 마찬가지인 응모권을 받다 이왕이면 백현이의 생일이 적힌 숫자가 좋겠다, 싶어서 무작정 0506번을 들고 있는 사람을 찾아 바꿔버린 번호였다. 설마 그게 이런 결과로 돌아올 줄이야. 나와 번호를 바꾼 사람에게는 안 된 일이었지만, 나 역시도 굉장히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왜 하필이면 백현이의 생일인 0506번이 당첨된 것이고, 그 번호를 뽑은 사람이 소녀시대 멤버 중에서 백현이가 가장 좋아하는 수영인 것이지? “0506번! 정말 안 계세요?!” “여기! 여기 있어요!” “엑?” “오! 올라오세요!” “아, 잠깐만!” 이 세상엔 어째서 이렇게 오지랖만 넓은 사람이 많은 걸까? 난 그냥 가만히 있을 생각이었는데, 옆에 있던 여자와 남자가 내가 든 종이를 보곤 너, 나 할 것 없이 손을 들어 날 앞으로 내보내고 말았다. 축제 준비 위원이라 무대 바로 옆에 있던 백현이와 눈이 마주친 것은 당연지사. 얼른 올라가라는 사람들의 재촉과, 사회자의 이끌림에 결국 머뭇거리며 무대 위로 올라가고 말았다. “자, 어느 학과 몇 학년 누구죠?” “아…. 경제학부 3학년, 박찬열….” “경제학부 3학년 박찬열군! 수영 씨가 뽑으셨는데 같이 하고 싶은 게 있나요?” “어…. 그게….” 내 옆에 서 있는 소녀시대 수영이나, 사회자의 모습이 내 눈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지금 내 신경은 무대 밑에 서서 나와 수영을 바라보고 있는 백현이에게 잔뜩 쏠려 있었다. 슬쩍 내려다본 백현이의 얼굴에선 아무런 표정도 읽을 수 없었다. 그저 무표정한 얼굴로 내 쪽을 바라보고 있을 뿐, 어떠한 감정도 표현하려 하지 않았다. 여기서 내가 무슨 말을 하냐에 따라 백현이의 기분이 좌지우지될 텐데. 혹시 내가 수영과의 이벤트에 당첨되어서 삐치지는 않을까 걱정이 됐다. “뭐, 춤출까요? 아니면 포옹?” “에?” “안아줘! 안아줘!” “에엑.” 무대 밑 관중들이 하나같이 안아주라며 공명을 하기 시작했다. 나와 수영 뒤에 서 있던 다른 소녀시대 멤버들도 안아주라는 말을 연발했고, 내 옆에 서 있는 수영은 그저 환하게 웃고 있을 뿐이었다. 점점 분위기가 안아 주라는 쪽으로 몰리자 내 걱정은 최고조에 이르기 시작했다. 수영과의 포옹은 백현이가 제일 원하던 일이었는데. 내가 그 소원을 무너트리는 건 아닐까. 왠지 오늘은 백현이의 핀잔과 화를 모두 받아내야 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럼 수영 씨가 안아주는 걸로-.” “아, 네….” “자! 수영 씨 안아 주세요!” “아하하…. 감사합니다….” 그래도 여자 연예인이라는 체면이 있으니 싫어도 싫은 표정을 지을 수 없고, 좋은 표정을 지으려니 또 무대 밑에 있는 백현이가 걸리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도망치듯 무대 위에서 내려왔다. 무대 밑으로 내려오는 중에도 선남선녀라며 잘 어울린다는 사회자의 말을 잊을 수가 없었다. 오늘은 내가 백현이에게 죽는 날이다. - “좋았냐?” “야, 좋았을 리가 있냐. 하하하….” “흥.” “역시 번호를 바꾸는 게 아니었어….” “어? 번호 바꾼 거야? 왜?” “왜긴…. 네 생일이잖아, 0506….” 역시 삐칠 줄 알았다. 소녀시대가 무대 위에서 내려올 때까지 내내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던 백현이는 공연이 모두 끝날 때까지 나와 눈을 마주치려 하지도 않았다. 입장 번호를 바꾼 것은 후회하지 않지만 고이 접어 주머니 속에 넣지 않았던 내 행동은 죽을 때까지 후회할 것만 같았다. 또, 날 앞으로 이끈 오지랖 넓은 남녀 커플에 대한 내 원망도 죽을 때까지 풀리지 않을 것 같았다. 삐친 백현이를 어떻게 풀어줄까. “흥….” “우왓, 뭐야…?” 내내 내 옆에 서서 뚱한 표정을 짓고 있던 백현이가 갑자기 몸을 돌리더니 내 품 안으로 곧장 파고들었다. 깜짝 놀라 백현이의 두 어깨를 잡았지만 그런 백현이는 오히려 더 꽉 날 끌어안았다. 갑작스러운 포옹에 심장이 터질 듯이 빨리 뛰는 게 느껴졌다. 내 품 안에 안긴 백현이는 이런 내 심장 소리를 적나라하게 듣고 있겠지? 왠지 창피해졌다. 이제 가을이라 밤 날씨는 꽤 쌀쌀해 졌는데, 이렇게 꼭 껴안고 있으니 따뜻해져 나른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내 생일로 바꿨다니까 봐주는 거야.” “응?” “0506번이 아니었으면 안 봐줬어.” “하하, 다행이다.” “흥…. 아싸! 수영 누나랑 간접 포옹했다!” “야!” 역시 난 백현이의 생일인 0506번 입장 번호를 얻은 것에 후회하지 않는다. 하지만, 날 수영과 포옹하게 한 중앙 무대에 모여 있던 사람들과 사회자는 절대 용서할 수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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