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랑히아신스, 승부
"나 너 좋아해, 우리 사귀자." 가끔 인사만 하고 별로 친하지 않다고 생각했던 선배 승철이 나를 따로 불러내서 한 말이 고백이었다. 승철 선배는 평소에 성격도 좋고 외모도 훌륭해 인기가 많았다. 그런 선배가 갑작스럽게 고백을 해오니 이게 무슨 장난인가 싶었지만 선배 눈빛은 꽤 진지했다. "저... 그게 그러니까." "천천히 생각해도 좋아. 내일 대답 들려줘 " 내가 망설이는 모습을 보이니 착한 선배는 대답을 나중에 듣겠다며 미소 지었다. 환한 미소에 나는 몇 초 멍 때렸다. "이름아, 곧 종치겠다." "아, 네." "잘 가!" 뜬금 없는 고백은 참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이 사람이 도대체 내 어디가 좋은걸까, 혹시 몰카같은 건 아닐까. 오후 수업을 받는 내내 집중을 못하고 머릿 속에서 승철 선배의 생각으로만 가득찼다. "너 오늘 왜 그러냐? 오후 수업에는 계속 딴 생각하고." 옆집에 사는 내 소꿉친구 승관이 물어왔다. 초등학교 6학년 쯤부터 친구였는데 그래도 승철 선배에 대해 고민을 터 놓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이 누나가 고민이 있다. 저기 가자." 승관에게 팔짱을 끼고 익숙한 듯 놀이터로 향했다. 나는 초록색 그네에 앉았고 승관은 주황색 그네에 앉았다. 승관은 내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가방을 땅바닥에 던졌다. "고민이 뭔데?" 승관은 그네를 앞뒤로 흔들며 앉아있는 채로 꽤 높이 올라갔다. 나는 승관이 그네를 재밌게 타는 모습을 보고 나도 발을 굴러 그네를 흔들기 시작했다. "나 승철 선배한테 고백받았어." 탁, 탁, 타악. 승관이 발을 땅에 딛어 그네를 멈추고 놀라서 크게 뜬 눈으로 날 쳐다봤다. 뭐라고? 승철이형? "근데 선배가 진짜 나 좋아하는건지 잘 모르겠어. 너랑은 친하지만 나랑은 안친하잖아." "야, 그 형이랑 사귀지마." 승관이 꽤 진지하게 말한 것 같다. 항상 나에게는 장난치고 웃으며 대해주던 승관이었는데 방금은 뭔가 달랐다. 하지만 승관은 바로 표정을 바꾸고 아줌마처럼 손을 허공에 저었다. "어우, 말도 마. 승철이라는 애, 인물은 진짜 훌륭한데 성격이 별로야. 남자는 성격이 제일 중요하지." 승관이 제일 잘하는 아줌마 톤으로 승철의 이야기를 죽 늘어놓았다. 그렇게 사람 때리는 걸 좋아한다는 둥, 여자한테 다 친절하게 대한다는 둥. 그리고 승관은 다시 그네를 앞뒤로 흔들었다. "원래 다리가 굵은 사람들이 대체적으로 웃는 얼굴 뒤에 칼을 숨겨놔. 고백해서 너한테 뭔 짓 할 지 어떻게 알아?" 나는 허공에서 휘적이는 승관의 다리를 쳐다봤다. 확실히 승철 선배보다는 얇고 웬만한 여자보다 예뻤다, 물론 나도 포함해서. "에이, 그래도 다리 굵은 거 가지고 너무 몰아붙이지는 마." 다리 굵은 게 나쁜 건 아니지. 운동을 열심히 한듯한 튼튼한 승철 선배의 다리가 생각나 허공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엄청 남자다워. "어머 어머 너 지금 뭐니? 남친이라고 벌써 감싸는거야?" 승관이 또 아줌마같은 톤으로 어머 어머를 뱉으며 손으로 입을 가렸다. "아직 남친 아니거든? 아, 그래서 진짜 어떻게 했으면 좋겠냐고." 앞뒤로 움직이는 승관을 따라 내 고개도 같이 움직였다. 승관은 아마 별 생각 없는 듯 보였다. "일단 난 반대야." "왜?" 왜, 라는 질문에 승관은 답하지 않고 그네가 앞으로 높이 떴을 때 점프해 땅에 착지했다. 그리고 승관은 엉덩이를 손으로 털고 뒤돌아 날 쳐다봤다. 생각을 해보니까 승관은 중학교 2학년때 쯤부터 내가 남자친구를 만드는 걸 방해했다. 툭하면 남자친구 행세하려 팔짱 끼고 포옹하고, 번호를 물어보는 남자들에게 안된다며 막았다. 도대체 나에게 그런 이유가 뭐야? "내가 남자친구 만드는 거 싫어?" 나는 그네에서 일어나 승관을 쳐다봤다. 승관은 가방을 메고 집에 가려는 듯이 했다. "당연하지, 니 남친이 될 사람이 얼마나 불쌍한데." "야, 진짜 맞을래?" 나는 승관한테 다가가 머리에 꿀밤을 놓았다. 승관은 악, 하는 비명을 지르고 두 손으로 맞은 부위를 연신 문질렀다. 꽤 아팠는지 날 원망하는 눈빛으로 쳐다보기까지 했다. 그 눈빛에 너무 심하게 때렸나 하고 반성했다. 하지만 그 반성도 잠시 승관은 날 꽤 놀라게 만들었다. "아씨, 손은 드럽게 매워서... 내가 왜 이런애를 좋아하는거야." "너 뭐라고 그랬냐?" 승관은 원래 내가 알고 있었던 것처럼, 평소에도 자주 하는 말처럼 표정의 변화 없이 말했다. 그렇게 뜬금없이 아무렇지도 않게 고백을 했다. "너 좋아하니까 최승철이랑 사귀지 말라고!" "부승관, 다시 한번만 더 말해봐." "아, 너 좋아한다고. 성이름." 승관이 내 어깨를 붙잡고 꽤 진지하게 세번째로 날 좋아한다고 말하자마자, 승관의 귀 끝이 빨갛게 달아오른 것이 보였다. 내가 아무말도 하지않고 승관의 두 눈만 바라보고 있으니 그제야 부끄러운 걸 알았던 것 같다. "몰라, 나 간다. 잘 생각해." 승관이 그렇게 날 버리고 먼저 집으로 뛰어갔다. 정말 친하다고 생각했던 소꿉친구가 날 좋아하고 있었다는 것이 믿겨지지 않았다. 우리는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친했고 승관은 중학교 2학년때부터 나의 이성친구에 대해 간섭했다. 그러면 승관은 중학교 2학년부터 3년째 짝사랑을 해온건가? 알쏭달쏭하고 내 자신도 잘 모르는 마음때문에 밤 잠을 설쳤다. 새벽 3시쯤에 겨우 잠들었을까, 했는데 5시가 되기도 전에 일어나버렸다. 일어난 김에 일찍 가자고 생각하고 승관에게 먼저 가겠다는 문자를 보냈다. 너무 빠르게 나온건지 7시 10분까지 등교하는 3학년과 등교시간이 겹쳐버렸다. 이러면 승철 선배와 마주칠 수도 있는데. "어, 이름아!" "네?" 아니나 다를까, 앞에서 승철 선배가 손을 흔들고 있었다. 선배가 기다릴까봐 조금 더 빠른 걸음으로 선배 옆으로 다가갔다. "오늘은 일찍 나왔네? 할 말 있어서 그런거지?" "네." 승철 선배는 내 속도 모른 채 싱글벙글이었다. 우리는 교문을 넘어가기 전 좁은 골목에 서로를 마주보고 섰다. 나는 가방끈을 꽉 쥐고 선배를 올려다봤다. "죄송해요." "하, 걔 진짜 고백했나보네." 미리 알고 있었던 것처런 선배는 한숨만 쉬고 가만히 받아들였다. 오히려 너무 무덤덤한 반응이라 내가 더 놀랐다. "우리 이름이, 오빠가 반응 안하니까 놀랐어?" "네?" "숭관이랑 잘해봐. 너가 더 잘 알겠지만 진짜 착하잖아." 승철은 어제의 그 일을 다 지켜보고 알고 있다는 듯이 말하고 날 쳐다봤다. 나는 이게 뭔가 하고 혼돈이 왔다. 승철은 내 속을 읽은 듯 풉, 하고 웃고 내 주머니를 가리키며 전화 왔다고 말했다. "전화요?"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내 전화벨이 울리고 있었다. 내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보니 승관이 전화를 걸고 있었다. 승철은 고개를 내밀어 내 핸드폰 액정을 보더니 간다고 말하고 가버렸다. 나는 전화를 받기 위해 초록색 전화기 모양을 눌렀다. - 야! 왜 먼저 가고 난리야! "왜? 너도 몇번 그런 적 있잖아." - 너 왜 먼저 가. "승철 선배랑 얘기했어." 승철 선배 얘기를 하자 아무말도 들리지 않았다. 핸드폰 시계를 보니 승관이 오기 전에 학교에 먼저 도착해야겠다고 생각해 학교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핸드폰에서는 버럭 소리 지르던 승관이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진짜? "엉, 그리고 너 나랑 이제 친구 못 해." 친구를 못 한다는 말에 승관이 또 말이 없어졌다. 분명 자신이 고백한 것이 실수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왜 말이 없냐, 승관아." - 어제 일은 그냥 없었던 걸로 하자, 성이름, 응? "뭐? 미쳤냐? 안돼." 승관은 징징대며 잘못했다고 하는데 그게 너무 귀여워서 핸드폰을 내 볼에서 떼고 킥킥대며 웃었다. 주위 선배나 친구, 후배가 이상하게 쳐다봤지만 그다지 신경쓰이지는 않았다. -야 내가 진짜 잘할게. 친구는 계속 하자, 응? "안돼, 너 내 남친해야돼. 친구는 못 해." 승관은 또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아, 얘 왜 오늘따라 귀엽냐. 핸드폰에 대고 마음껏 웃으니 승관이 이제 긴장이 풀린건지 같이 웃었다. - 진짜야? 이름아, 나 니 남친 맞아? "그래, 그러니까 이따 학교에서 보자." -웅, 여보. 사랑해! 5년째 우정을 이어가던 친구가 떠나고 남친이 생겼다. 근데 이 남친을 진정으로 믿어도 되는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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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이 흐지부지하게 되었네요... 부족한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