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르던 나뭇잎들이 서서히 지기 시작하는 가을 하늘, 산과 산 사이로 깊이 패어 들어간 그 곳에는 붉은 석양이 담겨있었다.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람에 풍경종이 소리를 내었다. 길가에 널려있는 나뭇잎들이며 지푸라기들이 이리저리 어지럽게 날아다녔다. 명월관의 가장 깊은 곳의 공기는 무겁게 가라앉아있었다. 검고 풍성한 트레머리의 여인이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아이는 제가 거두겠습니다. 나리께 해가 가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크흠, 헛기침을 내뱉었다. 얼굴을 양태로 드리운 사내는 곧 일어섰다.
"부탁하오."
여인은 입꼬리를 가볍게 올리며 고개를 숙였다. 바깥에서 들려오는 풍경종의 소리가 방 안에 울려퍼졌다.
화양연화 (花樣年華)
"오늘같은 날은 한껏 취해야지 않겠나!"
"아 이보게나 자네가 안가면 섭하지. 자네, 오늘마저도 우리의 청을 거절할텐가!"
"딱 한 잔만 들고 가시게나. 우리도 그 이상은 권하지 않겠네."
정국은 이래저래 난감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유흥을 즐기는 사람이 아닌지라 꺼려지는 자리였다.
"미안하오, 이내 볼 일이 있어서 들어가봐야하니,"
"이보게 친구."
자네는 먼저 들어가게나, 다음에 한번은 꼭 같이 자리를 했으면 좋겠네. 꽁한 표정을 지어대는 걸 뒤로 한 채 호석이라 불리는 자가 호탕하게 웃어보였다. 호석은 한껏 취해있는 사내들을 명월관 안쪽 길로 밀어 넣었다. 내 나중에 찾아가겠네. 정국을 보며 한껏 웃고는 손을 휘적거렸다. 사부학당에서 학문을 함께한 벗인 호석은 늘 이렇게 정국을 자리에서 빼주곤 했다. 정국은 슬핏 웃으며 뒤돌았다.
어수선한 명월관을 나온 정국은 담벼락을 따라 뒷길로 향했다. 시원한 바깥 공기가 얼굴을 감싸 돌았다. 잠시 뒷길에서 소요를 취할 참이었다. 사람의 발길이 잘 닿지 않는 명월관 뒷길은 낙엽들이 떨어져 붉게 물들어 있었다. 사박사박 걸을 때마다 낙엽이 부스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커다란 단풍 나무가 있을터인데."
정국은 느긋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가까이에 보이는 단풍 나무 아래에는 유독 붉은 단풍들을 줍고 있는 사내가 있었다. 사치를 부린 것은 아니지만 외양에 꽤 공을 들인 듯한 모습이었다. 낙엽을 줍는 것에 집중을 한 탓인지, 정국이 기척을 내도 그것을 모른 채 허리를 숙이고 있었다.
"단풍을 그리 주워 어디에 쓸 것이냐."
정국이 말을 꺼내고 그제서야 고개를 든 사내는 어여뻤다. 하얗고 볼살이 통통한게, 가을 바람 탓인지 얼굴에는 붉은 기가 돌고 있었다.
"그저 예쁘기에... 간직하려 주웠습니다."
나이가 찼음에도 단풍을 줍고 있던 것이 부끄러운지 고개를 숙인채 조곤조곤 말을 해댔다. 이것도 간직하려 꽂아놓은 것이냐. 정국은 살풋 웃으며 사내의 갓에 꽂혀진 단풍잎을 손에 올려주었다. 사내는 단풍잎이 꽂혀 있던 것이 부끄러운지 단풍잎마냥 붉게 물들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지민이라 하옵니다."
지민이라 하면 명월관 기방의 아이일 것이다. 기방에서 기른 남자 아이가 있다는 소문이 도는 이유가 이 아이 때문이구나.
"지민이라 하면, 명월관 기방의 아이겠구나."
"...그러하옵니다."
"날씨가 찬데 들어가야지 않겠느냐."
지민은 고개를 끄덕이고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그렇게 물러서 단풍잎들을 품에 안고 명월관 안쪽 골목으로 뛰어들어갔다. 어찌 급히 뛰어가는지 품에 안은 단풍잎들이 하나씩 바닥에 떨어지는 것도 모른채 사라졌다. 정국은 한발짝 걸어가 바닥에 떨어진 낙엽을 주워들었다.
"도련님! 도련님! 아이고, 어디 다녀오십니까. 제가 얼마나 걱정한지 아셔유?"
"잠시 소요를 취하려던 것이 단풍을 보느라 늦었구나."
돌쇠는 정국의 앞에서 방정맞게 큰 소리를 내며 쫓아왔다. 정국은 어쩔 수 없었다는 듯 미소를 보였다.
"아버님은,"
"여기 있었드냐."
"오셨습니까, 아버님."
낮게 깔려 울리는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정국의 아버지인 도윤의 목소리였다.
"성균관에 들어간다고 했느냐."
"아직 부족한 점이 많으나 성균관에 들어가 학문을 익히고자 하였습니다."
"네가 자만심에 차있는 것이 도리가 아님은 분명하나, 자신이 부족하다하여 책만 들여다보며 있는다는 것또한 도리가 아니다. 잘 생각했다. 이제 너의 앞길에 충실해라. 내 위치로 하여금 너에게 눈길이 많이 갈 것이야, 그것을 모조리 무시하라는 것이 아니다. 앞으로 매사 품행에 각별히 주의하거라. 너의 출삿길에 해가 되는 행동은 조심하거라."
"명심하겠습니다."
사랑채 안은 조용했다. 서로 마주보고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긴장감이 돌게 하는 도윤의 눈빛 탓이었다. 좌의정 자리에 앉아있다는 것은 권력 싸움의 우위에 있다는 것. 그만큼 도윤은 냉철하고 매서운 사람이었다.
지민은 자신의 도포 위에 붉은 단풍잎을 올려놓았다. 그분은 누구일까. 자신의 갓 위에 붙어있던 유독 붉게 물든 단풍잎을 만지작 거렸다. 단번에 지체 높은 집안의 자제인 것으로 보이나 차림을 보면 그저 한빈한 선비의 모습이었다. 명월관의 기생들과는 달리 행수 기생 난향에게서 길러진 지민은 기방의 아이였다. 현재로는 기방의 사람으로서 일하지 않지만 지민이 점점 자라며 명월관 내에 남창이 있다는 소문이 허다해져 지민을 찾는 사람이 많아 곤란한 상태였다. 난향 덕에 지금은 버틸 수 있겠지만 언젠가는 남첩으로 팔려가야 하는 운명이었다.
"다시 뵐 수 있으려나."
지민아. 문 밖으로 들려오는 우아한 여인의 기품있는 목소리에 지민은 벌떡 일어섰다.
"안에 있느냐."
"예, 예!"
지민은 당황한 목소리로 급하게 대답하며 단풍잎들을 선반 위에 올려놓고 문을 벌컥 열었다.
"이 늦은 시각에 어찌 여기까지 오셨습니까."
"오늘 낮에 사헌부 대사헌 대감께서 찾아오셨다."
"......저는,"
"지민아, 내가 언제까지 널 데리고 보듬어 줄 수는 없지 않느냐. 남첩이라 하여 인간 행세를 못하고 사는 것은 아니야."
"행수님."
"다행히 대감께서 아직까지는 첩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고 있지만, 언젠가는 나올 이야기다."
난향은 다른 젊은 기생들에 비해 연륜이 있는 얼굴이지만 누구보다 흰 피부에 둥글고 붉은 입술, 검고 풍성한 트레 머리에는 아름다운 장식들이 꽂혀 있었다. 누구보다 지민을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에 냉정하게 말하면서도 난향의 마음은 아려왔다.
"오늘은 이만 침소에 들거라."
"예."
난향이 길을 돌아 보이지 않을 때까지 지민은 밖에서 한참을 서성거렸다. 내가 진정 할 수 있는 일은 없는 걸까. 방으로 들어가는 지민의 등 뒤로 붉은 낙엽이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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