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inbow
W. 아모레
찬열은 저와 달랐다.
부모가 버린 저와 달리, 능력 있는 부모님의 사랑을 받고 자랐다. 공부를 못 했던 저완 달리, 찬열은 저를 위해 일부러 공부 하지 않았다. 있는 듯 없는 듯 숨어 지내던 저와 달리, 굳이 찬열이 다가서지 않아도 사람들이 알아서 다가 와 주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렇게, 아주 다른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랬다.
그래서, 밀어냈다.
“결혼날짜, 잡았어.”
“응….”
“나 진짜 결혼해? 그게 니가 원하는거야?”
“응. 너가 행복하길 바라니까.”
“하나도. 하나도 안 행복해. 넌, 지금 내가….”
“남들처럼 살길 바라니까.”
“…….”
“여자 만나서 애도 낳으면서 그렇게 당당하게 살길 바라니까.”
“백현아….”
“넌, 이렇게 살면 안 돼, 찬열아.”
그리고, 나 너 닮은 애기 보고싶어. 딸이면 예쁘고 아들이면 멋있겠다.
백현은 애써 떨리는 목소리를 감추며 말했다. 여기서 들켜버리면 안 되니까. 사실은, 아무도 없는 곳으로 둘이 떠나 살까, 하고 매달리고 싶었다. 이 결혼 하지 말라고. 내 말 듣지 말라고.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농담으로도 이야기 할 수 없었다. 찬열은, 저를 너무 잘 아니까. 무조건 따라줄 테니까.
“우리는 이제 어떻게 되는걸까.”
“…넌, 어떻게 하고싶은데?”
그래도, 하나는 욕심부리고 싶었다.
“계속, 보고싶어.”
“…….”
“너 결혼해서도, 애 낳고서도, 할아버지가 돼서도.”
“응.”
“너 볼래. 나 그래도 돼?”
백현이 안 쓰러워서. 저를 위한 마음이 너무 안쓰러워서. 찬열은 울었다. 오늘따라 더 왜소해 보이는 백현을 꽉 끌어안으며 울었다. 응. 응. 그래도 돼. 사랑해, 백현아.
“내가 더 사랑해, 찬열아.”
백현은 자신만 참으면 될 거라고 믿었다.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거라고. 마음이 가끔 찢어질 듯 아파왔지만 버틸만하다고 생각했지만, 몸이 문제였다. 악몽에 매일 시달렸고, 잠을 청하지 못 했다. 항상 두통을 달고 살았고, 몸이 야위어갔다. 괜찮은 건, 찬열과 있을 때 만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오래가지 않았다. 제가 보내주고도 가영과 있을 때 웃음이 늘어가는 찬열이 미웠다. 결혼 준비로 인해, 점점 보기 힘들어지는 찬열이 원망스러웠다. 그래서, 다른 남자와 섹스도 하고, 여자도 안아봤다. 그러나, 달라지는 건 없었다. 저는 여전히, 찬열이 없으면 안 됐다. 병신같은 제 꼴에 결국, 약에 손을 댔다. 처음이라 서툴렀고, 그래서 팔에 상처들이 남았다. 가리기 위해 한 여름 날씨에도 긴팔을 입었고, 숨기기 위해 찬열과의 잠자리도 거부했다.
“너…!”
너무 숨기려고 했던게 문제였는지 얼마안가 들켜버리고 말았지만.
찬열은 기겁했고, 백현은 그 때 처음으로 찬열에게 맞아봤다. 부들부들. 온 몸을 떨며 울던 찬열이 아직도 생생하다. 찬열은, 곧 바로 자신을 탓했다. 잘못은 제가 했는데. 두 번째로 백현의 앞에서 울던 날이었다. 우리가, 왜 이래야 하는지. 남자와 남자의 사랑은 왜 사랑으로 인정받지 못 하는지. 그 날은 서로 펑펑 울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다시 찬열은 저에게 신경을 써주었다. 약을 한지 얼마 안 돼서인지 가영보다 저를 챙기는 찬열의 마음이 느껴져서인지 별 다른 치료 없이도 약을 끊을 수 있었다.
*
아니, 그런 줄 알았는데.
다시 망가지기 시작했던 건, 그 여자의 손에 이끌려 찬열과 가영을 본 순간부터였던 것 같다. 진심으로 기쁘게 축하해주고 싶었는데, 축하해 줄 수 있을줄 알았는데. 말이 안 나왔다. 이게 지금 뭘까…. 제가 사랑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남편이 되어 남들의 축하를 받고 있고, 저 자신은 그 모습을 바라보는 하객이 되어 있었다. 백현은 점점 자신이 만들어 놓은 이 상황이 무서웠다. 이제야 보였다. 다신, 돌아올 수 없는 길로 들어왔다는 것을.
참고 참으며 3개월을 견뎠다. 그 사이, 백현은 많이 망가져있었다. 날이 갈수록, 찬열이 변해가는 것 같은 느낌에 불안에 떨던 백현이 할 수 있는 건. 약으로 잠시 행복해지는 것 뿐. 그렇게, 약에 손대는 횟수가 잦아졌고, 매일 밤, 가영과 잠들 찬열을 생각하며 자신의 성욕을 풀었다. 이런 것 밖에 할 수 없는 제 모습이 비참했다. 점점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되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찬열은 이 사실들을 알지 못 했다.
그건, 백현이 잘 숨겨서일까?
아니면, 이 둘 사이의 거리에 비례하는 것일까?
“찬열아, 보고싶어.”
「일 끝내고 바로 갈게.」
“찬열아.”
「응!」
“보고싶어.”
「도도하신 변백현님께서 오늘따라 왠일이실까?」
“보고싶어서…죽을 것 같아.”
「나도.」
“찬열아…, 사랑해.”
「쪽쪽쪽. 뽀뽀해줬으니까 이걸로 버티고있어.」
“응.”
전화를 끊고, 얼마안가 또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찬열아, 나 너가 필요해. 솔직히 이제와서 너한테 이런 말 하면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는데. 너 내말이면 뭐든 들어주잖아. 만약, 내가 너 이혼하라고 하면. 예전처럼, 둘이 살자고 하면. 너는, 어떻게 반응할까. 이젠, 그러기에 너무 늦었을까? 내가 왜 그랬을까, 항상 후회하고 자책해. 매일매일이 너무 지긋지긋하다. 너가 나 좀 말려줘. 도와줘, 찬열아.
“아…, 오늘 선약있어.”
“또, 백현씨에요?”
“응? 아, 아니 오늘은 동창모임이라서.”
“여보, 오늘 정말 중요하게 할 말이 있어요.”
“지금하면 안 되는거야?”
“응. 오늘 엄마아빠도 오시기로 했어.”
“장모님이랑 장인어른도?”
“그러니까 여보, 오늘은 일찍 들어와요.”
오랜만에 백현을 만난다는 생각에 하늘을 날던 기분이 땅으로 곤두박질 치는 듯 했다. 하아, 답답해. 가영이 나가고 찬열은 신경질적으로 넥타이를 풀었다. 항상, 가영은 이런 식이었다. 자신과 상의 없이 모든 일을 벌려 놓고, 통보만 하는 식. 백현이 잘 지내길 바라니까 예전부터 꾸역꾸역 참고는 있지만. 계속 이렇게 사는 게 옳은 건지. 이럴 때마다 더욱 백현의 생각이 난다. 가진 게 없어도 남들에게 욕을 먹고, 돌을 맞아도 백현과 단 둘이 살 수만 있다면 그 누구보다도 행복할텐데. 지금이라도, 다시 우리 둘이 살자고 말하면. 너는, 또 안 된다고 하겠지? 후우…. 깊이 숨 한번 들여 쉬고 백현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하는 목소리가 힘없이 들렸다. 못 간다고 얘기해야하는데….
“백현아.”
「응.」
“오늘 못 갈것 같아.”
「…….」
“미안,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겨서. 아니, 그 일 끝내고 바로 갈게.”
한 동안 수화기 너머의 백현은 말이 없었다. 화가 많이 났나? 걱정되기 시작할 즈음, 다시 밝아진 백현의 목소리가 들렸다. 괜찮은…거겠지.
「아냐, 오지마.」
“왜, 아깐 보고싶어 죽겠다며.”
「오지마. 이제 보기 싫어졌어.」
“싫어. 이젠 내가 보고 싶어 죽겠으니까 갈거야.”
「찬열아.」
“응.”
「너도 나 없을 때 아프지마.」
“응?”
「사랑한다고, 이 자식아.」
“아, 뭐야. 더 달콤하게 말해줄 수 없어?”
「싫어. 뭐가 예쁘다고. 일이나 잘하세요.」
“아무튼, 끝내자마자 갈게.”
「……끊는다.」
백현은 실소를 터뜨렸다. 울음대신 웃음을 터뜨렸다. 오늘은, 진짜 보고싶었는데…. 전화를 끊고 눈 앞에 보이는 벽에 꽉 찬 메모들을 하나씩 훑었다. 이때는, 이랬었는데. 풋풋했지. 맞아, 이때 박찬열 진짜 미웠는데. 예전으로 돌아간 듯 찬열과의 추억이 떠올렸다. 이제는, 되돌릴 수 없는 시간들이 스쳐지나갔다. 메모를 잡는 백현의 손이 덜덜 떨렸다. 안되겠다. 찬열이 올까봐 참고 있던 약을 또 다시 집어 들었다. 점점 미쳐가는 정신에 살기위해 주사를 놓았다. 찬열이 예전 같았다면 저 자신이 이렇게 썩지도 않았을테고, 이랬다 하더라도 진작 알아 줬을텐데. 괜히 죄 없는 찬열의 탓을 했다. 이렇게 만든 건 다 저 자신이면서. 멀쩡히 버티기엔 약 하나로도 부족했다. 백현이 주사를 하나 더 들었다. 아…. 정신이 아득해져 오며 안도감이 드는 것도 잠시. 하앗, 읏……, 아악! 갑작스레 가슴에 통증이 느껴졌다. 학, 학. 백현이 가슴을 움켜쥐며 거친 호흡을 내뱉었다.
찬열아. 찬열아. 하…, 찬열아. 나 너무 아파. 찬열아…. 손에 들린 주사기가 땅으로 떨어졌다.
“다녀왔어.”
찬열이 문을 열기도 전에, 가영이 문을 열었다. 어서와요. 제 기분은 아는지 모르는지 활짝 웃는 가영이다. 장모님과 장인어른도 찬열을 반갑게 맞아주시지만 찬열은 백현에게 배운 억지웃음을 써먹을 뿐이었다.
“네?”
“여보, 나 임신했어. 3개월째래.”
“…어?”
“아이고, 박서방이 많이 놀랐나보네.”
“고맙네 박서방, 허허허.”
순간 벙 졌다. 그럼, 이제 아빠가 되는 건가. 하하, 웃음이 났다. 백현이 얘기했던 저 닮은 자식을 볼 수 있겠구나. 백현은 자주 얘기했었다. 자신이 여자였으면 저랑 결혼해서 자신을 닮은 딸을 낳고, 저를 닮은 아들을 낳고 싶다고. 이 사실을 알면 좋아하겠지. 벌써부터, 환하게 웃는 백현의 모습이 그려져 마음이 급해졌다.
백현아, 좀 만 있어. 빨리 갈게.
*
찬열아.
우리, 다음세상에서는 행복 할 수 있게 남자와 여자로 태어나자. 만약, 이렇게 또 남자와 남자로 태어난다면, 지금보다 더 나은 세상에서 만나자.
이렇게 아프지 않게. 힘들지 않게. 우리가 인정받을 수 있는, 그런 세상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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