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준은 나가기에 앞서 다시 한번 자신의 복장을 확인했다. 온통 블랙을 들이부은 자신의 모습에 오히려 이쪽이 더 튀려나, 싶은 생각까지도 들었다. 요즈음 메르스가 유행이라서 마스크를 낀 사람이 많다는 것은 남준에게 큰 행운이었다. 마스크를 끼고 돌아다녀도 수상해보이지 않을테니까. 모자를 쓰고, 삐져나온 분홍색 앞머리를 정리했다. 얼마 전 호기롭게 분홍색으로 염색을 감행한 탓에 남준의 머리는 아이돌이 할 법한 확연한 분홍색이었다. 이런 꼴이 될 줄 알았으면 하지 말걸 그랬나, 이미 후회해봤자 늦은 일이기는 했다.
"범죄자가 이렇게 화려한 머리를 했다고 생각하지는 않겠지."
남준은 중얼거리며 집 밖을 나섰다.
근 일주일 만에 나간 바깥 공기는 달라진 게 없으면서도 묘하게 어색한 느낌을 줬다. 애초에 남준의 목적지는 단지 자신을 모르는 곳이었기 때문에, 사실상 이 동네을 처음 둘러보는 것과 같았다. 아... 여기가 정확하게 어디더라. 부동산 아저씨 말씀을 떠올리려 애썼다. 강원도,라고 했었던가. 정호석이 서울은 너무 각박하다고, 강원도로 들어가 맑은 공기를 마시며 작업을 하고 싶다고 징징댔었던 기억이 선명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호석이 해맑은 미소와 함께 떡하니 집 문서를 가져왔던 것도. 미친, 행동력 봐. 낄낄대며 장난쳤던 게 엊그제같았다. 그랬었는데. 남준은 한숨을 내쉬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일단 이 곳의 지리를 알아야 만약의 사태에 대비할 수 있으니까.
그저 평범한 주택가였다. 아파트와 상가들, 학교. 버스 타고 30분정도 내려가면 꽤나 큰 역이 있다는 사실도. 동네를 이리저리 돌아다니던 남준의 눈에 띈 것은 자신의 집에서 약간 떨어진 성당이었다. 빨간 십자가를 꽂은 교회도 있었지만, 뭔가 이 마을에 어울리지 않는 큰 규모인지라 거부감이 들었다. 그에 반해 남준의 앞에 있는 성당은 주위 풍경과 잘 어우러지는, 그정도 크기의 건물이었다.
"...이 마을에서 몇 없는 예쁜 건물이네."
물론 무교인 남준은 교회던 성당이던 갈 생각이 없기는 했지만. 성당 건물을 빤히 쳐다보던 남준은 이내 걸음을 옮겼다. 이 정도면 다 파악했으려나. 핸드폰은 진작에 버려두고 온 참이었다. 호석과의 연락도 해야하는데... 집에 전화기를 설치해뒀던가? 컴퓨터와 인터넷은 설치해놨는데, 집에 전화기가 있었는지는 가물가물했다.
"뭐야, 일주일동안이나 집에 쳐박혀있었으면서도 그거 하나 기억 못하냐."
자기 자신을 타박하며 남준은 집으로 향했다. 일주일 만에 정신을 차린 터라, 일단 가장 걱정하고 있을 호석에게 연락을 취하는게 첫번째였다. 지금으로써는 그가 남준의 바깥세상 연결고리였다.
띵동, 경쾌한 엘레베이터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오늘 하루종일 여기저기 돌아다녔더니 몸이 피곤했다. 달칵, 문을 여니 오늘 아침에 나갔던 그 상태 그대로의 집이 남준에게 자리를 내어줬다. 여벌의 옷가지와 라면 무더기, 침대와 컴퓨터. 휑한 집안은 사람이 사는 것 같지 않은 냉기를 풍겼다. 이러한 용도로 쓰일 줄은 몰랐지만, 미리 약간의 짐을 가져다 놓아 다행이었다. 역시나 집 안에는 전화기가 없었다. 핸드폰이면 충분할줄 알았는데. 그때는.
"뭐부터 하지..."
집 안 가운데에서 멀뚱히 서서 고민하던 남준은 이내 마음을 정하고 컴퓨터 전원 버튼을 눌렀다. 우웅, 작동하는 소리와 함께 오랜만에 보는 윈도우가 남준을 맞이했다. 정호석이 스카이프를 받으려나. 라면 물을 올리고 하늘색 S 아이콘을 눌러 스카이프를 띄웠다. 정호석... 정... 마우스 휠을 돌리며 찾은 호석은 다행이도 접속중이었다. 통화 버튼을 누르고. 뚜뚜 소리가 나기 무섭게 연결창이 떴다. 스피커에서 호석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야!!!! 살아있냐?!"
"엉, 살아있다."
"여보세요!!! 대답을 해 인마!!!!"
"아, 맞다. 마이크 꽂아야지. 여보세요?"
주위에 널브러져있는 마이크의 선을 연결하자 스피커에서도 남준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혹시나 옆집에 피해가 갈까, 남준은 컴퓨터의 볼륨은 반으로 줄이고 대화를 이어나갔다.
"와, 진짜 니 뒤진 줄 알았어.... 살아있냐?"
"걱정 마라. 살아있으니까. 걱정 많이 했어?"
"당연하지!!! 난 진짜, 니 잡힌줄 알고... 와씨, 진짜. 거기 갔냐?"
"어. 거기 갔다."
"다행이네. 이런 일로 그 집을 쓰게 될 줄은 몰랐는데.... 내가, 어? 니 무죄인거 꼭 밝혀준다, 진짜. 이게 말이 되는 소리냐? 니가 살인범이라는게?"
흥분해서 높아진 호석의 목소리를 들으며 남준은 푸슬푸슬 웃었다. 그래도 친구 놈 하나는 잘뒀구나, 생각하며. 그와 동시에, 제 처지를 다시 한 번 실감했다. 아, 나 살인범이지. 어쩌면 지금 이 시간에도 형사들이 그를 뒤쫒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수배지가 나뒹굴수도.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남준은 스피커 너머의 호석이 걱정됐다. 혹시라도, 얘가 어딘가에 불려가면 어쩌지. 주위 사람들에게 살인범의 친구라고 손가락질을 받을 뿐만 아니라, 경찰들이 그 역시 조사 할 것이었다.
"뭔 일인지는 정확하게 알고 그러냐?"
"아... 아니, 그건 아닌데."
"진짜 내가 살인범이면 어쩔건데."
"뭐, 뭐가 진짜여? 개소리말어."
싸늘한 남준의 대꾸에 당황한 호석의 목소리가 떨렸다. 여기서 진짜로 살인했다고 말하면 어떻게 될까. 호석이 그를 바로 등질 지도 모를 일이었다. 남준은 조용히 손을 들어 손가락을 쥐였다 폈다를 반복했다. 이런 위험한 떠보기를 한 이유는, 호석의 태도가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무슨 개소리냐며 당황해 사투리가 나오는 호석의 목소리를 듣자 왠지 모르게 남준은 안심했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냥, 뭔가. 호석은 믿어줄 것만 같았다. 제가 살인범이 아니라는 것을. 하기야, 제가 살인범이라는 소리를 믿었다면 이런 도움의 손길도 내밀지 않았을 테다.
"...에이, 안 속네."
"야 이 미친새꺄!!! 니 진짜 나한테 뒤지고잡냐? 어?"
"미안 미안, 그래서 지금 바깥 상황은 어때?"
"하.... 내가 진짜, 어? 너 때문에 얼마나 놀랐는지 알어? 일단은, 네 주변 사람들 조사하는 중이야. 너네 집은 당연히 왔다 갔고, 나한테도 이미 경찰이 와서 물어봤었어."
아, 이미 왔다갔나. 남준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
"걱정은 말아라. 난 절대 모른다고 했으니까. 그리고 그 집, 내 명의가 아니라 우리 누나 명의니까 아마 그쪽으로 들어올 일은 없을거야. 안심하고. 야, 솔직히 무슨 말도 안되는 죄목이냐? 살인? 네가? 사람 살린다고 의사 공부 하던 애가 무슨."
"...그러게. 야, 라면 물 끓는다. 조금 있다가 다시 전화 걸게."
"어야, 조심해라."
툭, 끊긴 스카이프 화면을 보지도 않고 남준은 부엌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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