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애 ; 아랫사람에게 베푸는 사랑
입학식, 내 첫 눈에 들어온 선배가 있었다. 소문을 듣자하니 선도부장이라는 것 같은데, 저렇게 온화한 얼굴을 하고서 담배 피는 학생을 잡는다는 것이 도저히 상상되지 않았다. 우연히 선배가 복도를 다니는 걸 봤다. 친구들하고 매점으로 가려던 중이었던 것 같았다. 환하게 웃으며 친구들하고 장난을 치는데, 나는 그 미소에 반해버렸다. 하루는 내가 선생님에게 불려서 교무실로 내려오게 되었다. 그 선배는 선도부장이니 교무실에 있겠지, 하는 마음으로 문을 열었는데 역시나. 선배는 체육선생님과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어쨋든 나는 담임쌤을 보러 왔으니까. "어, 이쁜아." "네, 무슨 일이세요?" "반 애들 이거 한 장씩 나눠줘." 하면서 선생님은 내게 종이뭉치를 건넸다. 나는 얼떨결에 종이 뭉치를 받았다. 이정도면 별로 무겁지도 않네. 나는 선배 얼굴을 한번 더 보고 나가려고 했다. "어? 너 2반이지? 여기 2반 노트 낸 거. 가서 애들 좀 전해줘." 하면서 옆자리에 앉아있던 영어선생님이 종이들 위로 30개의 노트를 위에 올려놨다. 갑자기 무거워져서 나는 살짝 비틀거렸다. 아이고, 망했다. 인사도 제대로 하지도 못 한 채 교무실 밖으로 나갔다. 교실까지 언제 다 올라가니. 나는 한숨을 쉬고 계단을 하나씩 밟기 시작했다. "어, 무겁지? 내가 들어줄게." "네?" 뒤에서 누가 뛰어오더니 내 팔 위에 얹어있던 노트들을 가져갔다. 내가 옆을 보자 방금 전까지 체육선생님과 얘기하고 있던 선배였다. 이 선배는 원래 매너가 넘치는구나. "몇 반이야? 아, 나는 3학년 1반." "저... 1학년 2반이요." 선배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작게 미소를 지었다. 좋아하는 선배과 대화 몇 마디만 나눴을 뿐인데, 내 볼이 익은 것이 느껴졌다. "귀엽다, 이름이 뭐야?" "이이쁜이요." "나는 홍지수, 앞으로 마주치면 인사하자." 인사하자는 말, 좀 더 친해지고 싶다는 말로 받아들여도 되는 건가? 나는 웃으면서 대답했다. 계단을 밟으면서 계속 되는 생각, 이 계단이 안끝났으면 좋겠다. 하지만 아쉽게도 선배와 함께한 4층 계단은 10초가 걸린 듯 짧게만 느껴졌다. 교실 문 앞까지 도착해서 선배는 내게 다시 노트를 건넸다. "감사합니다." "아냐, 당연한 일이지. 나중에 보자." 선배가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나는 교실 안으로 들어가 유인물과 노트를 행복하게 나눠줄 수 있었다. 이 영광을 내게 심부름시킨 담임선생님과 적당한 타이밍에 대화를 끊어준 체육선생님께 드립니다. 점심시간, 점심을 다 먹고 친구는 매점을 안가겠다며 먼저 교실로 올라갔다. 치, 그래도 매점은 같이 가주지. 매점은 항상 전쟁이란 말야. 나는 주머니에서 오백원짜리 동전을 꺼내 손에 쥐고 매점으로 향했다. "아줌마! 가나초콜릿이요!" "여기 월드콘이요!" 역시 전쟁이구나. 그냥 자판기 음료수나 뽑을까. 나는 동전을 손에 쥐고 몸을 자판기 쪽으로 돌렸다. 자판기 앞에 서서 뭘 뽑을지 고민을 하는데 뒤에서 누군가 어깨를 톡톡하고 쳤다. "누구세요, 아, 지수선배?" 뒤를 돌아보자 해맑게 웃고 있는 선배가 바나나우유를 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 중에 하나를 내게 건넸다. 아, 이걸 왜 나한테? "너 마셔. 매점에서 가져왔어." 바나나우유, 천원도 아니고 무려 1200원이나 하는 비싼 것이었다. 천원지폐만으로 살 수 없는 비싼 음식, 그걸 나한테 준다는게 말이 되나. 나는 바나나우유를 받으면서도 의문을 가졌다. 선배는 자신의 손에 들려 있던 바나나우유에 작은 빨대를 꽂으려다가 내게 건넸다. 그리고 자신은 이빨로 구멍을 내, 마시기 시작했다. "감사합니다." 나는 허리를 숙여 인사를 했고 빨대로 한 가운데에 뚫어 바나나우유를 마셨다. 달달한 바나나우유, 마치 선배랑 비슷한 느낌인 것 같다. "다음에는 제가 매점 쏠게요!" "아냐, 괜찮아. 친구가 안먹는다고 해서." 거짓말. 그정도는 나도 다 알아요. 선배는 보기 좋은 웃음을 띄고 날 쳐다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괜히 기분이 좋아져 나도 따라 웃게 되었다. 선배하고 좀 더 가까워진 느낌이 들었다. 며칠 새에 핑크빛 기류가 돌았다. 연락도 하고 지내면서 썸을 타는 듯하기 시작했다. 항상 선배 이름만 들어도 두근거리고 학교생활이 행복해졌다. 내가 이번에 용기를 내서 토요일에 보자고 했다. 선배는 흔쾌히 승락했고 나는 이번 기회에 고백을 하자고 다짐했다. 예비 문창과의 실력을 좀 뽐내볼까. 꽃그림이 그려져 있는 편지지를 꺼냈고 연필을 들었다. 너무 오글거리지는 않게, 그러나 내 마음은 확실히 드러나게. 편지를 쓰고 있는 동안에도 난 행복에 가득찼다. 선배에게 사복패션을 처음 선보이는 거라 한시간동안 고민을 했다. 나름대로 화장도 하고 선배를 만나러 걸어갔다. 오늘따라 공기도 좋고, 사람들도 좋고, 가게에서 나오는 노래들도 좋고. 그냥 내가 밟는 걸음걸음마다 기쁨이 넘쳤다. 핸드백안에는 손편지만 넣은 채 나는 카페 안으로 들어갔다. "어, 이쁜아, 여기야!" 역시 선배는 옷도 잘 입는구나. 나는 웃으면서 선배를 반겼다. 선배 맞은 편에 앉아서 손을 만지작거렸다. 괜히 긴장되고 왜 그러냐. "어떤 거 마실래?" "저, 카페라떼요." 선배는 고개를 끄덕이고 카운터로 갔다. 나는 선배의 뒷 모습을 한참 바라보았다. 어쩜, 뒷 모습도 저렇게 멋있을 수가 있을까. 선배는 주문을 다 한 건지 진동벨을 들고 내게로 걸어왔다. "조금 기다리래." "아, 선배 커피 얼마죠? 제가 원래 사야 하는데." 뒤늦게 내가 먼저 보자고 한 것이 생각나 핸드백에러 지갑을 꺼내는데 선배가 큰 소리로 웃으며 필요없다고 말했다. 커피정도는 살 수 있어. "선배한테 자꾸 얻어 먹기만 하네요. 죄송해요." "아냐, 나도 사고싶어서 사는건데. 미안할 필요 하나도 없어요." 선배가 내 머리를 쓰담으면서 웃어줬다. 아, 설레서 죽을 것 같아. 얼굴에 열이 오른 느낌이 들어 난 고개를 푹 숙이고 들지 않았다. 이 얼굴을 들키면 매우 쪽팔리겠지. "어? 홍지수!" 고개만 푹 숙이고 있었는데 어디선가 들리는 여자 목소리에 고개를 들게 되었다. 누구지? 여자는 자연스럽게 다가와 선배의 옆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팔짱을 끼며 날 가리켰다. 얘는 누구야? "아, 아는 후배." "안녕, 난 지수 여자친구야." 여자, 친구? 내가 생각하는 그 여자친구, 애인을 말하는 건가? 그럴리가 없는데. 여자친구가 있으면 나한테 왜 그렇게 친절하게 대한거야. 선배, 듣고 있으면 무슨 변명이라도 해주세요. "아, 내가 얘기 안해줬구나. 너랑 만나고 여자친구 만나기로 했는데, 자기 왜 일찍 왔어?" "어? 친구들이랑 일찍 헤어져서." 그리곤 둘만의 세상인듯 하하호호 웃으면서 대화를 이어갔다. 아, 나 혼자 썸이고 그냥 짝사랑이었구나. "근데, 나 왜 불렀어?" 여기서 편지를 던지고 여주인공처럼 울면서 뛰어갈까. 미쳤어? 그런다고 지수선배는 니 뒤 안쫓아와. 나는 핸드백을 챙기고 의자에서 일어났다.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겨서요. 다음에 얘기해요." 곧 눈물이 터질 것 같아 황급하게 카페 밖으로 나갔다. 아휴, 병신아. 여친 여부가 제알 중요한 거였는데. 나는 카페 뒤에 있는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벽에 기대고 주저 앉았다. 그냥, 누구에게나 그렇게 편하게 대한 거구나. 나라고 특별했던 건 아니구나. 나는 그냥 좋은 후배지, 그래. 후배로만 보였지. 잘가요, 내 첫사랑. 핸드백에서 편지를 꺼내 읽어봤다. 읽으면 읽을수록 더 비참하게 보이는 내 마음이었다. 나는 편지를 잘게 찢어서 하수구에 버렸다. 그렇게 난 하수구 속으로 편지와 함께 내 첫사랑을 보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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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입니다. 그동안 쓰기차단에 걸려서 못 왔어요. 다음 편은 모레 안으로 찾아뵐게요^^ 오늘도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