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공지사항을 꼭 읽어주세요!*
ASTRAY
길을 잃다
*
분명한 것은
이 겨울은 끝나지 않는 겨울이라는 것
나는 점차로 가라앉는다
천사가 이곳에 있다
무엇인가 기다리고 있다
천사가 나를 내려다보며 웃는다
내가 죽기만을 바라고 있다
-황인찬 <기록> 중,
*
민윤기를 처음 본 것은 고등학교 입학식이 있던 날이었다.
감정이라고는 털끝만큼도 존재하지 않는 지리멸렬한 표정, 그 공허하고 아름다운 얼굴을 본 순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그를 사랑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
‘친구’라는 명목상의 경계가 바스라지는 것은 쉬웠다.
진한 머스크 냄새가 나는 민윤기의 자취방에서 브래지어의 후크를 잠그고 교복 블라우스를 꿰어입으며 나는 무슨 생각을 했던가.
제일 처음 머리에 스쳐 지나간 것은 영혼을 집어 삼킬 것처럼 진득하게 내 위에서 키스를 하는 민윤기의 얼굴이었고, 곧이어 발끝부터 머리 끝까지 쌉싸름하게 싸고도는 두려움에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아 열이 오른 얼굴을 감쌌다. 조급하게 내팽개쳐진 옷가지들부터 침대 옆 협탁에 놓인 뜯긴 콘돔 포장지, 하얀 침대 시트 위에 묻은 핏자국까지, 모든 정황이 야속할 정도로 정확하게 맞아떨어졌다.
나는 최대한 빨리 옷을 주워입으며 흐느끼지 않으려 애를 썼다. 굳은 허리가 어제의 기억을 못 박듯 뻐근하게 저려왔다.
“안 갔네.”
욕실 문이 열리자 그의 표정 없는 하얀 얼굴이 시야 안으로 들어왔다. 삼년간 닳도록 봐 온 공허한 낯은 엉망이 되어 우는 나를 보고도 변함없이 냉랭했다.
물기가 남아 있는 밝은 금발을 수건으로 탈탈 털던 그는 조금의 머뭇거림도 없이 성큼성큼 다가와 내 손목을 잡아끈다. 나는 저항하지 않고 몸을 휘청이며 그가 이끄는 대로 움직였다.
들짐승을 붙잡은 사냥꾼처럼 억세게 나를 벽으로 밀어붙인 그는 감정 없는 얼굴을 불쑥, 코 앞으로 들이민다. 날카로운 시선에서는 귀찮음과 신경질이 묻어났다.
올곧게 전해지는 감정이 너무 빤해서 허탈할 지경이었다.
“너, 왜 울어?”
“아무것도…”
“일어나서 생각해보니까 몸 내준 게 억울해?”
“흡, 아니-,”
“근데 왜 울어.”
표정만큼이나 무심한 목소리가 마디마다 가라앉았다.
비수를 맞는 와중에도 민윤기 특유의 뭉개지는 말투와 툭 튀어나온 목울대가 여전히 숨이 멎을 만큼 아름다워서, 그와 시선이 맞닿았다는 것조차 벅차올라서, 나는 조금 더 비참해진다.
“합의 하에 잤고, 콘돔 썼고, 무리하게 여러번 요구하지도 않았고. 문제 없다고 보는데. 그만 울고 학교 가지?”
“…”
“여기저기 떠벌이고 다닐까봐 걱정하나 본데, 입 터는 일에는 관심 없어. 서로 하루 즐긴 거라고 생각하고 잊자, 어?”
한숨을 쉬며 침대 아래 떨어진 구겨진 옷가지들에 시선을 잠깐 둔 그는 검은 브리프만 입은 상태로 휘적휘적 걸어가 서랍장에서 새 와이셔츠를 꺼냈다.
느긋하게 단추를 잠그고, 교복 바지를 꿰어 입고, 조끼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교복 자켓을 걸치는 그 일련의 과정을, 눈물이 고여 흐린 눈으로 잠자코 쳐다보았다.
너는 아침에 이렇게 학교에 갈 준비를 하는구나. 여전히 지독한 열병을 앓는 나는 어느새, 가볍게 치부되어버리는 내 존재의 서글픔보다도, 보지 못했던 너의 일상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에 더 큰 의미를 두고 있었다.
“나…흐으, 나, 너 좋아해.”
“…뭐?”
“나, 진짜…너 많이 좋아해…”
봇물이 터지듯 한번 터져나온 진심은, 막을 틈도 없이 끊임없이 밀려나왔다. 민윤기가 내 마음을 받아주기는커녕, 이해하려 들지도 않으리라는 것쯤은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원래 그런 사람이니까. 그걸 알고도 그를 사랑해왔으니까.
일방적인 관계에는 정지 버튼도, 뒤로가기도 없었다. 나는 8배속으로 끊임없이 직진했다.
어느 순간부터 추락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을 때는 이미 늦은 후였다. 바닥에 내던져지면서도 나는 후회가 없었다.
“그래서, 나보고 어쩌자는 건데.”
“…”
“이런 말을 하는 의도가 뭐야. 사귀자고? 아니면 뭐, 책임지라고?”
“그런 거 아니야…!”
“아니야? 그러면 뭐지? 너를 이 공간에 들이기 전에 분명히 얘기했던 것 같은데. 섹스 한번 한다고 해서 우리 관계가 변하거나 하는 건 아니라고.”
미간을 찌푸린 그가 책가방 안에 교복 조끼를 쑤셔넣으며 여전히 건조하고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한마디 한마디가 검의 날이 되어 나를 꿰뚫었다.
더 이상 눈물을 흘리지 않으려 손톱이 손바닥에 파고들도록 세게 주먹을 쥐었다. 지금 다시 주저앉으면 다시는 일어설 수 없을 것 같아서, 더 이상 그 앞에서 무너지고 싶지 않아서 이를 악물었다.
“지각하고 싶지 않으면 빨리 씻는 게 좋을 텐데.”
“너 왜 나랑 잤어?”
책가방을 어깨에 걸치고 현관으로 나가던 그를 향해 다급하게 외쳤다. 민윤기는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는 것으로 불편해진 심기를 드러냈지만, 어찌되었든 나는 물어봐야만 했다.
“글쎄. 그냥 그러고 싶었으니까.”
“그런데 왜 하필이면 나였어?”
“하필?”
텅 빈 표정 위로 지루함이 가면처럼 덧씌워졌다. 피곤하다는 듯 손등으로 눈을 비비던 그의 입꼬리가 조금 비틀려 올라갔다.
비웃음도 미소라면 미소였다. 책가방을 아무렇게나 현관 앞에 던진 그가 눈 앞까지 걸어왔다.
코와 코가 맞닿을 거리, 나는 짧게 호흡을 삼켰다. 그가 눈을 접어 웃었다.
이렇게 활짝 웃는 얼굴은 너무나도 낯설어서, 마치 다른 사람을 마주한 것처럼 당황스러웠다.
내가 너에게 그렇게 치이고도 이렇게 옷깃을 붙잡고 늘어지는 꼴이 우습고 딱해서 웃는 걸까. 아니면 너는, 너와 섹스를 했던 모든 여자들에게 서비스 차원으로 한번쯤은 이렇게 달게 웃어주는 걸까.
“김화양, 나는 말이지, 너를 콕 집어 고른 게 아니야.”
목소리를 낮춘 그가 입술을 벌려 내 귀를 가볍게 물었다. 숨을 내쉬면서 귓가에 스쳐지나가는 공기가 온몸이 짜릿해질 정도로 색정적이었다.
“내가 외로웠을 때 우연히 네가 있었던 것 뿐이야.”
아아. 그 말을 듣는 순간 내가 안간힘을 다해 붙잡고 있던 희망의 실들이 전부 툭, 소리를 내며 끊겼다.
역시 너는. 그렇게 가볍고 장난스럽게 모든 걸.
귀와 턱을 타고 내려가 목을 핥으며 교복 치마 안으로 손을 밀어넣는 그를 저지할 의지도 없이 눈을 감고 몸의 힘을 풀었다. 이젠 아무래도 상관 없었다.
허벅지에 닿는 손가락의 차가운 감촉을 느끼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모든 건 너무나도 쉽고 간단하게 으스러진다.
사랑도,
사람도,
희망도,
너도.
“하루쯤은 지각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안 그래?”
머리가 침대에 닿는 푹신한 감촉에 눈물이 조금 났다. 천천히 눈을 뜨면 흔들리는 시야 사이로 네가 보인다.
고개를 뒤로 젖히며 눈을 감는 너의 표정, 미간을 찌푸리고 혀를 내어 입술을 핥는 너의 표정, 숨김없이 내보이는 쾌락, 나로 인해 감정을 느끼는 너.
그래, 이만하면 됐다고 생각했다. 표정을 보이는 너로도 나는 족했다.
끝끝내 겨울에 박제되어 더 이상 오지 않을 봄을 기다리지 못하게 되더라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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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반응 연재입니다! 엄지랑 댓글은 작가의 원동력과 힘이 되어요!
2. 말 그대로 나쁜 남자 민슙슙 시리즈입니다! 알파벳 a부터 z까지 각기 다른 단편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맨 마지막 z편까지 끝나면 투표를 받아 독자분들이 가장 원하시는 에피소드를 연재할 생각입니다 :)
3. 아직 암호닉은 받지 않습니다! 추후에 따로 암호닉 신청 페이지를 만들 예정이니 원하시는 분들에 한해 암호닉 페이지에서 받겠습니다~
(종종 수위가 있는 번외나 각 알파벳들의 뒷이야기를 메일링하게 될 경우, 암호닉 신청해주신 분들에 한정해 보내드릴 예정입니다.)
그럼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아직 시리즈가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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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라방 실시간으로 요약해주고 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