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왔다."
캐리어 하나를 끌고 높다란 건물들을 바라보는 이태일. 차가운 밤공기에 추울 법도 한데, 한참이나 그 자리에 서서 움직이질 않는다.
"제발, 만날 수 있게 해주세요."
조용히 캐리어를 놓고 두 손을 붙잡고 웅얼거리던 태일은 이내 캐리어를 다시 잡고 길을 걷기 시작했다.
대구 판타지 上
"카푸치노 하나요."
주문을 하고 가장 구석 자리에 앉아 핸드폰을 들어 올렸다. 캐리어는 안 쪽으로 치워두고 핸드폰을 꺼내든 태일의 얼굴이 조금 붉다. 잠시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다가, 앨범으로 들어가 사진 하나를 누른 태일.
이국적으로 생긴 앳된 얼굴. 태일은 가만히 그 사진을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몇 년 전. 중학교 1학년 겨울 방학 때였다.
엄마 손에 이끌려 잠시 오게 된 대구는 굉장히 낯설었다. 사람들이 쓰는 사투리는 물론, 그냥 도시 자체가 낯설고 정이 가지 않았다. 이상하게 묘한 느낌이 드는 도시를 바라보며 주변을 둘러보다가 엄마와 떨어지게 되었고, 끙끙대며 엄마를 찾으러 돌아다니던 태일이 추워서 들어간 곳이 이 프랜차이즈 커피점이었다.
따뜻한 안 공기에 안도하며 코코아 하나를 시키고 있는데 뒤에서 자신을 톡톡 치고 별안간 "몇 살이야?"하고 묻던 아이. 이국적으로 생긴 모습이 전혀 본인 또래가 아니라 당황해서, 혹시 삥이라도 뜯으려는 건가 하고 두려움에 떨며 "열..네 살"하고 대답했던 기억이 생생한 태일이다.
우습게도 동갑이었다. 태일은 전혀 믿지 못했지만 어쨌거나.
"안재효."
작게 웅얼거려 이름을 부른 태일이 핸드폰 홀드 키를 눌렀다. 그리고 가만히 눈을 감고 카푸치노를 마셨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커피는 질색이었고 항상 코코아만 마시곤 했는데. 그 때도 그렇고.
이름이 뭐냐며 서로 이름을 알려준 두 사람은 한참이나 그 안에서 떠들다가, 뒤늦게 태일이 엄마한테 가봐야한다며 일어나자 그제야 재효도 일어나며 길 알려줄게,하고 앞장섰다. 엄마한테 전화가 온 태일이 진땀을 빼며 빨리 갈게요 하고 설명을 하고, 재효는 그 모습을 보며 키득거렸다. 재효가 앞장서서 걸어가고 뒤를 졸레졸레 쫓아가던 태일은 문득 자신의 앞에 있는 저 앤 뭘까,하는 생각을 했다.
이상하게도 그 애가 좋았다.
"여보세요."
[이태일 너 지금 어디야!]
"아, 엄마. 나 지금 대구."
[뭐? 니가 대굴 왜 가, 이 놈아.]
"볼 일 있어서 온 거에요. 수능도 끝났고 방학인데 뭐."
[아니 갈 거면 말을 하고 가던가.]
"알았어요. 새해 밝기 전엔 갈게요."
[태일아!]
전화를 뚝 끊어버린 태일이 기지개를 쭉 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작정 오기는 했지만 어디서 만나야 하지.
몇 년 전 한 번 봤던 인연 하나 가지고 이렇게 찾아온 자신도 우습다.
실실 웃으며 캐리어를 끌고 밖으로 나온 태일이 찬 바람에 몸을 움츠리며 목도리로 코까지 얼굴을 감쌌다. 그리고 주머니에 손을 꽂고 다른 한 손만 캐리어를 붙잡고 질질 끌며도로로 나갔다.
* * *
엄마를 찾은 후 재효와 태일이 나눈 이야기는 별 거 없었다. 하지만 태일이 똑똑히 기억하는 것은 재효가 한 말 중 '난 대구를 절대 안 떠날 거야' 이 한 마디. 그리고 무슨 정신으로 이야기를 나눴는지 기억도 안 난다. 급하게 엄마가 가야 한다며 잡아 끌었고 어설프게 인사를 한 뒤 헤어졌으니까. 엄마 손에 이끌려 도착한 대구의 한 호텔에서 잠을 자고 일어나서, 태일은 꿈을 꾼 듯한 기분을 느꼈었다. 커튼을 걷자 보인 창 밖의 대구란 도시는, 어제의 그 불이 환하게 켜진 재효라는 아이와 있었던 대구와는 너무도 달라 보였다.
그리고 지금. 창 밖으로 보이는 대구는 그 때와 별 다를 바 없는 야경의 대구. 알 수 없는 그리움에 휩싸여 태일이 멍하니 창 밖을 바라보다가, 이내 TV를 켜며 가방을 풀기 시작했다. 엄마와 왔던 그 호텔도 그대로였다. 고작 하루였지만 대구는 뭐 하나 변한 게 없다. 개운하게 씻고 노곤해진 몸으로 침대에 풀썩 올라탄 태일이 끙하고 기지개를 켜며 나른한 느낌을 즐기다가, 이내 재효에 대한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뜬금 없이, 친구들과 이야기를 하다가 '대구'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떠오른 건 재효였다. 몇 년 간 잊고 지내다가 갑자기 확 떠오른 것이었다. 그 날 이후 바로 서울에 올라가 집에서 있으면서도 일주일 정도는 안재효란 녀석 생각으로 멍하니 보냈었다. 마치 꿈을 꾼 것 같아서 굉장히 묘한 기분이었는데, 순식간에 모든 걸 잊고 몇 년을 이렇게 살아온 본인도 옷기고, 갑자기 떠올리고 대구까지 와버린 것도 웃기고.
"안재효."
그 아인 뭐였을까.
대구에 사는 자신과 동갑인 아이라는 것 빼고는 뭣 하나 아는 게 없다. 가만히 생각을 하며 입술을 잘근잘근 씹다가 태일은 그대로 눈을 감았다. 마치 몇 년 전 그 날, 꿈같던 날로 돌아간 기분이 들었다.
그래, 그 날 부터였다. 대구에 묘한 판타지를 품게 된 것은.
태일은 자신의 눈 앞에 보인 운동장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딱히 여기 다닌다는 말을 한 것도 아닌데, 그냥 무작정 이 고등학교를 보자 자기도 모르게 들어와 버렸다. 낯선 사람을 보는 시선을 의식하며 목도리에 얼굴을 파묻은 태일이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어차피 방학인데, 그리고 대구의 수많은 고등학교 중 한 곳인데. 여기에 있으리란 보장이 전혀 없는데.
"저기요."
뒤에서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니 보인 건 키가 매우 큰 남자. 순간 안재효?하고 물을 뻔 했지만 안재효가 아니다. 분위기부터가 다르고 생김새도 이국적이지 않다. 실망감을 감추지 못하고 태일이 "네?"하고 묻자 남자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혹시 이름이 이태일이에요?"
원래 평범한 학생이었기 때문에, 같은 학교는 잘 알았지만 다른 학교는 아는 학생이 몇 없었다. 게다가 타지인 대구라면 더더욱.
"어떻게 아셨어요?"
방학인데도 불구하고 교복 차림인 남자를 의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묻자 쭉 찢어진 눈으로 웃는다.
"그냥요. 혹시 지금 안재효 찾아요?"
뭐지, 이건.
고개를 끄덕이자 '그럼 따라오세요'라며 뒤돌아서 운동장을 나서는 남자. 의심스럽긴 했지만 딱히 해코지할 것 같아 보이진 않아서 그냥 쫓아갔다.
택시를 타고 어느새 대구랑은 멀어진 곳. 대구에서 평생 살겠다더니, 하고 조금은 실망감을 느끼며 창 밖을 내다보는데 옆에 타 있던 남자가 나를 부른다. 고개를 돌리다가 문득 들어온 교복에 박힌 이름은 '우지호'. 그 때 남자의 목소리가 내 귀를 파고 들었다.
"대구 어떻게 생각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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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제가 대구에 대한 환상이 조금 있어요 태일이 얘기는 제 얘기랑 비슷하겠네요 ㅋㅋㅋㅋㅋ 담편은 내일. 혹시 봐주시는 분 계시다면 감사드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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