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권도 국가대표 전정국
Written by. 쌀알
「 다음 소식은 내년 개최를 앞둔 리우올림픽 소식입니다. 태권도 간판스타 전정국 선수가 오늘 오후에 열린 올림픽 예선전 경기에서 정상에 오르며 리우 올림픽 본선 출전권을 따냈습니다. 그리고 4년 전 런던 올림픽의 문턱에서 좌절했었던 여자 49kg급의 김탄소 선수도 최종 1위로 본선 출전권을 따냈는데요. 두 선수 말고도 남자 58kg급의 김태형 선수는 최종 3위로 시리즈를 마쳐 태권도 대표팀은 내년 리우 올림픽에 역대 최다인 5체급 진출을 확정 지었습니다. 펜싱의 민윤기 선수와 정호석 선수는 세계펜싱선수권대회에서 각각 사브르, 플뢰레 종목에서 금메달을 획득하며 올림픽 본선 출전권을 따냈다고 하는데요. 우리나라 대표팀은 다가오는… 」
태권도 국가대표 전정국
Written by. 쌀알
심판들과 회의를 마친 주심이 매트 위에 올라섰다. 청, 홍색의 보호 용구를 착용한 두 선수를 중심으로 경기장에는 긴장감이 맴돌았다. 주심이 오른쪽에 서 있던 선수의 손을 들고, 경기장을 비췄던 전광판에는 우승자가 된 선수를 클로즈업했다.
‘2016 리우데자네이루 하계올림픽 태권도 예선전 여자 49kg급 김탄소 우승’
점수는 8 : 6으로 앞서고 있었지만 누적된 경고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었기에 초조히 결과를 기다리던 대한민국 코치진들과 선수들에게서 안도의 한숨과 환호성이 터졌다. 탄소는 머리를 조이던 보호대를 벗으며 매트에서 내려왔다. 빠져나온 잔머리카락들에서 땀이 뚝뚝 떨어졌다. 마지막 3회전 때 긴 다리를 이용해 돌려차기를 하는 상대 러시아 선수에게 발등으로 볼을 정통으로 맞는 바람에 광대뼈 쪽의 근육이 욱신거렸다. 겨루기에서 보호 용구가 필수 착용인 규정이 없었다면 아마 제 귀도 성치 않았을 것이라고 탄소는 생각했다. 이미 경기가 끝났지만 도복도 갈아입지 않고 관중석에 앉아있던 정국과 태형도 어느새 아래로 내려와 탄소의 머리를 헝클이며 축하했다. 기쁜 마음에 태형과 얼싸안고 폴짝폴짝 뛰는 탄소의 얼굴을 본 정국이 놀라며 말했다.
“어, 누나 광대에 멍들었다. 이거 이따가 더 진해질 것 같은데.”
자신들을 빙 둘러싼 사람들을 뚫고 정국은 의료진을 찾았다. 아이스팩 하나만 주시겠어요? 타박상이요. 아이스팩을 받아온 정국은 꽝꽝 언 아이스팩을 주무르며 탄소에게 다가갔다.
“누나 잠깐만 나 봐요.”
“응?”
자신보다 한 뼘 작은 탄소의 얼굴을 잡고 파란 아이스팩을 연하게 보랏빛이 도는 멍에 갖다댔다. 으, 차거차거. 많이 차가워요? 많-이. 멍이 든 볼에 차가운 느낌과 욱신거리는 느낌이 같이 드니 많이 고통스러웠는지 탄소는 팔을 파닥거렸다. 김탄소 선수님 메달 수여식 준비하실게요-
“이 누나 금메달 목에 걸고 오마.”
“갔다와요.”
자신을 이끄는 진행 요원을 따라간 탄소는 단상 앞에 줄 서 있는 타국의 선수들에게 다가갔다. 축하한다며 말을 전하는 선수들과 포옹을 하고 서툰 영어로 감사를 표했다. 제일 높은 1위 단상으로 올라간 탄소는 활짝 웃는 얼굴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위원장과 악수를 하고 짧은 포옹을 나눈 그녀는 카메라가 다른 곳을 비춘 틈을 타 자신을 보고 있는 정국에게 손가락 하트를 날렸다. 저 누나가 기사 나면 어쩌려고. 주변 지인들과 선수촌 사람들만 알고 있는 저와 탄소의 연애 사실이었다. 경기장에 흘러나오는 애국가에 금세 집중을 하고 작게 따라부르기까지 한 탄소는 폴짝폴짝 뛰어내려와 인터뷰까지 또박또박 잘 마쳤다. 사람들이 건네주는 팬레터를 하나도 빠짐없이 받은 그녀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하고 웃었다. 젊은 여자 코치를 따라 버스에 탄 탄소는 망설임 없이 뒤쪽에 앉아있던 정국의 옆에 착석했다. 앞자리에 앉은 태형은 게임을 하는지 팡팡 터지는 소리가 났다. 게임 하는 사람 이어폰 껴라. 죄송합니다아. 하여튼 쟤는 저거 맨날 까먹더라. 그러게요. 웃으면서 탄소의 말에 대답한 정국은 묶여있던 커튼을 풀고 노을이 지는 밖을 가렸다.
“나 노을 보고 싶은데.”
“커튼 걷을까요?”
“아니, 괜찮아. 그냥 해본 소리야.”
정국의 소소한 배려에 조금 감동한 탄소는 정국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아이, 우리 정국이 배려도 잘하네- 여자친구 많이 감동.
“예쁜 얼굴에 멍들어서 어떡해요.”
“마음에도 없는 예쁜 얼굴이라는 단어겠지만 고맙다. 여자로 태어나니 이런 이점도…”
“그 놈의 자기 비하 좀. 누나 진짜 예쁘다니까? 내 눈에는 누나가 아이유고 아프로디테예요.”
“아이유는 좀 오바."
“그랬나?”
“완전 그랬나. 나 아까 진짜 아팠어.”
남들에게 아픈 내색을 잘 못하는 탄소는 입술을 삐죽 내밀고 정국에게 투정을 부렸다. 남자친구 존재에 있어서 나름의 이점이었다. 의젓한 척 하느라 아프다고 말도 못하는 거 그나마 남자친구에게 말하기.
“아까 놀랬어요. 2층에서도 퍽 소리 완전 크게 나던데.”
“그치. 나 골 울리는 줄 알았다니까.”
“그래도 누나가 그거 맞고 빡쳐서, 아니 반격해서? 3대나 연속으로 때렸잖아요.”
“그랬지.”
“그럼 된거죠, 뭐. 선수촌 도착하면 의료실 가서 아이스팩 받아가요.”
“알았어. 근데 정국아.”
“네?”
“너 지금 피곤하지.”
“티 났어요?”
“많이 나. 너 지금 눈 충혈됐어. 선수촌 가는 길에 눈 좀 붙여.”
“누나는요?”
“나도 잘거야.”
잘자요. 응, 너도. 꿈에서도 만나요. 꿈 정류장에서? 네, 꿈 정류장에서. 어깨에 머리를 대고 크크 웃음소리를 내며 웃은 정국은 탄소의 작은 손에 깍지를 꼈다. 이어폰이 고장나는 바람에 조용한 버스 안에서 오롯이 둘의 대화를 다 들은 태형은 그사세를 개척하고 꿈나라로 여행 간 둘을 힘껏 째려보았다. 그리고 화면으로 눈을 돌린 다음엔 허망감에 빠졌다. '이동 횟수를 다 써버렸어요.' 재시도를 누른 태형은 화면을 채운 '하트가 없어요.' 창에 머리를 쥐어뜯었다. 이것만 깨면 눈설탕 숲인데! 내가 저 커퀴새끼들 때문에 진짜. 태형은 신경질적으로 '친구에게 요청하기' 버튼을 누르고 눈을 감았다. 깍지를 낀 두 연인을 가린 커튼 너머로 금세 땅거미가 졌다.
***
(두 번째 브금입니다. 맨 위 브금을 꺼주시고 이걸 틀어주세요!)
버스가 선수촌 입구에 멈춰섰다. 느적느적 선수들이 나갈 채비를 하고 하트 충전을 기다리다 잠이 들었던 태형도 어느새 깨 기지개를 키며 찍찍 하품을 했다.
“누나, 도착했어요. 일어나요.”
“……”
“탄소야.”
“이게 어디서 탄소래.”
우씨. 눈을 감고 있던 탄소는 번쩍 눈을 떴다. 깊은 잠에 빠진 탄소를 깨우는 데에는 호칭 생략이 직방이었다. 앞에서 비몽사몽한 눈으로 패딩 지퍼를 잠그던 태형이 말했다.
“이야, 전정국 많이 컸네. 이제 누나란 말도 안하고.”
“그러니까. 전정국 누나 소리 점점 안하지, 이제.”
탄소는 정국이 괘씸했는지 그의 양볼을 잡고 쭈욱쭈욱 늘렸다. 찹쌀떡 마냥 잘도 늘어난다.
“느나 아하여.”
“아프라고 한거야.”
염장질 작작하고 내려, 이 커퀴들아. 백팩을 맨 태형은 아직 자리에 앉아서 일어날 생각을 안하는 한 쌍의 바퀴벌레들에게 먹던 빼빼로를 던지는 시늉을 했다.
“이것도 염장질이 되는건가.”
“솔로 눈에는 뭐만 보인다잖아여.”
이것들이 쌍으로 뒤질라고. 양손에 아몬드 빼빼로를 든 태형은 둘에게 진짜로 그것을 던졌다. 저딴 것들한테 내 과자를 소비하다니. 아오씨.
“다들 수고 많았다. 오늘은 푹 쉬고, 월요일에 보자. 해산.”
수고하셨습니다! 칼바람에 패딩에 얼굴을 묻은 선수들이 소리쳤다. 월요일에 봐, 안녕. 안녕히 가세요. 이틀 뒤에 봬요. 집으로 가는 선수들과 선수촌 내의 숙소로 가는 선수들로 나뉘어 인사를 하고 탄소는 주머니에 있던 핸드폰을 꺼냈다. 카톡 43개… 이건 친구들, 이건 김태형, 이 새끼는 뭐 보내는게 하트 보내달라는 것 밖에 없어. 밀린 문자와 카톡은 나중에 확인하기로 하고, 일단 부재중 전화부터 처리해야겠다 싶어서 통화 기록에 들어갔다. 엄마 1통, 윤기 오빠 1통, 남준 오빠 1통, 호석 오빠 4통…? 뭔 일이길래 전화를 이렇게 많이 했나 싶어 호석에게 전화를 걸었다.
[ 여보세요. ]
“어, 오빠 나 탄소. 왜 전화했어?”
[ 아, 그게. 너 지금 선수촌 도착했어? ]
“어. 지금 정문에서 숙소 들어가려고 하는데.”
[ 들어가지마, 들어가지마. ]
“엥. 왜여.”
[ 지금 빨리 개선관으로 와. 우리 훈련하는 데 알지? 정국이랑 태형이 데리고 빨리 와. ]
오빠. 오빠! 자기가 할 말만 하고 전화를 끊어버린 호석에 탄소는 잠시 욱할 뻔 했지만 꾹 눌러참았다. 그리고 앞장서서 숙소로 걸어가던 태형과 정국을 불렀다.
“김태형, 전정국. 호석 오빠가 개선관으로 오래.”
“개선관은 왜?”
“나도 몰라. 그냥 오라고만 하고 끊었어.”
“아, 빨리 숙소 들가서 씻고 싶은데.”
“저두요.”
하나씩 불이 켜지는 숙소를 뒤로 하고 태권도 국가대표 3인방은 칼바람을 맞으며 개선관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금요일이라 다들 훈련을 일찍 마쳤는지 9시가 채 안된 시간에도 선수촌 안은 고요했다. 계단을 올라 2층 복도를 쭉 걸었다. 펜싱 선수들이 주로 훈련하는 곳에 가까워지니 익숙한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우리 왔다-”
신발장에 신발을 넣고 안으로 들어가니 제일 먼저 지민의 얼굴이 보였다. 야, 박지민! 김탄소 왔어? 뭐가 그렇게 웃긴지 고개를 젖히고 웃던 지민이 탄소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동그랗게 모여 앉아있던 사람들에게로 다가간 탄소가 일어선 지민을 안고 방방 뛰었다. 그러나 빠른 걸음으로 다가온 정국에 의해 떨어져야 했다. 지민은 민망함에, 탄소는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쩝쩝.
“아, 맞다. 뉴스 봤는데 너네 화면발 잘 받더라.”
“그걸 이제야 알았어? 아시안게임 때는 뭐 봤대.”
농담조의 말을 주고 받다가 탄소는 옆자리가 빈 윤기의 옆에 앉았다. 벗은 패딩을 멀찍이 던져놓은 정국도 탄소의 옆에 앉았다. 바람이 새어 들어오는 창 틈에 손을 갖다댄 정국이 가운데에 쌓인 치킨 박스에 신나하는 탄소에게 말했다.
“누나, 창문 옆인데 안 추워요? 이 자리 바람 들어와.”
“아, 괜찮아. 여기 위에 히터 직방으로 와. 넌 안 추워?”
“난 괜찮아요.”
그 때, 탄소의 후드집업의 지퍼를 올려주는 정국에게로 난데없이 까만 띠가 하나 날아왔다. 뭐야, 이게. 띠를 집어든 정국은 날아온 방향을 향해 고개를 틀었다.
“커퀴들아, 난 안보이냐?”
“헐, 대박. 남준이 형!”
자기에게는 인사도 안하고 서로를 챙기기에 바쁜 커플에게 띠를 던진 건 파란 유도복을 입은 남준이었다. 모든 종목의 선수들이 강도 높은 훈련을 받고 있지만 유도는 유독 심했다. 조조훈련부터 야간에 진행되는 자율훈련까지, 단 1분도 허투루 하는 일이 없었다. 그래서 훈련이 일찍 끝나는 날에 가끔씩 모이기로 해도 유도부인 남준은 오지를 못하고 동료들과 훈련을 해야했다. 그랬는데, 오늘은 매트 위에 앉아있는 남준이라니.
“훈련 어떻게 한 거예요. 쨌어요?”
“내가 죽고싶어서 환장했겠냐. 오늘 훈련 일찍 끝났어.”
“웬일이래요.”
“그러게나 말이다. 나 예선전 때 잘해서 그랬나.”
“욕하고 싶은데 진짜 잘했어서 뭐라고 욕도 못하겠다.”
그러니까요. 야, 애들도 다 왔으니까 빨리 치킨 뜯자. 나 저녁도 안 먹었다고. 반짝거리게 닦은 칼을 걸고 온 윤기는 툴툴댔다. 지민의 옆에서 같이 컵에 콜라를 따르던 태형은 말했다.
“차예주 안 왔는데?”
“차예주만 예선전 남았잖아, 지금. 박 코치님도 그렇고 이번에 걔 완전 올려버리려고 하고 있다던데.”
“그래서 예주 이번에 3키로 더 뺐잖아요.”
“그 누나는 그 몸에 뺄 살이 더 있대?”
“내가 하고 싶은 말이 그거야. 키는 나랑 얼마 차이나지도 않는데 몸무게는 거의 10키로 차이 난다니까.”
“오, 김탄소 체밍아웃.”
“어차피 체급에서 다 아는데, 뭐.”
예주 간장치킨이면 환장하는 앤데, 아쉽네. 경기 끝나고 한 마리 사주면 되지. 오, 윤기 형이 사주는 거예요? 닭 한 마리 쯤이야. 그럼 저도 사주세요! 정국은 손을 번쩍 들었다. 윤기는 잡고 있던 닭날개로 정국을 때리는 시늉을 했다. 머리 위에 X자로 손을 든 정국은 윤기를 방어했다.
“너는 니 여친한테 사달라고 해, 새끼야.”
“누나한테 어떻게 얻어먹어요.”
“야, 나 너한테 치킨 사줄 능력은 돼.”
“아니 그게 아니라, 누나는 내가 얻어먹는게 아니라 사주고 싶어서 그래요.”
까악, 까악, 까악. 어디서 까마귀 우는 소리 안 들려요? 염장질을 눈 앞에서 당한 사람들은 정색을 했고, 잘난 애인을 둔 탄소만 히죽히죽거렸다.
“지민아.”
“네, 윤기 형.”
“너 지금 권총 없냐.”
“그건 왜요?”
“저 새끼들 쏴버렸음 해서.”
“아냐, 형. 내가 칼로 쟤네 찌르는게 빠를 것 같아.”
곧바로 일어서서 자신의 칼을 가지러 가려는 호석을 지민이 급하게 제지했다. 살인 현장의 목격자가 되고 싶지는 않아. 지민은 말할 수는 없어 속으로만 생각했다. 일곱 명이서 치킨 아홉 마리를 조진 뒤에 가위바위보로 정리할 사람을 고르는데 짜기라도 한 건지 단번에 자리가 붙어있던 윤기와 탄소가 걸렸다. 앗싸! 이긴 사람들은 환호성을 질렀고 진 두 사람은 작게 욕짓거리를 내뱉었다. 그래도 숙소는 다 같이 들어가자는 남준의 말을 따라 훈련장에 남은 나머지 사람들은 매트 위에 드러누웠다. 바닥 푹신해, 히터 빵빵해, 배도 불러. 지상낙원이 따로 없었다.
***
“정국이가 잘 해줘?”
치킨 박스를 반 씩 나눠들고 1층에 있는 분리수거장으로 가는데 조용히 걷기만 하던 윤기가 입을 뗐다.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트름을 다시 되돌려보내느라 듣지 못한 탄소는 다시 되물었다. 뭐라구요?
“전정국이 잘 해주냐고.”
“음….”
“잘 안 해주냐?”
“아, 아뇨.”
“근데 왜 망설여.”
“너무 잘해줘서 어떻게 표현해야 적절한 표현을 할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하느라고.”
“그럼 다행이네.”
“그런가?”
탄소는 멋쩍게 웃었다. 이거 받아. 분리수거장 앞에 도착한 윤기는 탄소에게 들고 있던 치킨 박스를 내밀었다. 내가 왜요. 노인 공경 몰라? 스물 다섯한테 무슨 노인 공경. 어쭈, 말대꾸하냐? 아니요. 빨리 들고 가서 버려. 뉘예뉘예. 꼽냐? 그럴리가요. 탄소는 손에 들린 박스를 먼저 종이가 쌓여있는 곳에 던져버리고 시멘트 바닥에 쪼그려 앉아있는 윤기의 옆에 놓인 박스들도 마저 버렸다. 끄읕-. 쓰레기를 모두 처리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분리수거장에서 벗어나려고 할 때, 멀뚱히 쳐다보기만 하던 윤기가 흰 봉지를 내밀었다. 콜라병도 있어. 아, 시팔…. 빨리 갔다와라. 춥다. 내가 저 노인네를 진짜 확. 봉지를 뒤집어 병을 버리고, 비닐 칸에 봉지마저 모두 버린 탄소는 앉아있는 윤기를 끌어당겼다. 가요, 노인네.
“광대에 멍든 건, 아까 경기에서 맞은 거?”
“네. 오빠 안 본 척하더니 다 봤나보네요.”
“…큼큼. 전국에 생중계를 해주는데 어떻게 안 보냐.”
“듣고 보니 그러네.”
“맞을 때 아팠지.”
“음… 조금?”
“구라치고 있네.”
허허, 사실 많이 아팠어요. 머리가 순간 띵했으니까. 경기 끝나고 어머님한테 전화드렸어? 아, 맞다. 엄마한테 문자와서 전화하려고 했는데 까먹었네. 경기 끝나면 바로바로 전화하라니까. 누구보다 너 경기 하나도 빠짐없이 다 보실 분인데. 알았어요. …오빠, 그런데 우리 엄마 오늘 놀랐을까요? 뭐. 맞은 거? 맞은 거였으면 많이 놀라셨겠지. 보던 나도 놀랐는데. 아까의 장면을 떠올렸는지 윤기는 인상을 구겼다. 그것도 그렇고, 5년을 기다려서 올림픽 나가는거잖아요. 놀라시기보다는, 기뻐하시지 않았을까. 가로등과 트랙의 조명만 켜진 고요한 선수촌에 두 남녀의 목소리가 나긋나긋하게 울렸다.
“오빠.”
“왜.”
“오빠 올림픽에서 금메달 땄을 때, 어땠어요.”
“…어땠더라.”
“……”
“아, 생각났다. 베이징에서는 별 생각 없었어. 솔직히 학교 한창 다닐 열 일곱 살이 칼 들고 세계 1등했을 때 뭔 생각했겠냐. 그냥 얼떨떨하고, 내가 꿈꾸고 있는건 아닌가 했지. 그래도 꿈이었으면 절대로 깨지 말았음 했어. 주위 사람들 좋아하는 모습 보니까 나 진짜 옳은 일 했구나, 생각 했지.”
“런던에서는요?”
“런던에서는… 뭔가 다르더라.”
4년 전을 회상하는지 윤기는 까만 밤 하늘을 올려다보며 잠시 말을 아꼈다. 마른 침을 목구멍으로 넘기고, 다시 입을 열었다. 다음 올림픽 준비하면서 선수권대회도 나가고, 크고 작은 대회들도 나갔는데 이거 자랑…은 아닌데 내가 금메달을 많이 땄잖냐. 그래서 매일 내 경기에 대한 기사를 보면 붙은 말이 다 이래. 뭐 대한민국 펜싱의 미래, 기대주, 유망주, 영웅 등등. 아직도 나한테는 과분한 수식어들이지. 관심 가져주고 응원해주는 거 생각하면 고맙고 평생 감사해야할 일인데, 솔직히 난 좀 부담스럽거든. 출전권을 땄어도 본선 때 잘해나갈지, 망할지는 모르는 일인데 그런 기대치들이 모여서 나에게 실망만 하는 건 아닐까 생각했어. 꼴에 전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였다고 견제하는 사람들도 많았고, 내 바로 앞에서 대놓고 나 까는 사람들도 많았어. 지들 말로 하면 못 알아 들을 줄 아나. 타국 언어 배우면서 제일 먼저 검색하는 게 욕인데. 오빤 안 힘들었어요? 나라면 마음 고생 꽤 했겠다. 했지, 어떻게 안 했겠어. 그런데 티는 안 냈어. 티를 내는 순간 내가 지금 힘들다는 걸 알려주는 거니까. 야, 맞다. 나 이거 그 누구한테도 얘기 안 한거야. 정호석한테도 얘기 안했어. 알았어요, 영광으로 여길게요. 그래, 옳은 자세야. 이어서 얘기하자면 속으로 힘들어 하다보니까 런던 준비하면서 처음으로 가위에 눌려봤어. 난 평생 가위 안 눌려볼 줄 알았는데 나도 그걸 다 눌리더라. 넌 눌려봤냐? 아직요. 어때요? 무서웠어, 그 때는. 난 귀신은 아니고 악몽을 꾼거긴 한데, 꿈에서 내가 완패를 했어. 상대선수한테. 판정을 기다리면서 마스크를 벗었는데 진짜… 그 기분은 어떻게 표현을 못하겠다. 관중석을 가득 채운 사람들은 나를 향해서 야유를 보내고, 코치님들은 날 보다가 결국에는 경기장을 나가셨어. 보기 싫으셨던거지, 내가. 윤기가 지금 꿈 얘기를 하고 있다는 걸 알지만 차분히 가라앉은 윤기의 모습에 탄소는 숙연해짐을 느꼈다.
“처음엔 남몰래 상처도 받고 하다가, 나중에는 그냥 신경 끄자고 생각했어. 저기에 휘둘려봤자 나한테는 남는 거 없고, 올림픽은 몇 일 밖에 안 남았다, 생각하면서. 그렇게 훈련하고, 여차저차해서 결승까지 올라간 다음에 이겼다는 판정 받고, 메달 수여식까지 진행했어, 잘. 위원장한테 그 손바닥만한 큰 금메달 받고 악수하고, 그 때 경기장 가득 채운 사람들을 보다가 애국가가 나오니까 태극기를 봤다? 난 그 때 애국가가 그렇게 슬플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어. 이상하게 클라이맥스로 갈수록 울컥하는거야. 눈가도 막 뜨거워지고, 눈 앞은 울렁거려서 태극기가 출렁거려. 막 파도에 떠밀리는 것처럼. 눈이 자제가 안 될 정도로 뜨거워지니까 너무 아파서 눈을 꽉 감았어. 그리고 몇 초 뒤에 떴는데 난 내가 초능력 부리는 줄 알았다. 그 진짜 크고 넓은 관객석에서 바로 우리 엄마랑 형을 봤어, 놀랍게도. 가족한테 런던 구경 와서, 경기도 보고 놀기도 하라고 말은 했었는데 엄마는 그냥 집에서 티비로 보겠다고 했으니까 같은 땅을 밟고 있을 줄이야 상상도 못했지. 형은 가만히 스크린에 비춰지는 나 보고 있고, 엄마는 나 보면서 울고 있는데 그 때 막 눈물이 터지는거야.”
탄소는 어렴풋한 3년 전의 기억을 회상했다. 병실에 놓인 텔레비전 화면에 꽉찬 윤기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흐르는 눈물을 처음에는 손가락으로 훔쳐내다가, 나중에는 손등으로 눈을 벅벅 문질렀다. 더 안 울려고, 난 괜찮다는 걸 보여주려고.
“전 세계에 생중계 되고 스포츠 기자들이 카메라를 다 들고 있는데 계속 울면 쪽팔리잖아. 그래서 금방 마음 추스르려고 했어. 위에 있는 태극기만 보는데 계속 울고 있는 엄마가 생각나. 그러면서 나 처음으로 펜싱 배웠을 때가 생각이 나는거야.”
윤기는 초등학생 때 처음으로 펜싱을 배웠다. 서울에 있는 체육대학교에서 진행된 영어캠프에서 스포츠 활동으로 펜싱을 선택했었다. 첫 시간에 앞에서 스텝 시범을 보이는 선생님을 따라하는데 이상하게 주위 애들은 자신과 다르게 그 간단한 스텝을 버벅거리며 어려워했다. 쉽기만 한데. 잘하면 잘할수록 따라오는 칭찬에 윤기는 뛸 듯이 기뻤다. 캠프를 시작한지 5일이 지났을 때 처음으로 잡아본 칼을 윤기는 원래 제 것이었던 것 마냥 능숙하게 다뤘다. 윤이 나는 칼에 흠집 하나라도 생길까, 칼을 조심스럽게 반납하는 윤기에게 키가 큰 남자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안녕, 꼬마야.”
“아, 안녕하세요.”
“혹시 이름이 뭔지 알 수 있을까?”
“민윤기요.”
“몇 살?”
“초등학교 2학년이니까, 아홉 살이요.”
“아홉 살이라… 늦지는 않았네. 그래, 윤기야. 펜싱 배우는 건 어떠니?”
“재미있어요. 의자에 앉아서 산수 문제 푸는 것보다 훨씬요.”
“그래?”
네. 그러면 윤기야. 이제 운동 시간 끝나고 다른 애들이 캠퍼스로 돌아갈 때 윤기는 펜싱 더 배워볼래? 네? 어… 그렇게 된다면 저는 정말 좋지만, 저희 엄마가 안 좋아하실 거예요. 영어 배우려고 캠프 온거라서…. 그렇구나. 그럼 윤기는 윤기네 어머니만 허락하신다면 괜찮은거지? 네, 물론이죠. 알았다. 그럼 이제 밖에 있는 선생님 따라서 캠퍼스로 돌아가도 괜찮아. 내일 보자. 안녕히 계세요- 남자에게 상체를 숙이고 폴더 인사를 한 윤기는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캠프 선생님의 손을 잡고 캠퍼스로 돌아갔다.
남자에게 기쁜 제의를 받았던 그 날 밤, 윤기는 식탁 맞은편에 앉은 형의 도움을 받으며 곱셈 문제를 풀다가 고개를 돌려 거실에서 통화를 하고 있는 엄마를 바라보았다. 둘리 시계의 짧은 손이 9를 가리켰을 때 전화가 왔는데, 지금은 10을 가리키고 있었다. 무슨 전화길래 장금이 누나 나오는 드라마도 안 보고 전화를 한담. 민윤기, 이거 틀렸어. 식탁을 덮은 유리판을 두 번 두드려 고개를 돌린 윤기의 이목을 집중시킨 윤기의 형은 빨간 눈 속에 내린 비를 색연필로 가리켰다. 8 곱하기 4. 아직 저학년인 윤기에게 8단은 고된 것이었다.
다음 날이 되고 점심을 먹은 후 선생님들에게 펜싱을 배우던 윤기는 예상치 못한 엄마의 등장에 깜짝 놀랐다. 언제 와있었던 건지 엄마는 어제 봤던 키 큰 남자와 함께 선생님께 찌르는 기술을 배우던 윤기를 지켜보고 있었다. 엄마! 발을 굴러 엄마에게 안긴 윤기는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엄마 여기는 웬일이야? 윤기 보고 싶어서 왔어? 오늘 회사 안 간거야? 갔다가 잠깐 나왔어. 윤기야, 엄마랑 잠깐 얘기 좀 할까? 응? 응, 그래.
“윤기는 펜싱이 재미있어?”
“응, 완전.”
“어, 그 엄마 옆에 있던 남자분 있잖아. 그 분이 어제 전화를 하셨는데,”
침을 삼키고 말을 하는 엄마의 말을 듣는 윤기의 표정은 사뭇 진지했다. 제 작은 손을 잡고 토닥이는 엄마의 박자는 규칙적이었다. 그 분이 우리나라 펜싱 국가대표 코치님이래. 근데 저번에 한 번 오셨다가 우리 윤기가 펜싱하는 걸 봤는데 너무 잘한다는 거야. 나이에 맞지 않게 너무 잘한다고. 그래서 어제 전화로 물어보셨어. 윤기 펜싱 쪽으로 키우실 생각은 없으시냐고. 엄마는 아들이 펜싱 하는 걸 한번도 본 적이 없으니까 오늘 와서 직접 보고 결정하겠다고 했는데, 펜싱 모르는 엄마가 봐도 진짜 잘하더라, 우리 윤기. 엄마···? 그래서, 엄마는 결정했어. 윤기야, 펜싱 배워도 돼. 배우자.
“그 때 생각난 뒤로는 계속 울었어. 그렇게 철 없이 칼 잡는거 좋아하던 어린 내가 벌써 이렇게 커서 국제 대회도 서고, 메달도 딴다고 생각하는데 기분이 묘하더라고.”
“그랬구나….”
“그랬지. 인터뷰하는데 안 그래도 작은 눈 팅팅 부어가지고 쪽팔리게.”
“…괜히 나 때문에 분위기 죽었다.”
“아냐. 다시 초심 찾고 좋았어. 요즘에 훈련하기 싫고 그랬거든.”
탄소의 기억으로 윤기는 딱히 좋은 첫인상을 남긴 인물은 아니었다. 거짓말은 죽어도 못하는 직선적인 성격과 툭툭 내뱉는 말 때문에 처음엔 뭐 저런 싸가지가 있나 싶었지만 알고보니 표현하는 것에 서툰 사람이었다. 호석이 아들 부자에 막내 딸 하나인 집에 둘째 오빠 느낌이라면, 윤기는 첫째 오빠 느낌이었다. 옆에 붙어 하나하나 챙겨주기 보다는 정말로 필요할 때 다가와 도움을 주는.
“어쨌든 그 멍 관리 잘해. 전정국이 걱정한다.”
다시 개선관으로 돌아와 뒷정리를 하고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과 함께 걸었다. 선두에 있는 태형과 지민을 비롯한 남자들은 남자 숙소로, 탄소는 여자 숙소로 들어가려고 헤어지려 할 때 정국이 탄소의 팔을 잡아당겼다.
“왜?”
“좀만 이따 들어가요, 우리.”
형, 저 조금만 이따가 들어갈게요. 먼저 씻으세요. 어야, 적당히 하고 들어와라. 룸메이트인 태형은 남준과 머쉬룸, 머쉬룸! 버섯 타령을 하며 숙소로 들어가고, 사람들이 모두 들어간 것을 확인한 정국은 탄소를 품으로 잡아당겼다. 탄소를 꽉 끌어안고 있으니 작은 몸이 꼼지락꼼지락 움직이는게 온전히 느껴졌다. 귀여워. 턱께에 닿는 머리에서는 치킨 냄새를 덮은 바람 냄새가 났다. 답답하다며 허리를 쿡쿡 찌르는 손가락에 작은 몸을 품에서 떼어내자 탄소는 언짢은 표정을 지었다. 핫팩에 따뜻해진 손으로 양 볼을 감싼 정국은 말했다.
“표정이 왜 그래요. 얼굴은 왜 이렇게 차갑고.”
무릎을 굽혀 한참을 올라가있었던 눈높이를 맞췄다. 꿈뻑꿈뻑. 슬로우모션처럼 느리게 움직이는 눈에는 졸음이 가득했다. 삐죽 내민 아랫입술을 집어넣은 탄소는 말했다.
“피곤해. 나에게 힘을 줘, 꾸기.”
“어떻게요?”
“어… 윙크?”
찡긋. 찡긋. 쌍커풀 진 큰 눈이 한 쪽씩 감겼다. 고동색 눈이 조명에 의해 반짝 빛났다. 우리 꾸기 눈은 별을 박은 것처럼 예쁘네. 에이, 뭐래. 이제 졸음이 좀 가셨어요?
“아니, 아직 멀었어. 뽀뽀.”
쪽. 복숭아 향을 담은 입술이 짧게 닿았다 떨어졌다. 우리 꾸기 입술은 복숭아 젤리 같네. 말랑말랑? 응, 말랑말랑.
“누나, 아직도 피곤하죠.”
“아까보다는 덜 하긴 해. 꾸기 파워 덜덜.”
“그런 말투는 도대체 어디서 배워오는 거예요?”
“김태형.”
“그럴 줄 알았어. 이제 그만 들어가봐요. 잘 자고, 좋은 꿈 꿔요.”
“응, 정국이 너도.”
두꺼운 옷가지를 사이에 두고 껴안은 몸이 움직였다. 뒤뚱뒤뚱, 오리를 연상케하는 움직임은 굼떴다.
“우리 정국이 볼 때마다 좋아져서 어떡하지.”
“좋아해요, 계속.”
“사실 좀 무서워. 이렇게 행복하기만 해도 되나 싶어서.”
“행복해도 돼요. 누나는 그럴 자격 있어.”
“고마워. 나 좋아해줘서.”
“고마워요. 좋아하게 해줘서.”
윽, 오글거린다. 그랬어요? 어. 우리 잘자라고 말만 하다가 밤 새겠다. 들어갈게. 나쁜 꿈 꾸지말고, 편하게 자. 알았지? 연인들이 헤어질 때 남겨지는 사람은 떠나는 사람의 뒷모습을 보고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을 느낀다는 어디선가 봤었던 기억을 곱씹으며 탄소는 뒤로 걸었다. 누나, 그러다가 넘어져서 크게 다쳐요. 나 완전 달팽이 걸음이잖아. 안 다쳐. 느릿느릿 걸었지만 두 건물이 옆에 붙어있는 탓에 금방 도착해버려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손을 흔들고 숙소 안으로 들어가는 탄소의 모습까지 본 정국은 그제야 몸을 돌렸다. 찬 바람에 몸은 꽁꽁 얼었지만 마음만은 따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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