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많이 늦었지? 변명거리를 대자면 이성열때문이야. 얘가 가출해서 우리집에 있거든. 사실 우리가 너네쪽으로 통신하고 이러는게 불법이라 몰래몰래 하거든? 게다가 얘가 컴퓨터를 죄다 점령해서 뭘 할 수가 없어 할수가. 가출한 얘기는 다음에 해줄게 앞으로도 얘때문에 좀 늦어질 것 같다.
남우현이랑 사귄것 까지 얘기했었지? 남우현은 내가 아무 말 안했는데도 알아서 줄리아랑 사귀는거 비밀로 하고 나한테도, 그러니까 우리한테도 얘기하지 않더라고. 그런데 김명수는
"야! 나 선녀열이랑 사귄다!"
저번에 김명수가 선녀열로 갈아탔다고 했었지? 근데 지가 걔랑 사귄다고 전교에 소문을 내면서 막 자랑을 하고 다니는거야. 같이 찍은 사진 보여주면서. 그때마다 이성열 표정은.. 애가 많이 불쌍했어.. 막 김명수가 우리한테 어제는 무슨영화를 봤는데 어쩌구 저쩌구 같이 커피를 마셨는데 어쩌구 저쩌구 몽땅 다 얘기하고 다니니까.. 그때마다 이성열은 눈 내리깔고 말 없이 초코우유나 빨고있고. 진짜 너무 불쌍했어. 김명수 개새끼 나가 죽어라.
어쨌든 나무현이랑 사귄지 대략 2주쯤? 됐을때의 일이야. 평소처럼 아이스크림가게에서 큰거 한통 사서 퍼먹고 있는데 밖에 비가 오기 시작했어. 당연히 당황했지 난 우산이 음스니까. 게다가 방금 아이스크림 산답시고 둘이 100원짜리까지 탈탈 털어서 돈도 없고. 내가 밖에 보면서 헐헐 거리니까 남우현이 흐뭇흐뭇한 표정으로 훗훗거리더니 쨘! 이러면서 메고있던 작은 가방에서 우산을 하나 꺼냈어. 그때 너무 감동적이었어 정말. 아마 그 가방엔 우산만 들어있었겠지?
"이열, 우산도 들고다니냐?"
"젖는거 싫어해서 맑은날도 들고다니거든."
얘가 젖는거 진짜 싫어해. 어느정도냐면 장마철이 아니어도 얘 학교갈 때 가방은 작은 우산 하나 + 바지 2벌 + 티 3장 + 수건 5장 + 드라이기 + 우비로 꽉꽉 들어차있고 아침부터 비오는 날이면 우비에다 겁나 크고 시커먼거, 알지? 완전 큰 우산 쓰고 등장해. 땀나는 것도 싫어해서 목욕세트도 들고다닌다. 바디워시, 샴푸, 린스, 뭐였지 폼클렌징? 이런것들. 샤워실 없어서 화장실에서 이거 다했었지. 그러다 불편했는지 1학년때 전교생 서명 받아다가 교장실까지 패기있게 가서 따진 결과 지금은 샤워실이 생겼다지. 근데 쓰는 사람은 얼마 없다는게 함정
아무튼 그래서 같이 우산을 쓰고 가고 있었어. 환절기라 그런지 좀 쌀쌀하더라고. 내가 슬쩍 팔 문지르고 있으니까 남우현이 걸치고 있던 얇은 잠바 벗어주더라고. 그래서 그냥 입었지. 가다가 갈림길이 나왔어. 잠바 다시 벗어주고 이제 가려고 하는데 얘가 딱 잡았어. 그러면서 이런 날에 비맞고 다니면 감기걸린다고 뭐라뭐라 하는거임
"그럼 넌 감기 안걸려?"
"바보는 감기도 안걸린대."
"그래도 그렇지. 난 날아서 빨리 가면 되니까 니가 쓰고가. 니꺼잖아."
"어허잇! 누나가 쓰고가. 난 괜찮으니까. 추우니까 그거 입고가. 다음에 만날때 줘! 안녕!"
이러고 우산 쥐어주면서 막 뛰어가는거야. 멍해졌어. 젖는거 진짜 싫어하는 남우현이 나한테 우산을 양보했다니까? 어쩌다 예전 장마철에 까먹고 가방 통채로 안가져온 날이 있었거든? 그때 비 그칠때까지 4시간동안 학교에서 있었다더라. 그날 6시에 끝났었는데 비 그칠 10시 넘어서까지 기다렸다가 갔다니까? 그런 남우현이 지가지고 장난치는 나한테 우산 넘겨주고 뛰어가는거 보고 있으니까 너무 미안한거야. 바보같이. 한참 멍하니 남우현 뒷태를 보고있다가 돌아서서 우리집에 가는데 비가 점점 더 세게 오는거야. 그러다 내가 집에 도착했을 땐 비가 막 하얗게 오는거 알지? 앞도 안보일만큼 많이 왔어. 거기에 무심코 주머니에 손을 넣었는데 남우현 집키가 잡히고. 그 바보같은 남우현이 집키도 빼먹고 그냥 뛰어간거야. 우리집은 거기서 20분거린데 걔네집은 40분 거리거든? 걔가 40분동안 비맞고 홀딱 젖어서 집에 갔는데 집키가 없어서 그 앞에 주저앉아서 몇시간 후에 집에 올 형 기다리는게 막 영화보듯 선명하게 상상이 되는거야.
해맑게 웃으면서 뛰어가는 남우현 얼굴이 다시 생각나면서 내가 너무 나빴단 생각이 들었어. 얘가 진짜 진심인 것 같아서. 사람가지고 장난치는거 할짓이 아니잖아 정말. 다시 찬찬히 생각해보니까 진짜 내가 너무 못된거야. 드라마같은거 보면서 욕했던 나쁜년, 나쁜새끼가 바로 나인거야. 내가 왜 이런짓을 했는지 너무 후회되고 막 그랬어. 밖에 빗소리 들으면서 그런 생각 하니까 너무 우중충하고 슬픈거 있지. 노래도 잔잔하게 울리고. 눈물도 찔끔찔끔 나오면서 엉엉 울었어. 그리고나서 핸드폰으로 남우현한테 연락을 했어. 이땐 물론 내가 나야. 뭐하냐고 보냈는데 10분이 지나서 답장이 왔어.
『뭐해』
『형기다려』
『형은 왜』
『키잃어버렸어』
『지금 밖에 있냐?』
『ㅇㅇ』
『비맞았어?』
『조금』
『병신같이』
『김명수 집에 가있어』
『나 걱정함?』
『내가니걱정을왜해』
『바보는감기도안걸린대』
『내일학교안오기만해봐ㅡㅡ』
그리고 그 다음날 남우현은 학교에 안왔어. 독감이래. 진짜 가슴이 철렁했어. 다 나때문이잖아. 설레하는 남우현 보면서 속으로 킬킬대는 나때문이잖아. 진짜 바보같아 남우현. 아아아아아 짜증나 진짜로. 남우현도 짜증나고 이성종도 짜증나고 김명수도 짜증나고 이성열도 짜증나고 우리누나도 짜증나고 스피커에서 쿵쿵대는 넬느는 안짜증나지만 어쨌든 다 짜증나 진짜. 꽁냥꽁냥을 기대했다면 미안하다.. 근데 생각나는게 별로 없어.. 그냥 만나서 뭐 먹으면서 개드립치고 웃고. 끝이야! 끝하니까 생각났는데 '닥치고 잠들어라' 도 끝났어! 아 진짜 이제 무슨 낙으로 사나.. 슬프다 진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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