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1월 그의 이야기
"야! 나 완전 맘에 들었어! 나랑 개그취향 완전 겁똑. 겁나 똑같아! 잘통함! 알지? 내 이상형 개그취향 잘 통하는 여자인거! 내 이상형을 찾은 거 같다!"
'쫑알쫑알. 시끄러워 죽겠네.'
성재는 창섭의 주위를 맴돌며 끝없는 말을 뱉어냈다.
성재의 목소리가 귀에 쌓일 수록, 창섭의 마음 한 구석은 무거워져만 갔다.
"그만해 임마. 알겠으니까, 그만하라고."
"뭘 알겠는데. 너가 내 기쁜 마음을 알아? 이 엉아가, 어? 백년만에 이상형을 만난 기분을 니가 아냐고! 인마!"
"니가 백년 살아봤냐. 백년은 무슨.."
능글맞게 창섭의 어깨에 손을 올리는 성재의 웃음 속에 행복한 표정이 가득해 보였다.
'너는 아냐?
내가 얼마나 용기 냈는지. 얼마나 오래 지켜봤는지.
하필 내가 용기 낸 그 날이 내 가장 친한 친구와 소개팅한 날이 되는 기분을 니가 아냐고.'
창섭은 말하고 싶었지만 성재의 얼굴을 슬쩍보고 한숨을 푹 쉬는 것으로 대신했다.
"한숨은 짜식. 야! 수업 끝나고 연락해. 점심 형아가 사준다!"
성재는 창섭에게 손을 크게 흔들고 신나는 발걸음과 함께 학과 건물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멀어지는 성재를 잠깐 바라 보다가 창섭도 자신의 강의실로 무거운 발을 옮겼다.
"저기."
그때 얇은 미성의 목소리와 함께 누군가 창섭의 팔 옷깃을 잡아끌었다.
목소리는 창섭의 귀를 타고 들어가, 창섭의 심장을 간지럽게 했다.
"연애의 목적 수업 들으러 가죠? 같이가요."
창섭은 목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렸다.
'설이다!'
창섭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아, 그리고 혹시 이 수업 과제같이 할 사람 있어요?"
"아뇨, 아직.."
"그럼 저랑해요!"
2013년 11월 그녀의 이야기
"너는 첫 눈에 누구를 좋아할 수 있다는 걸 믿어?"
설이의 질문은 수화기를 통해 일순이에게 전달됐다.
일순은 설이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픽- 웃었다.
"너 되게 순수한아이구나?"
일순의 대답에 부끄러워진 설이는 괜히 화를 냈다.
"무슨! 아니야! 나 되게 야해!"
"뭐라는거야~"
킥킥, 웃는 일순의 목소리를 듣자 설이는 얼굴이 화끈거렸다.
빨간 얼굴을 식히려 고개를 돌린 시선끝에는 창섭이 있었다.
핸드폰에서는 일순의 목소리가 계속 들리는데도 설이는 오직 창섭에게만 집중했다.
"일순아, 내가 나중에 전화할게."
급하게 전화를 끊고 혹시나 그를 놓칠까, 창섭 하나에게만 시선을 둔 채 빠르게 걸었다.
창섭에게 가는 그 짧은 찰나에 설이는 창섭에게 건네야 할 말을 수없이도 곱씹었다.
'안녕? 이라 해야하나.
너무 건방져보일까?
안녕하세요, 라고 할까.
그 다음엔 무슨 말을 하지?
과제 같이하자고 할까?
갑자기? 뜬금없이 과제부터해?'
가끔 사람은 생각이 너무 많아지면 마음에 없던 행동을 하게 된다.
뇌에서는 이미 몸에게 신호를 보내고, 아직 정리되지 않은 말은 입에서 걸러질 틈도 없이 내뱉어진다.
설이도 그랬다.
상황파악이 되기 전에 설이의 손가락은 창섭의 팔을 잡았고, 설이의 입에서는..
" 저기,연애의 목적 수업 들으러 가죠? 같이가요."
설이의 말이 여기서 끝났다면, 어쩌면 이 둘의 이야기도 여기서 끝났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설이는 창섭에게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그럼 그 과제 저랑해요!"
2014년 4월 1일
창섭이 고개를 푹 숙이고 한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감싸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는 슬픔이 가득한 얼굴을 한 설이가 있었다.
"거짓말이면 가만 안둬.."
"미안해."
"사람이 어떻게 이러니.. 그래도, 그래도 나는.. 내가 진짜 너한테 아무 것도 아니였구나."
"아니야. 그게 아니야."
설이의 눈에 눈물이 가득 맺혔다.
얼마 가지 않아 설이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흐느꼈다.
설이를 안으려던 창섭은 멈칫하고 그저 슬픈 눈으로 설이를 바라만볼 뿐이였다.
"해줄 말이 있어.."
대답대신 설이는 터지는 눈물을 참지 않고 흘려보냈다.
창섭은 그런 설이를 향해 슬픈 목소리였지만 높지도, 그리 낮지도 않게 설이가 알아 들을 수 있는 소리로 천천히 말했다.
"2016년 첫 눈 오는 날에 여기서 다시 만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