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oye Sivan - Gasoline
34
그녀의 햇살
조용하게 울려 퍼지는 작은 소음
창가에 앉아 손톱을 깎는 당신의 모습이 왜 그렇게도 아름다워 보였는지
왜 그렇게도 눈물 나게 아름다워 보였는지
왜 그렇게 사랑받고 싶어 안달을 했는지
"너만 있으면 돼"
하고 그녀는 말하곤 했다
"네가 있어야 해"
그 애정 가득한 낱말들이 문득 소름 돋게 만 들리는 건
그녀의 떨리는 목소리 때문 만은 아니었다.
내 작은 어깨를 꽉 쥐는 가는 그녀의 손가락
그의 발소리에 허겁지겁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던 그 몸짓
눈에 띄고 싶어 안달하던 그녀의 걸음걸이와
어울리지도 않게 고상한 취미까지
"네가 있어야 해"
하고 그녀는 말하곤 했다
"네가 있어야 내가 사랑받아"
나는 사랑받았던 걸까
아니면 그저 하나의 소품에 불과하지 않았던 걸까
그녀에게 나는 무엇이었을까
억지로 지속하는 고상한 취미
그 도자기처럼 보여주기 위한 장식품
아버지의 죽음
그녀의 외면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존재
그녀의 가면
귀에 거슬리는 작은 소음
창가에 앉아 손톱을 깎는 당신의 모습이 왜 그렇게도 위선적으로 보였는지
왜 그렇게도 끔찍하게 원망스럽게만 보였는지
왜 아직까지도 내 숨통을 조르는지
"당연한 거 아니야?"
하고 그녀는 웃으며 말했다.
"넌 사랑받지 못해"
그 저주 같은 낱말들이 문득 소름 돋게만 들리는 건
내가 그녀의 아들이기 때문 만은 아니었다.
"그녀가 너를 진심으로 사랑한다고 생각해?"
하고 그녀는 내게 물었다
"....너를?"
*
헉- 헉-
문득 거친 숨소리가 푸른 새벽을 타고 넘어왔다.
괜한 악몽을 꾼 걸 수도 있었다.
하지만 변하지 않는 그녀의 말들은 여전히 그의 기억 속에서 어린 그의 목을 메게 하고 있었다.
솔직했던 윤설을 매번 고민하고 그녀의 사랑에 초조해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이제는 이미 흐릿해진 어머니의 저주 때문이라는 것을 원식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윤설은 만약이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는 여자라는 것을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작은 결핍은 매번 꿈속에 찾아와 그를 괴롭히곤 했으니까.
자기 자신이 더럽다는 사실을 제쳐두고 나서도 그는 괴로웠다.
그저 애써 아닌 척하는 수밖에 없었다.
강한 척하며 매번 나쁘게 그녀를 안으면 되는 거였다.
그럼 그녀의 상처는 벌어질 테고, 결국 그녀는 자신의 상처를 핥느라
그의 상처를 보지 못할 거라고 그는 생각했다.
이상한 아이러니였다.
그녀에게 사랑받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상처를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여기저기 베인 상처들에 동정의 눈길을 받느니 차라리 처음부터 이기적인 나쁜 놈인 게 나았다.
침대에 엎드린 채로 누워 숨을 몰아쉬던 원식은 눈을 꾹- 감았다가 이내 고개를 돌려 제 곁에 누워있는 윤설을 바라봤다.
자신을 등지고 누운 그녀의 가느다란 실루엣을 바라보다 원식은 이불에 얼굴을 파묻으며 짙은 숨을 내뱉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가슴팍에 닿은 이불의 감촉이 문득 차가워서 그는 작은 신음을 흘렸다.
새근새근 듣기 좋은 숨소리를 내며 잠이 든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던 원식은 천천히 소리를 죽이며 침대 밖으로 빠져나왔다.
이른 새벽이라 불러야 하는 건지 잘 모르겠는 그런 시간이었다. 탁상 위 시곗바늘은 새벽 네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푸른 기운이 블라인드를 타고 넘어들어와 침실을 가득 메웠다.
원식은 이내 창가로 걸어갔고 고개를 돌려 다시 윤설을 바라봤다.
물속에 잠겨있는 것만 같았다.
세이렌인지 인어인지 모를 그녀와 함께.
'당연한 거 아니야? 넌 사랑받지 못해'
꿈속의 목소리가 다시금 그의 귓가에 찾아왔다.
참 진절머리나 게 끔찍한 일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하고 싶지 않아도 습관처럼 하게 돼버리는 그 일.
그 저주를 되새기는 일.
모든 우울한 순간들이 그렇듯 어머니의 그런 말들도 가장 나약한 순간에 그를 찔러대곤 했다.
그러니까, 윤설이 깨어있지 않은 깊은 새벽에 그를 찾아와서 독한 담뱃대를 매번 입술 사이에 끼워 넣게 만들었다.
원식은 이내 발소리를 죽이고 방을 빠져나왔다.
계단을 올라가는 그의 뒤를 따라 검은 그림자가 발꿈치에 닿았다.
원식은 서재에 들어가서는 이내 커다란 커튼을 걷어버리고 창문을 열었다.
새벽의 공기가 차갑게 폐에 들어앉았다가 이내 날숨이 되어 공기 중으로 사라졌다.
그는 제 검은 머리칼을 한 번 쓱 쓸어넘기더니 서랍에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매캐한 연기가 입술 사이로 새어 나왔다가 이내 무언가를 찾는 듯 창문을 타고 나가버렸다.
숨을 쉬듯 들이마시고 이내 뱉어내다 보니 어느새 짤막해진 그 담뱃대는 그의 손가락에 닿을 둥 말 둥 위태로운 줄타기를 하고 있었다.
원식은 이내 그걸 재떨이에 구겨버리고는 마지막 연기를 뱉어냈다.
알싸한 담배 향이 멀리 사라져 버리기를 그는 바라고 있었다.
윤설이 알기라도 한다면 또 잔소리를 할 것이 뻔했다.
"다 피웠어?"
그녀에 관한 생각을 하기가 무섭게 들려오는 그 목소리에 원식은 놀라 얼른 몸을 돌렸다.
언제 들어왔는지 모를 윤설은 서제 끝에 가만히 서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원식은 괜히 눈앞에 재떨이를 슬쩍- 밀어버렸다.
헛기침이 나왔다.
"언제부터 거기 있었어"
하고 원식이 물었다.
"당신이 불 붙일 때부터"
윤설이 대답했다.
"소리 좀 내고 다녀"
괜히 불퉁하게 미간을 찌푸리며 원식은 중얼거렸다.
윤설은 그저 어깨를 으쓱- 하며 그에게 다가올 뿐이었다.
"오지 마, 담배 냄새나"
원식이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며 말했다.
"그걸 아는 사람이 그렇게 담배를 태워?"
윤설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그러고는 들고 온 윗옷을 그에게 건넸다.
"새벽은 추워"
원식은 건네받은 옷을 바라보다 이내 입을 생각은 않고 책상에 그걸 올려놓았다.
윤설은 재떨이 둘레를 만지작거리고 있었고, 아직 꺼지지 않은 불씨는 희미한 잔해를 뿜어대고 있었다.
문득 그가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잡고는 그녀의 목에 입을 맞췄다.
아주 느릿느릿한 그 뜨거움이 처음처럼 퍼져나가고 있었다.
천천히 고개를 들고 자신을 내려다보는 원식을 윤설은 가만히 바라봤다.
"언제 일어났어?"
원식이 물었다.
"당신이 일어났을 때"
그녀가 대답했다.
"조용히 나왔는데"
그의 중얼거림에 윤설이 가볍게 웃었다.
"나 귀 엄청 좋아요"
윤설은 이내 손을 들어 제 두 눈을 가리며 이야기했다.
나긋나긋하고 따뜻한 그 목소리로.
"당신이 매일 새벽 뱉어내는 숨소리도 나는 다 들을 수 있어"
원식은 그런 그녀의 손목을 천천히 잡아내렸다.
문득 입을 맞추고 싶어지는 것은 정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깨울 생각은 없었어"
그가 말했다.
"알아, 괜찮아"
그녀가 웃으며 책상에 걸터앉았다.
원식은 그런 윤설을 바라보다가 이내 양손으로 책상을 짚었다.
제 안에 갇힌 그녀를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그는 이내 그녀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아주 자연스러운 손길로 그녀는 그런 그를 쓰다듬었다.
그의 머리카락이 그녀의 손 틈 사이로 흩어지고 부서지기를 반복했다.
새벽의 푸른 기운이 발끝부터 차오르고 있었다.
그의 머리카락의 밤의 바다 같았다.
"당신도 꿈을 꾸는구나"
쇄골에 내려앉는 그의 숨결을 느끼며 그녀는 말했다.
"악몽을 꾸는구나"
"......"
"....뭐가 그렇게 무서워?"
윤설이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는 대답이 없었다.
"뭐가 무서워서 자꾸 잠에서 깨는 거야?"
이윽고 그녀의 입술이 그의 귀에 닿았다.
부드럽고 따뜻한 그 촉감에 허리 끝부터 오싹해지는 것만 같았다.
원식은 이내 뜨거운 숨을 내뱉으며 티셔츠 아래 그녀의 허리를 쓸어내렸고, 대답을 회피하려는 듯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시작점에서 출발해서 끝을 향해 달려가듯, 입술에서부터 이어진 그의 입맞춤은
어느새 뜨거운 소리를 내며 그녀의 목을 타고 쇄골에 얹혔다가 이내 붉은 키스마크들을 잔잔히 새겨내고 있었다.
한참의 지분거림 끝으로 그는 그녀의 옷을 이파리처럼 가볍게 던져버렸고, 어느새 드러난 그 맨살에 다시금 자신을 묻고 있었다.
윤설은 작은 신음을 삼키며 왠지 모르게 필사적인 그의 몸짓을 지켜봤다.
부드럽게 가슴을 움켜쥐는 차가운 그의 손과 어느새 올라와 자신의 아랫입술을 깨무는 그의 날카로움.
뱉어낼 때마다 너무 뜨거워 데어버릴 것만 같은 그의 숨결을 그녀는 애써 견디고 견디다가
결국에는 못 참겠다는 듯 그의 얼굴을 두 손으로 꼭 감싸고는 가쁘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 부름에 원식은 천천히 그녀와 시선을 맞추며 속삭였다.
윤설의 가슴이 눈에 띄게 오르내렸다.
"....왜"
낮은 그의 목소리가 숨소리를 타고 울렸다.
"기분이 이상해"
하고 그녀가 말했다.
원식은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는 윤설의 눈동자를 응시했다.
참 경이로운 일이었다. 보이지 않았을 때에도 아름답기만 하던 그 보석은 여전히 퇴색됨 없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흥분된단 소리야?"
그가 입꼬리를 올리며 느긋하게 물었다.
그러고는 제 얼굴을 감싸쥔 그녀의 손가락을 살짝 깨물었다.
윤설은 콧등을 찡그렸다.
"아니, 아니야-"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윤설이 말했다.
"불안하단 소리야"
원식은 그녀의 눈을 다시 한 번 바라봤다.
농담이라 하기에 너무 견고한 그 눈동자에 괜히 숨이 막혔다.
다시금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에게 상처를 내는 말들을.
"쓸데없는 소리"
윤설의 손목을 잡으며 문득 차갑게 그는 말했다.
"하던 거나 마자 하자"
그의 그런 억지에 윤설은 미간을 구기며 아무렇지도 않은 척 다시 입을 맞추려는 그를 바라봤다.
나방의 날갯짓 같은 말들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매번 끊겠다고 말하면서도 그가 새벽마다 거친 숨을 내뱉으며 일어나 떨리는 손으로 담배를 피운다는 사실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그가 숨을 몰아쉬며 잠에서 깬다는 것도, 그러고는 한참 동안 불안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본다는 것도,
그리고 이내 소리를 죽이며 밖으로 향한다는 것도, 그녀는 모두 다 알고 있었다.
어느날 제멋대로 돌아와버린 그는 그녀가 원망할 틈도 없이 매일을 악몽에 시달리고 있었다.
어쩌면 그 악몽이 자신에 의해서 더 심해진 걸 수도 있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자신이 사랑한다 말한 그날부터 더 심해진 걸 수도 있다고.
"기억 나요?"
그의 입술을 밀어내며 그녀가 물었다.
"...뭐가"
원식은 미간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내가 꿈속에서 헤매던 밤"
그녀가 속삭였다.
"너무 오래됐어"
그가 말했다.
"그래도 분명 기억날 거야"
그녀가 확신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당신에게 도와달라 말했으니까"
"...."
원식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래, 기억하고 있었다.
숨 하나 제대로 못 내쉬던 그녀를 처음 품에 안았던 날.
매달리던 그녀의 떨리는 손끝과 문득 주저앉은 복도 바닥에서 느껴지던 그 냉기까지도.
잊을려야 잊을 수 없는 순간들이었다.
영원한 카르마의 시작점이었다.
"내 악몽에는 저승사자가 나왔어"
윤설이 말했다.
"붉은 인주를 손에 잔뜩 묻힌 저승사자가"
원식은 가만히 그녀의 목소리를 들었다.
"기괴한 웃음소리를 내기도 하고 내 눈에 입을 맞춰 보고 싶지 않은 것들을 보게 하기도 했어요"
가만히 멈춰 선 그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그녀는 눈을 감았다.
"파랗게 새어버린 아버지의 얼굴에 장난을 치기도 하고, 억지고 그의 얼굴을 쳐다보게 만들었어"
"...."
"끔찍한 악몽이지?"
어느새 눈을 뜬 윤설이 원식을 보며 물었다.
원식은 제 아랫입술을 잘근거렸다.
그러고는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정적 틈새로 시침이 파고들기 시작했다.
원식은 새벽이 개이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문득 그녀의 눈가에 물기가 차올랐다.
"당신이 구했어"
불현듯 그녀가 말했다.
"결국 당신이 나를 구해준 거야"
"......"
"방법이 꽤나 지독하기는 했지만"
그녀가 슬쩍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원식은 고통받던 제 입술을 놓아주며 낮은 한숨을 뱉었다.
그러고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그녀를 끌어안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말하지 않아도 다 알고 있는 이 여자는 정말 이상한 사람이었다.
마주 닿은 살결에서 서로의 온기가 나눠졌다.
윤설은 조금 아프다는 듯 신음을 흘렸지만 원식은 아랑곳 않고 그런 그녀를 더 세가 안을 뿐이었다.
사랑받고 싶어 안달하는 어린아이 같다고 윤설은 생각했다.
"이젠 내가 구해줄게"
하고 그녀가 말했다.
"당신의 꿈속에서"
원식의 낮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어떻게 구해줄 건데"
그녀를 감싸던 팔을 푼 원식이 어느새 그녀의 얼굴을 움켜쥐며 물었다.
윤설은 그의 물음에 입꼬리를 올렸다.
"글쎄- 뭐부터 하는 게 좋을까?"
"사랑부터 해야하지 않겠어?"
그가 고개를 기울이며 말했다.
"그건 이미 하고 있어"
그녀가 가볍게 웃었다.
"아주 오래 전부터, 끊임 없이"
원식은 이내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드디어 고개를 내미는 아침의 햇살과는 어울리지 않게도 끈적거리는 움직임이었다.
그의 손이 천천히 그녀의 허벅지를 쓸어올렸다.
벌어진 그녀의 입술 사이로 뜨거운 혀가 침투했다.
가느다란 실이 이어지고 끊어지기를 반복하고, 얕은 신음이 비밀처럼 새어 나왔다.
그녀는 그의 가슴에 입을 맞췄고 그의 손은 그녀의 은밀한 곳을 어루만졌다.
빛이 그의 등을 적시고 있었다.
"조금 더 세게 해도 괜찮아"
하고 그녀가 말했다.
"당신은 가끔 너무 다정해"
원식은 야릇한 그녀의 눈동자를 바라봤다.
그러고는 이내 못 참겠다는 듯 눈을 꾹 감았다.
"언제부터 이렇게 섹시했어"
하고 그가 힘겹게도 물었다.
윤설은 웃었다.
"당신 때문이야"
"...핑계는"
윤설은 이내 눈을 꼭 감고 그의 목에 팔을 둘렀다.
매혹스러운 그의 향기가 다시금 코끝에 맴돌았다.
그의 심장소리가 너무 잘 들려서 죽을 것만 같았다.
당신의 심장은 나를 향해 뛰고 있었다.
언제나.
"당신 심장소리만큼 당신이 솔직했으면 좋겠다"
"....."
"그래야 내가 당신의 꿈이 될 텐데"
문득 아쉬운 목소리였다.
그는 언제나 그랬듯 대답이 없었다.
창을 타고 넘어온 햇살이 그녀의 눈동자에 가득 맺혔다.
불현듯 원식은 그녀를 더 세게 안았고 윤설은 작은 신음을 흘렸다.
이미 깨져버린 모래시계가 한 번 더 뒤집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책장 사이사이에 숨어있던 모래알들이 한 곳으로 모이고 있었다.
"솔직해 질게"
하고 말하는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윤설은 조금 놀라 감았던 눈을 뜨고는 빛을 뚫고 그를 바라보려 애를 썼다.
점점 더 선명해지는 그 시야에 정확히 그의 모습이 그려졌다.
그는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너는 내 꿈이 되어줘"
문득 눈물이 차올랐기에 윤설은 입술을 꾹 깨물고는 그를 바라봤다.
그리고는 이내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랑해"
하고 그가 말했다.
마지막 연주가 귓가에 스며들었다.
영원히 지속될 업보, 그 마지막 악장의 이름.
서로의 눈으로 이야기하던 비밀스러운 엇갈림들.
오해와 결핍이 만들어낸 지독한 산물이 당신의 사랑이라는 것을.
어디선가 블라인드가 올라가는 소리가 들렸다.
햇살이 쏟아지는 아침이 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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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구절 어때요?"
책을 읽던 윤설이 문득 원식에게 물었다.
"뭔데, 읽어줘봐"
그가 그녀에게 말했다.
그녀는 천천히 입술을 벌렸다.
바르게도 새어 나오는 그녀의 목소리를 원식은 듣고 있었다.
거실 소파에 앉은 윤설은 꼭 빛에 젖은 것처럼 그 안에 담겨있었고,
그는 조금 그늘진 곳에 앉아 그런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무릎을 끌어안은 채 책을 읽는 그녀의 모습을, 그 나긋한 목소리를 원식은 가만히 지켜봤다.
꿈에서 본 그 장면.
"내내 당신 생각났어"
그녀가 책을 읽기 시작했다.
"보고 싶단 생각만 했어요. 뛰쳐나와서 당신을 보러 가고 싶었는데...
정신 차려라, 꾹 참고 있었는데... 갑자기 당신이 문 앞에 서 있었어요.
그럴 땐, 미치겠어. 꼭 사랑이 전부 같잖아"
이윽고 그녀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이해가 돼요?"
원식은 한참을 무표정하게 그녀를 바라봤다.
윤설은 아무 말 없이 쳐다만 보는 원식이 불만스러웠는지 입술을 삐죽거렸다.
이내 그가 못 참겠다는 듯이 그녀를 보며 웃었다.
"이해돼"
하고 그가 말했다.
"널 생각할 때마다 내가 그랬거든"
윤설은 그의 한 마디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깜빡거리다가
이내 부끄럽다는 듯 웃으며 얼굴을 무릎에 묻었다.
유연하게 휘어지는 그 눈꼬리가 아름다웠다.
그러니까....
꿈속에서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흐드러지게 아름다웠다.
마치 오월의 정원처럼.
블라인드 完
보고 싶단 생각만 했어요. 뛰쳐나와서 당신을 보러 가고 싶었는데...
정신 차려라, 꾹 참고 있었는데... 갑자기 당신이 문 앞에 서 있었어요.
그럴 땐, 미치겠어. 꼭 사랑이 전부 같잖아
<이도우 / 사서함 110호의 우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