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내 머릿속에 자리하고 있는 첫 기억 속 나는 병원 침대에 누워있었다. 집보다 익숙한 곳이 병원이었고 소독약 냄새를 맡으면 안정을 되찾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내 손등에 주사를 놓으러 들어오는 간호사들의 측은한 표정이 아무렇지 않았다. 누구나 다 이렇게 사는 줄 알았다. 엄마도 아빠도 링거줄을 매달고 있는 나를 보며 눈시울을 붉혔지만 내 또래의 아이들은 전부 그렇게 사는 줄 알았으니 나는 아무렇지 않았다. 정말로.
2.
다섯살 무렵 나는 6인실 병실을 쓰고 있었다. 소아병동이어서 그런지 넓은 6인실은 고만고만한 아이들과 그 아이들의 보호자들로 늘 북적였다. 당시 내 세상은 그 병실로 이루어져 있었기 때문에 여섯명의 아이들과 금방 친해졌다. 병실 밖을 벗어날 수 없는 남자애들 여섯이서 할 수 있는 이야기라고는 고작해야 작은 텔레비전에서 방영하던 파워레인저 따위밖에 없었지만 우리는 그저 즐거웠다.
레드가 더 세냐 블루가 더 세냐를 놓고 설전을 벌였던 날이 있었다. 나는 레드 편을 들었고 또 다른 아이 하나는 블루 편을 들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별 거 아니였는데 우리는 딱 그 또래 남자아이들처럼 정말 죽어라 싸워댔었다. 서로 아픈 처지라는 걸 어렴풋이 알고 있을 때라 주먹다짐은 하지 못했고 얼굴이 새빨개질 때까지 언성을 높이다 결국 엄마가 우릴 뜯어말려 겨우 상황이 종료 됐었다. 레드가 얼마나 강한데. 악당들 물리치는 것도 다 레드가 하는데. 채 삭히지 못한 분을 토해내다 나도 모르게 까무룩 잠이 들었다. 한참동안 열을 냈으니 피곤할 만도 했다. 한동안 단 꿈을 꾸고 있는 나를 깨운 건 한밤중에 어울리지 않는 다급한 발소리와 사이에 간간히 섞여드는 울음소리였다. 엄마, 뭐야? 졸린 눈을 부비며 엄마를 찾았지만 항상 곁에 있던 엄마는 어디에도 없었다. 칸칸이 쳐져있는 커튼이 그 날따라 꼭꼭 닫혀있었다.
"엄마…?"
웅성이는 소리에 덜컥 겁이 나 자리에서 내려와 맨발로 커튼을 걷었다. 엄마는 커튼 바로 앞에서 내게 등을 보이며 서 있었다. 엄마. 엄마의 티셔츠 끝자락을 잡아당기자 엄마는 나를 내려다보지 않은 채 내 손을 꼭 잡아쥐었다. 왜 안 자고 일어났어. 엄마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나를 바라봐주지 않는 엄마를 잠시 올려보다 엄마의 시선이 향한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침저녁으로 내게 사탕을 건네주는 선생님이 다급한 몸짓으로 간호사 누나들과 함께 움직이고 있었다. 처음 보는 긴박한 장면에 오던 잠도 싹 달아나 멍하니 그 것을 지켜보았다. 내 손을 붙잡은 엄마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오전 4시 43분 김은규 환자,"
"……."
"…사망하셨습니다."
울부짖는 소리가 났다. 그와 동시에 흰 천이 침대 위로 덮였다. 은규는 낮에 나와 레드가 더 세냐 블루가 더 세냐로 언성을 높여가며 싸웠던 그 친구였다. 엄마가 나를 안아들었다. 엄마에게서도 비슷한 소리가 났다. 흐느끼는 소리.
내가 태어나 목도한 첫 죽음이었다.
3.
첫 외출을 허락받은 날이었다. 엄마의 손을 꼭 붙잡고 병원 밖으로 첫 발을 내딛는 순간, 나는 앨리스가 되어버린 기분이었다. 며칠 전 엄마가 읽어주었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창문을 투영하지 않고 그대로 쏟아져 내리는 햇살과 고작해야 내 머리칼만 헤집어놓는 선풍기 바람이 아닌 나뭇잎 사이를 가로지를 수 있는 바람이 생소하다 못해 두렵기까지 했다. 끝이 보이지 않는 토끼굴로 굴러 떨어지다 어딘지 모를 바닥에 발이 닿은 앨리스가 이런 기분이었을까. 주춤대며 두 번째 발걸음을 차마 내딛지 못하는 나를 엄마는 안아올렸다. 아래에서 보던 시야와는 또 달랐다. 눈이 시릴 정도로 청명했던 하늘, 흐드러지게 피어난 벚꽃, 나와 같은 옷을 입은 아이들의 웃음소리 같은 것들은 아직까지 내뇌리에 선연하게 남아있었다.
껍질이 쩍쩍 갈라진 나무 껍질이 신기했고 하늘하늘 부는 바람에 흔들리는 꽃이 새로웠다. 하다 못해 인도 바닥에 여러 색으로 깔린 보도블럭마저 생경했다. 넓게 깔린 보도블럭의 붉은 색만 골라 밟으며 비틀비틀 걸음을 옮기고 있을 때 저 옆에서 보도블럭과 운동화가 급히 마찰하는 소리가 들렸다. 점점 가까워지길래 고개를 들고 뒤로 두어걸음 물러서자 그 앞을 네가 스쳐 지나갔다. 너는 한참을 달리더니 잔디밭 앞에 있던 턱에 걸려 그대로 털썩 넘어졌다. 충격이 컸던지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는 너를 가만 바라보다 그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넘어진 사람에게는 손을 내밀어 일으켜줘야 한다고 책에서 그랬으니까.
"괜찮아?"
손을 내밀었다. 용케 울음을 터뜨리지 않은 말간 얼굴이 그대로 들렸다. 부끄러운지 머뭇거리는 네 앞에 무릎을 접고 앉았다. 나와 비슷한 나이대의 여자애는 처음이었다. 되게 예쁘네. 평소 낯을 심하게 가리던 나였지만 그 날따라 말이 술술 잘 나갔다. 통성명과 나이까지 전부 알려준 짧은 만남을 뒤로하고 저만치서 나를 기다리던 엄마한테 돌아갔다. 미주알 고주알 있었던 일을 늘어놓자 엄마는 나보다도 더 기뻐했다. 어쩐지 친해질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4.
제 아버지를 들들 볶았는 지 내 병실까지 알아내 찾아온 너는 재잘재잘 지저귀는 것을 좋아했다. 태어나면서부터 쭉 아파왔던 터라 천성에서 우울함이 묻어나는 나와는 달리 활달함 그 자체인 너를 엄마는 좋아했다. 그래서 유치원에 다녀온 네가 병실에 들릴 오후 4시가 되면 나를 먹이려 사 두었던 사과며 오렌지 같은 것들의 껍질을 벗기기 시작했다. 소소한 일상이었다.
엄마, 엄마는 걔가 왜 그렇게 좋아? 얘기를 잘 해서?
그런 것도 있고, 태형이 너랑 닮았어.
그 때는 이해하지 못했다. 왜 내가 너랑 닮은 걸까. 어느 면이 닮았냐고 끝까지 물어보았지만 엄마는 끝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와서 돌이켜보니 어렴풋이 알 것도 같았다. 엄마 눈에는 너와 내가 그리도 불쌍해 보였던 걸까.
5.
초등학교 4학년 즈음이었을 것이다. 더위의 정점을 찍었던 날, 너무 더워서 야외수업을 진행할 수는 없으니 교실에서 영화를 보자는 체육선생의 제안에 아이들이 하나같이 반발했던 그 날. 울며 겨자먹기 식으로 체육선생은 올망졸망한 아이들을 데리고 나무그늘 밑으로 향했다. 금을 그어주고 탱탱볼 하나만 쥐어주면 아이들은 저들끼리 신이 나 피구를 할 것이었다.
공교롭게도 우리 반은 딱 맞아 떨어지는 짝수였다. 나는 당연히 나무 그늘 아래 벤치로 향했지만 뒤통수가 따가웠다. 내가 빠지면 한 쪽 팀이 유리하다는 반발이 여기저기서 튀어나왔다. 다들 은근하게 내가 들어왔으면 하는 눈치였다. 나는 자연스레 네 눈치를 살폈다. 공을 품에 꼭 끌어안고 있던 너는 당차게 외쳤다. 김태형은 안 돼!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그 경기를 뛰었다. 한 번쯤은 아이들 틈에 섞여서 뛰어보고 싶은 내 욕심에서였다. 나는 욕심을 부리면 안 되는 처지인 걸 알면서도.
정신을 차리고 보니 중환자실이었다. 온통 눈이 아프도록 흰 것들을 몸에 두른 엄마가 왈칵 울음을 터뜨렸다. 뛰던 도중 발작했다고 했다. 선생마저도 당황스러운 마음에 어찌할 바를 모르던 그 때 나를 병원까지 올 수 있게 한 건 전부 너였다. 엄마는 입에 침이 마르도록 너를 칭찬했다. 선생님 딸은 어딘가 달라도 확실히 다르다고.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 지 모르겠다고. 나는 고마운 마음과 동시에 가슴 한 켠이 아려왔다. 알 수 없는 감정이었다.
"공주,"
"김태형!"
아직까지는 어렸던 터라 회복력이 좋았다. 일반병실로 돌아오자마자 문을 슬쩍 열고 얼굴을 빼꼼 내민 네게 반가운 얼굴을 해보이자 너는 뜬금없이 와락 눈물을 터뜨렸다. 그 때까지 나는 내가 울기만 했지 남이 우는 건 달래본 적이 없어 어찌할 바를 모르고 멍하니 너를 바라보았다. 괜찮아? 괜찮은 거 맞아? 내가 얼마나 놀랬는데. 울음소리와 뒤섞여 엉망진창인 발음을 해석해보니 전부 내 걱정 뿐이었다.
"울지 마."
"……."
"나 괜찮아."
"……."
"진짜 괜찮다니까?"
네가 울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네가 울면 가슴이 아팠다. 심장발작이 올 때처럼 아픈건 아니였다. 무어라 설명할 수 없이 답답한 것도 같고 먹먹한 것 같기도 했다. 이게 사랑일 줄 알았으면 진작에 관두는 거였는데.
6.
수 없이 많은 수술을 거쳤다. 나이가 들 수록 그 수술이 짊어진 내 생명의 무게는 점점 거대해졌다. 그에 비례해서 내 회복속도도 더뎌졌다. 그래서 그런가 내가 의식을 차린 후 맨 처음 보는 네 얼굴은 늘 눈물범벅이었다.
다시 한 번 생각하는 거지만 너를 보며 처음 가슴이 아팠던 날 그게 사랑인 줄 알았더라면 나는 당장 너를 놓았을 것이다. 내 가슴에 고이는 네 눈물이 이제는 견딜 수 없이 무거웠다.
7.
김태형.
어?
너 의식 없을 때, 무슨 꿈 꿔?
그게 왜 궁금해.
그냥. 기억은 해?
응.
…….
무슨 생각 하냐면,
네 생각.
8.
해주고 싶은 말이 있었다. 지금 꾸고 있는 이 꿈에서 깨어나면 너에게 반드시 말 해주고 싶었다. 잊어버리지 않으려 수 천번 곱씹었다. 그런데, 꿈이 깨어지지 않는다. 걷고 있는 숲길을 발이 부르트도록 걷고 또 걸었는데도 끝이 보이지 않았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도 쉬었다 가면 늦어버릴까 걸음을 재촉했다. 그런데 왜. 어둠을 가장한 절망은 무섭게 나를 덮쳐왔다.
있잖아,
공주야.
그러니까….
*
안녕하세요, 썸머비 입니다.
이번 편은 태형이 시점 번외정도 될 것 같아요.
그래서 많이 짧습니다... 날로 먹었어요 하하
죄송한 마음에 포인트 5로 낮췄습니다.
저번 댓글에서 어떤 분이 태형이 시점으로도 한 번 보고싶다고 말씀 하셔서 써 봤는데
이번 태형이 편은 상황보다는 태형이의 감정서술에 초점을 맞추고 싶었어요.
여주를 만나기 전 태형이와 또 태형이가 여주를 어떤 애틋한 마음으로 보는지 그런 쪽으로 써보고 싶었는데 어떻게 잘 됐는 지 모르겠습니다;ㅅ;
재밌게 읽어주셨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암호닉 분들께 너무 감사해서 제가 별건 아니고 소소하게 텍파 나눔이라도 하려고 해요.
그래서 암호닉은 딱 이번 편까지만! 받으려고 합니다.
앞으로 우행시는 약 2화정도 남았구요 올라오는 텀은 그리 길지 않을거예요.
이번 편까지 암호닉 신청해주신 분들 중 원하시는 분들께는 우행시가 완결 난 후 오타나 매끄럽지 못한 부분을 수정한 텍파를 보내드릴거예요!
댓글 정말 감사합니다. 보고 힘 내서 쓰고 있어요! 감사합니다!
♥암호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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