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이? 제이에요? 거기 있어요?”
익숙한 목소리가 점차 가까이 다가온다. 젤로의 목소리였다. 흐느끼는 소리에 알아챈 듯 대답을 종용하는 소리를 들으며 영재는 낯선 이름을 혀로 굴렸다. 제이. 영재란 이름보단 가명을 쓰는 것이 좋겠다는 젤로의 말에 제이로 하기로 한 것을 그새 잊었었다. 눈을 감고 이마를 짚는다. 영재야. 유려하게 떨어지는 목소리가 끈덕하게 달라붙었다. 그는 힘없이 웃었다. 내 이름을 부른 것도 네가 마지막이 됐어. 하긴, 애초에 그 이름을 아는 자는 몇 되지 않았다. 차라리 잘된 일이다. 자신을 부르던 그 목소리를, 그에 내포한 가혹한 폭력을 떠올리지 않아도 되니까. 그는 칼칼한 목을 쓰다듬었다. 응. 작게 흘러나온 소리를 용케 알아들은 젤로가 잠깐만요, 작게 말하더니 말을 잇는다.
“너무 깊어요. 용병들을 불러 와야겠어요.”
“...용병?”
“네. 저 혼자선 도저히 무리에요. 아까 보니까 술 마시느라 정신이 없던데, 그래도 찾아보면 멀쩡한 사람 한 둘 쯤은...”
“그래, 잘도 구해주겠네. 지들이 구덩이에 밀어 넣은 사람이 도움을 요청하는 걸 보면 그 꼬락서니가 제법 웃기기도 할 거야?”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영재는 굳이 보지 않아도 젤로의 얼굴을 그릴 수 있었다. 생각, 생각...! 또 덜떨어진 애 마냥 고민하는 얼굴을 하고 있을 게 뻔했다.
그는 거친 숨을 들어 마셨다.
“너 바보야? 내가 멍청하게 이렇게 깊게 파인 구멍도 못 알아채서 혼자 떨어졌으리라고, 정말 그렇게 생각해? 아까 용병이 이 쪽으로 안내하는 거 봤잖아. 생각이 있으면 좀 머리를 굴려. 일부러 넘어지게 하고, 구덩이에 굴릴 만큼 나한테 적대적인 사람들이 날 도와준다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 하냐고!”
씨근거리며 소리친 말이 정적을 갈랐다. 가쁜 숨에 오르내리는 가슴을 누르며 영재는 열기로 홧한 자신의 얼굴을 감쌌다. 사실은 바랐을 지도 모른다. 누구도 쉬이 나서질 못할 그런 상황이었지만 젤로라면, 어쩌면 이 무신경한 소년이라면,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에게 괜찮나 한 번 물어봐 줄 수도 있지 않았을까. 그런 덧없는 기대를.
그렇게 겪고도 또 표면뿐인 친절을, 다정을 누군가에게 걸고자 했나. 영재는 스스로에게 차가운 조롱을 보냈다.
“일부러...그랬다구요?”
왜 그런 짓을 하는 데요? 덧붙인 말이 터무니없을 정도의 백치가 아닌가. 영재는 제 속을 긁어내는 그 말들에 욕을 뱉지 않으려 노력해야했다.
“내가 싫어서...! 그래서 발로 천을 밟고 날 넘어뜨렸지. 그 와중에 호의랍시고 내민 옷을 밀쳐냈으니 더 밉보였을 거고.
그래서 인적이 드문 곳으로 유인해서 내가 이 꼴이야. 이해했어?”
“싫어할 짓을 했어요?”
“...어!어!어!!!!”
결국 짜증스럽게 소리친 말에 젤로가 답한다. 그럼 사과하면 되잖아요. 용병들도 이해할거에요. 불러 올 테니까 사과해요. 나쁜 사람들 같진 않아 보였어요.
그 덤덤히 이어진 말에 기껏 쌓아 놓은 이성이 우르르 쏟아져 내렸다.
“너 진짜 답 없다. 네 눈엔 드러난 사실만이 전부야? 도대체 뭘 보고 다니는 거야? 인간관계라는 게 전혀 파악이 안 돼?”
쉴 틈 없이 쏘아붙이는 말끝에 비웃음이 담긴다. 그러니까 다들 너한테 화내는 거야. 대체 누가 너 같은 애랑 대화하고 싶어 하겠어? 냉담하게 떨어진 말에 규칙적으로 들리던 숨소리가 뚝 끊겼다. 영재는 잠시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흐르는 정적 사이로 억눌린 신음이 그에게 닿았던 것이다. 젤로와 자신, 둘 뿐인 상황이 아니었다면 결코 그 소리의 주인공을 짐작하지 못했을 정도로, 그 안엔 감정이라 할 수 있는 것이 분명히 담겨 있었다. 공백은 짧았다. 영재가 무어라 반응하기도 전에 미약한 숨은 다시 이어졌다.
“그게 문제라는 건 알고 있어요.”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목소리가 울렸다. 그러나 영재는 호흡이 이어지기 전의 찰나에, 그 간극에 자리한 천근같은 적막을 감지했다.
실수 했어. 이렇게까지 말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마른 입술을 핥고 입을 떼다 다시 닫는다. 뭐라고 해야 하지.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애초에 인간관계니 뭐니 지적을 할 것이 아니었다. 그 또한 그런 것엔 끔찍하니만치 서툴렀으니까. 용병들하고의 일도 그렇고 지금도...마찬가지다.
어린애 하나에게 화풀이를 하며 뭐라도 가르치는 냥 졸렬한 변명을 덧씌우지 않나.
“....내 말은. 그니까...제발 말 좀 알아들으라고”
“노력은 하고 있어요.”
잘 안되지만요. 그 뒤에 새어 나온 옅은 숨에 깃든 황량함에, 문득 영재는 궁금해졌다. 도대체 어떤 일을 겪어야 이렇게 되는 걸까. 처음 소년을 봤을 때 가벼이 넘겼던 그 이질감이 갈수록 진해져 의문이 점차 커져갔다. 물어볼까. 망설이듯 영재가 물으려던 찰나 뭔가 떨어지는 소리가 지면을 울렸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얼굴을 들자마자 다시 고개를 돌렸다. 잊고 있었다. 몸이 다시 떨려왔다. 그만하면 됐잖아. 숨을 크게 들이쉰다. 이러니 현이 그를 우습게 볼 만도 했다. 업이가 죽은 그 날은 떠올리는 것만 해도 온 몸이 저릿하고 아파왔다. 제게 보이던 웃음이 너무도 생경하여 그의 급작스런 죽음을 믿고 싶지 않을 만큼, 충격에 말도 못하고, 죽은 그 애의 옆에서 몇 날 며칠을 보냈을 만큼 그렇게 힘들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나. 별만 봐도 경기를 일으키는 건 이만 됐다. 마음속으로 되뇌어 봐도 차마 얼굴을 들 용기는 나지 않았다.
“저기 있는 거 천 좀 주실래요?”
천? 무슨 천을 말하는 거...아. 그 하늘색 천. 영재는 흙과 뒤엉켜 넝마가 된 천과 그것을 던지며 웃던 사람을 떠올리곤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고 보니 여기서 나가도 문제야. 앞으로도 며칠을 더 보내야 하는데....
한숨이 절로 나왔다.
“왜? 더러워졌어, 그거.”
그리고 그거 잡자고 고개를 들 용기도 없고. 영재는 뒷말을 쓰게 삼켰다. 극복은 해야겠지만 당장은 힘들었다. 입술을 질끈 깨물며 흙을 손에 쥔다. 현에게서 벗어나면 뭐 하나. 그 외에 변한 게 아무것도 없는 것을.
“아. 음....아니에요.”
“...뭔데?”
그는 가라앉는 제 기분을 애써 떨쳐냈다. 왜 그러는데? 재촉하는 그 말에 젤로가 추울 것 같아서요, 작게 중얼거린다. 이게 무슨 소리지? 영재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내가 얘를 닮아가나. 왜 이렇게 해석이 안 되는 거야. 천을 저한테 달라는 거 보니 춥다고 하는 건 본인을 말함인데..‘춥다’가 아니고 ‘추울 것 같다’? 그에게 물어보면 간단할 일이지만 제발 말 좀 알아들으라며 신경질 냈던 게 불과 몇 분 전이라, 영재는 차마 묻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어쩔 수 없죠.”
젤로의 차분한 목소리 후에, 조금 전 그의 주위를 환기시켰던 둔탁한 소리가 다시 한 번 울렸다. 대체 뭐가 이렇게 떨어지는 거지. 의아함에 그에게 물어보려던 찰나, 영재는 이상한 기류를 느끼고 몸을 바로 누웠다. 공기. 피부에 닿던 한기가 사라졌다. 동시에 어스름한 빛이 꺼졌다. 외면하던 것을 애써 마주했는데 보이는 건 어둠뿐이다. 그는 불안에 젖어드는 맥박과 제 숨소리만 들리는 정적에 몸을 굳혔다.
“너 거기 있어?”
“네”
짤막한 대답에는 어떠한 상황 유추를 할 수 있는 감정이 전혀 들어있지 않았다.
“나 지금 너무 깜깜한데, 왜 이래? 너도 그래?”
“아니요. 제가 가려서 그런거에요.”
그니까 어디에...뭘? 영재는 가슴에 맴도는 답답함을 이겨내지 못하고 벌떡 일어났다. 입구가 좁은 형태라 답답하지만, 적어도 가만히 땅을 보고 있을 때보단 나았다. 사방이 보이지 않도록 깜깜했지만 어둠에 익숙해진 눈이 점차 풍경을 담았다.
고개를 흘끗 올린 그는 그제서야 어둠의 원인을 알았다. 입구가 천으로 가려 있었다. 젤로의 짓인가? 언제 천을 구했지. 영재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물론, 택도 없었다. 가만히 손을 버둥거려도 어림도 없다.
“추워요.”
“난 춥지는 않은 데..답답해. 이거 네가 가린 거야? 손이 안 닿아! 천은 어디서 구한 건데?”
“손 가만히 있어요.”
응? 영재는 말뜻을 이해 못하고 있다가 스르르 고개를 돌렸다. 내 손 말하는 건가? 무의식중에 계속 움직이고 있던 손을 떨어뜨린다.
“추운데 손 그렇게 하면 더 춥잖아요.”
뭐? 그는 어이없다는 듯이 픽 웃었다.
“어차피 천으로 가려졌잖아. 그리고 내가 손 좀 파닥거린다고 거기까지 바람이 갈 리도 없고”
“바로 위에 누워있거든요. 그래서 허리 시려워요.”
영재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누워? 직접 누워서 가리고 있다고? 왜? 번거롭게 그럴 필요가 있나. 침묵에 젤로가 작게 웃는다. 맑게 울리는 소리가 번져나갔다. 그와 만난 후 처음 듣는 웃음소리였다.
“별 수 없잖아요. 해가 뜰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날이 밝으면 상인들도 있을 테니 대놓고 무시하지 못 할 거에요. 그러니 좀 자둬요. 요새 잠 못 잤잖아요.”
불편한 잠자리와 안 좋은 몸, 자신을 향한 날 선 시선들. 거기에 천막조차 없는 환경에서 밤이면 훤하게 떠있는 별을 피하느라 엎드려 자던 나날을 보냈다.
알고 있었구나. 영재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관심 없는 줄 알았어.
“나는 안에 있으니 괜찮지만 넌 추울 텐데...”
“제 옷은 두꺼우니까요.”
추울 것 같다고 걱정해 놓고선. 기묘한 감정에 불퉁하게 대꾸하자, 그가 제가 그랬나요? 태연히 응답하곤 말을 잇는다.
“별이 참 예뻐요. 보고 있으면 그런 거 못 느낄 만큼요.”
“...그래”
다행이네. 뒤늦게 답하는 말에 그가 조용히, 느릿한 말로 속삭인다.
“그러니까, 언젠가 제이랑 같이 봤으면 좋겠어요.”
나직이 울리는 말에 영재는 침묵했다. 시선이 위로 향한다. 설마, 아니겠지. 그는 물끄러미 천을 보다 고개를 저었다. 그처럼 섬세하리라고 생각되지 않았다.
하지만, 같이 봤으면 좋겠다는 그 말은....
머릿속이 점차 복잡해졌다. 젤로는 자신이 잠을 못 잔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일부러 천장을 가리며 누웠다. 이해하는 것 같아 보이진 않았지만, 영재의 말을 무시하지도 않았다. 용병을 부르지도 않았으며, 심지어 야영지로 돌아가는 것조차 하지 않았다. 이건...그는 하나로 귀결되는 제 추측들이 제법 그럴싸하다는 걸 깨닫고 쓰게 웃었다. 무신경한 게 아니었구나.
“미안”
앞 뒤 상황 설명 없이 대뜸 나온 말은 꺼질 것처럼 작았다. 또 뭐가 미안하다고 하려나. 그는 각오하며 마음을 다 잡았다. 화보다는, 제가 악의적으로 토해낸 말을 다시 입에 담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의외로 젤로는 그에 대해 묻지 않았다. 그저 희미한 웃음기가 배인 음성으로 답한다. 괜찮아요. 제이도 말 참 못 알아듣던데요. 작은 목소리를 타고 흐른 진동에 천이 흔들렸다. 영재의 가라 앉은 눈에 너울치는 파동이 내려앉았다. 언제나 의례 따라붙던 물음이 없었다. 왜 무섭냐고, 그저 하늘에 떠 있기만 한 별이 뭐가 무섭냐고, 묻지 않는다. 그 의미를 알 리가 없는데. 그저 '물으면 화낼 것 같다' 이상은 못 느꼈을지도 모를 너인데.
영재는 손을 들어 닿지 않는 천을 향해 몇 번 움직였다. 멀다. 여전히 닿지 않았다.
이상하지. 네 목소리는 그대로인데....
그는 한동안 위에 자리한 천을 바라보다 가만히 벽에 몸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모르겠다. 어째서 이렇게 따스하게 들리는지.
막힌 공간에 어느새 온기가 차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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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금슬금 얼굴을 비춰봅니다.
전편 기억은 하실려나..하하...사실 저도 까먹었었다는 게 함정.
다음주에 중간고사라 공부 좀 했습니다...는 아니고 사실 비비방에서 요 며칠 썰...좀 쓰고 놀고
룰루라랄라하면서 내일 올리지 뭐 이러다 오늘에까지 이르렀네요ㅠㅠㅠㅠ
전 주농이만 나오면 왜 이렇게 쓰기가 힘든지 모르겠네요. 흠흠...주농이 제가 참 예뻐하는 데 말이죠. 성격 표현이 어려워요.
다음 한 편 대충 지나면 이제 좀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전개될 것 같아요! 빨리 쓰고 싶으다.
그나저나 댛니는 뭐하는지...본격 유혹 당하는 영재.txt
다음주 금욜에 시험 끝나니까..주말에 뵈어요:D
오늘 구독료는 없어요. 자체 벌입니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