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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좋아해 박찬열. 아주 많이."

 

 어렵사리 입에서 뱉어진 말은 다시 들어갈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덤덤하게 마음 속에 품어왔던 연정을 고백하는 나는 이미 모든 것을 체념한 상태였다. 그 날따라 늦더위가 기승을 부렸다. 창문사이로 한 여름에 내리쬐는 태양빛이 따가웠다. 고개를 숙이고 있어 너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궁금하지 않았다. 아. 궁금하지 않았다기 보다는 알고싶지 않았던 것일 수도. 방과 후 사서 선생님이 잠시 자리를 비운 아무도 없는 도서실에서 나와 너는 서로를 마주하고 있었다. 고요한 침묵속에서 시원한 바람이 머리카락을 휘감았다.

 그 고요함에 입이 바짝바짝 마른다. 여전히 박찬열은 아무 말도 없었다. 항상 웃음이 가득했던 주위의 공기가 답지않게 굳어버렸음을 알아챈다. 어릴 적부터 항상 곁에 있던 친구가, 그것도 자기와 같은 성별의 남자가 고백했다. 배신감? 혐오감? 어떠한 대가도 각오하고 한 고백이었지만 이상하리만큼 그는 대답을 해주지 않았다. 나는 바닥만을 내려다보며 자조적으로 웃었다. 역시 거절이겠지.

 같은 유년기를 보내면서부터 친했고 나이가 더 먹을수록 백현은 찬열에게 가진 감정이 친구와의 우정에서 끝나지 않았음을 느꼈다. 하지만 잘 웃고 모두를 즐겁게 해주는 사교성은 저만 좋아하는 것이 아니었다. 벌써 180에 훌쩍 다다른 키와 뚜렷한 이목구비는 뭇 여학생들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멀리서 바라보기만 하기에는, 고작 열여섯 남학생에게는 감당하기 어려운 마음이었다. 자신의 감정을 속이기에 급급한 나머지 참고 참다가 곪아서 결국 터져버렸다. 이제 어떻게 되든 상관은 없었다. 두 계절만 있으면 고등학교로 진학하고 각자 걷는 길이 달라질 것이다. 무리의 중심인 찬열은 그 자리에 그대로 남은채, 자신만 변두리로 멀어지면 된다. 그렇기에 벼르고 벼르다가 이번이 끝맺음할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했다. 단지 그 뿐이었다.

 

 잘가 찬열아. 끝내 하지 못한 말을 마음속으로 삭히며 뒤돌아 집으로 돌아가는 걸음을 옮겼다. 당연하게도 박찬열은 날 붙잡지 않는다. 8월, 뒤늦은 무더위는 하루 내내 가실 줄을 몰랐다.

 

 

 

 


[찬열/백현] SUMMER

 

 

 

 

 

 목줄기를 타고 땀방울 하나가 흘러내린다. 봄이 가고 다시 돌아온 여름은 여전히 더웠다. 날씨 한 번 끝내주네. 남고의 체육시간, 고3이라고 다를 것 없이 축구하는 아이들의 무리를 바라보며 스탠드에 앉아있기만 했는데도 온몸이 흠뻑 땀으로 젖어갔다. 이마에 달라붙은 앞머리를 쓸어올리며 시끄러운 매미 울음소리를 배경으로 앉아있으니 진정한 여름이 실감난다. 왼쪽 손목을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이제 곧 마침종이 울릴 때임을 확인하기가 무섭게 체육선생님의 경기종료를 알리는 호각소리가 울렸다. 다른 때라면 불평불만을 투덜거릴 녀석들이 다음이 점심시간임을 염두한 것인지 군말없이 모인다.

 

 "쪼그리고 앉아서 뭐해 변백현."

 

 축구를 마친 종인도 어느 새 곁으로 와서 벗어놓은 교복 와이셔츠를 챙겼다. 땀에 절어있을 검정 반팔티셔츠를 펄럭거리자 그 더운 열기가 제 옆으로 전달되는 것만 같아 슬쩍 인상을 찌푸렸다. 그걸 눈치챈 종인이 재밌다는 듯 웃으며 제 주름진 미간을 문질러 폈다.

 

 "이겼냐?"
 "너 축구하는거 안 봤어? 나 골도 넣었는데."
 "더워서 멍때렸더니 기억안나."
 "됐다. 너한테 뭘 바래. 2대 1로 이겼어."

 

 나랑 오세훈이 한 골씩. 어때 형님 좀 멋있냐? 킬킬 웃으며 쓸데없이 폼을 잡는 종인을 가볍게 무시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흙먼지가 묻어있을 바지를 털어냈다. 다른 반하고 친선 경기라도 한 것인지 같은 반이 아닌 몇명도 운동장의 무리 속에 섞여 짜증나는 얼굴을 하고 있다. 우리 반이 이겼다고 했으니 저쪽이 진건가. 운동장을 마저 스윽 둘러 훑는데 낯익은 얼굴 하나가 시선에 걸린다.

 어느 새 한뼘 더 자란 키, 여전히 큼직한 눈에 좀 더 성숙해진 얼굴이. 웃고 있었다. 곳곳의 짜증내는 얼굴과 다르게 하얀 얼굴엔 개구진 웃음이 가득하다. 제일 좋아했던 눈꼬리까지 접히던 환한 웃음에 나는 일순 숨이 멎는다.

 

 "내기 경기였거든. 우리가 이겨서 6반이 이따 점심시간 끝나고 매점에서 아이스크림 쏜대."
 "...어."
 "6반 박찬열 때문에 한 골 넣긴 했는데 우리한텐 상대가 안됨. 임마. 넌 덥다고 축구도 안하고 공짜로 받아먹는 줄 알아."
 "......"
 "...변백현? 야 뭐해. 내 얘기 듣고 있어?"

 

 박찬열. 열여섯 기억 속의 그가 또다른 모습으로 거기 서있었다.

 그 날 이후로 우리는 3년이 흘렀다. 운 나쁘게 같은 고등학교로 진학했다고 들었지만 반도 계속 다르고 심지어 층과 건물까지 달라서 여지껏 학교에서 제대로 마주친 적이 없는 그다. 멀리서 오는 모습을 마주칠까 하는 날엔 의도적으로 길을 돌아 피했다. 그간의 노력이 허탈하게도 결국은 이렇게도 보게 되네. 고등학교에 와서도 눈에 띄는 외모와 사교성으로 간간히 들려오는 소문만 접했다. 가끔씩. 혹여나 하고 점심 시간에 교실 창문을 내려다 보면 운동장을 쏘다니는 작은 뒤통수가 눈에 띄었을 뿐이다. 6반이었구나. 6반이면 제 반과 건물부터 다르다. 예체능 계열반으로 따로 분류되어 있었으니. 그러고보니 너는 음악을 공부하고 싶다고 내게 말한적이 있더랜다.

 옆에서 툭툭 치는 종인이 느껴졌지만 내 신경은 오로지 박찬열에게 쏠려있었다. 반응이 없는 내게 질렸는지 종인은 결국 먼저 스탠드에서 내려갔다. 찬열은 옆에 있는 친구와 장난을 치며 함박 웃음을 지었다. 문득 제 위치가 서글퍼졌다. 3년 전엔 나도 저 자리에 있었는데. 박찬열의 옆에서 같이 장난치고 웃고 항상 함께 다녔지만 지금은 아니다. 내가 너를 볼 수 있는 자격조차 있는걸까. 부럽고 씁쓸한 마음에 고개를 돌리려 하는 찰나 여지껏 바라보던 검은 눈동자 한쌍이 갑자기 이쪽으로 향했다.

 

 "......"
 "......"

 

 겨우 10미터 안팎의 남짓한 거리였지만 이 순간만큼은 그 거리가 그렇게 멀어보일 수가 없다. 잔뜩 휘어져 올라갔던 너의 입꼬리가 점점 수직을 향해 내려간다. 아마도 그 날 내 고백에 지었을 법한 무표정으로 박찬열은 멈춰서서 나를 바라봤다.
 
 낯설고도 그리웠던 얼굴을 마주하자 울컥 감정이 치민다. 내가 의도적으로 박찬열을 피한 것 처럼 박찬열 역시 날 피했다. 나는 널 피해야했지만 너는 그렇지 않았잖아. 작은 인사라도 해줄 수도 있었잖아. 그 전까지 우리가 함께 보냈던 시간은 나만 소중했던 거야? 당장이라도 달려가서 따져묻고 싶었지만 변백현은 언제나 소심하다. 그저 지금 이 자리에서 널 볼 수 있다는게 신기해서, 반가워서. 웅크렸던 한 손을 천천히 들어올려 좌우로 흔들었다.

 안녕 찬열아. 이 것은 내가 너에게 3년만에 하는 첫 인사.

 

 "......"

 

 아무런 감정이 없는 얼굴로 무표정하던 너는 가만히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돌려버렸다. 뒤돌아서 다시 친구와 떠들며 웃는 네 모습에 허공에서 흔들리던 손이 힘없이 멈춰졌다. 온 몸으로 타고 올라오는 무안함과 허무함이 나를 잔뜩 옥죄었다.

 


 3년동안 피해왔지만 한편으로 기다렸던 너의 대답일까.

 

 

 

 박찬열은, 이제, 날 보고 웃지 않는다.

 

 

 

 

*

 

 

 

 

 10시가 훌쩍 넘어서 끝난 학원수업에 피로가 쌓인 눈알이 뻑뻑했다. 눈가를 주무르며 필기구를 정리하고 가방을 챙기니 문밖에서 기다리던 도경수가 어서 오라며 손짓한다. 이제 정말 얼마 남지 않은 시간에 들끓는 더위를 무릅써가며 공부에 매진해야만 했다. 시원한 에이컨 냉기가 가득했던 학원 건물을 나오자 바로 후덥지근해진다. 밤인데도 눅눅한 날씨에 교복 안쪽으로 습기에 찬 피부가 질척하게 느껴진다. 더위와 피로에 지친 몸뚱아리가 맥아리 없이 흔들거린다.

 학원 건물이 밀집된 거리에 우리 말고도 가지각색의 교복을 입은 학생들로 붐볐다. 각 학원별로 색색의 셔틀버스들이 도로에 즐비하다. 나는 집이 비교적 가깝기 때문에 셔틀을 이용하지 않고 근처에 사는 도경수와 하원을 같이한다. 중학교에서 같이 올라온 박찬열 외의 몇 안되는 가까운 친구 중 하나이기도 했다. 큰 길에 북적이는 사람들을 피하며 얼마 멀지 않은 집으로 발걸음을 바삐했다. 심심하면 경수는 가끔씩 학업과 진로에 대한 재미없는 사담을 건넸다.

 

 "이번 학원 모의고사 어땠어?"
 "좀 떨어졌어. 넌?"
 "나도 그래. 저번보다 어렵게 냈다고는 하더라."

 

 몇 마디씩 주고 받다 보면 금새 집 가까이 도착했다. 한산해진 길가에 가로등이 끔벅거리며 제 수명을 다한 빛을 낸다. 경수의 집이 먼저였기에 이제 남은 길을 나 혼자 마저 걸어가면 된다. 그렇게 평소처럼 끝날 것과 다름없는 하루다.

 

 "그럼 내일 학교에서 보자."

 

 아파트 단지 앞에 서서 인사를 하는 경수에게 같이 손을 흔들어주었다. 그러다 문득 저도 모르게 몇 년간 입에 담지 않았던 말이 떠올랐다. 아까 낮에 본 그 얼굴이 아른거려서 백현은 다급하게 경수의 뒷모습을 붙잡았다.

 

 "도경수."
 "응?"
 "...걔 있잖아. 요즘 어떻게 지내는지 알... 아?"
 "누구?"
 "박찬열..."

 

 찬열은 입이 싼 놈이 아니었다. 제 고백을 누군가에게 퍼트릴 놈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혼자 걸려서 말을 한참을 입속에서 굴리다가 겨우 물어보았다.

 중학교 때는 백현과 찬열, 경수까지 해서 셋이 잘 몰려다녔었다. 특히 유별나게 죽이 잘 맞아 장난치기를 좋아했던 백현과 찬열의 사이를 경수는 잘 알았다. 중학교 3학년, 여름방학이 끝나고서부터 일체 서로를 무시하기 바쁜 모습을 보며 경수는 당황스러워했다. 처음엔 싸웠으려니 알아서 해결하게 냅뒀지만 시간이 길어지자 언제까지 그럴 거냐며 화해를 촉구했다. 찬열과 백현 사이에서 몇 번이고 시시때때로 실랑이를 벌였다. 실랑이가 고1 여름 막바지까지 가다가 백현의 울음이 터진 적이 있었다. 경수는 그 날을 또렷이 기억한다. 그 해 여름 최고의 장마였다. 비가 무지막지하게 쏟아지던 날, 갑자기 우산도 없이 비에 홀딱 젖은 채로 경수의 집을 찾아온 백현은 숨이 넘어가도록 끅끅대며 울었었다. 박찬열, 박찬열, 박찬열. 그 세 글자에 뭐가 있다고 계속 그 이름만 부르며 울었다. 너무 울다가 탈진해서 쓰러진 백현을 경수는 놀라서 간호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백현과 찬열의 사이에 자신이 모르는 무언가가 있음을 짐작했다. 탈진에, 비까지 맞아 열이 오른 몸은 이틀 내내 열로 들끓다가 간신히 식었다. 그 때부터 경수는 절대 찬열의 이름을 백현 앞에서 언급하지 않았다.

 

 "...어, 나도 요새 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다. 걔 우리랑 건물이 다르잖아."
 "아."
 "가끔 들어보면 잘 지내기는 하던데. 여전히 잘 웃고, 잘 놀고. 공부도 열심히 하는 것 같고."
 "...그래."

 

 붙잡아서 미안. 들어가. 내일 보자. 어두운 목소리로 말을 마친 백현이 힘없이 뒤돌아 보였다. 다른 날보다 유독 축 쳐진 어깨를 보며 경수는 이대로 보내도 되는 건지 불안감이 들었다. 백현의 입에서 박찬열이 나온 것이 너무 오랜만이라 경수는 조심스럽게 말을 아꼈다. 지난 번 백현이 쓰러져라 울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래서 경수는 거짓말을 했다.

 

 백현이 했던 것과 같은 질문을 경수는 오늘 학교에서 만난 이에게 이미 들었었다. 항상 웃는 줄만 알았던 얼굴이 거의 반쯤은 일그러진 채로.

 

 

 변백현. 너는 잘 지내냐고 묻는 박찬열의 눈은, 그 때의 너와 다를 바 없었어.

 

 

 

 


*

 

 

 

 


 열일곱살 여름, 몇 년만의 최고의 폭우량을 자랑하는 장마가 찾아왔고 비가 너무하리만큼 쏟아졌다. 동아리 활동이 모두 끝나고서도 선생님의 잔심부름으로 학교에서 시간을 때우다가 좀 늦은시간에 학교를 나섰다. 동아리 활동이 있는 날은 3학년밖에 야자를 남지 않기 때문에 1,2학년이 쓰는 층은 적막에 감겨있었다. 6시가 안된 시각임에도 불구하고 잔 뜩 낀 비구름으로 창밖으로 보이는 하늘이 어두컴컴했다.

 일기예보를 보고 아침에 미리 챙겨왔던 파란색 장우산을 펼쳐들었다. 투명한 파랑이 찬열의 시원함과 닮아 골랐었던 우산이다. 별게 다 생각나네. 혼자서 머쓱하게 뒷머리를 흐트려버리고선 교문앞의 물웅덩이를 조심스럽게 피해갔다. 경사가 진 곳이라 작은 연못마냥 불어난 물웅덩이는 파도치는 것처럼 박자에 맞춰 넘실댔다.

 촤아악. 시끄럽게 빗물을 가르며 행진하는 차체들을 보며 물이 튈새라 길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비때문에 후덥지근했던 온기는 가라앉았지만 대신 습기가 가득찬 몸이 찐득거렸다. 아무래도 집에 가자마자 바로 샤워하고 옷을 갈아입어야겠다. 찰박거리며 걸음을 빨리하는데 저 앞 신호등에, 이 날씨에 우산도 없이 우리 학교 체육복 하나만을 머리에 두르고 서있는 남자가 있었다. 미쳤네. 감기라도 걸리면 어쩌려고. 혀를 차며 걸어가선 그 옆에 서서 신호를 기다렸다. 나보다 키가 좀 더 큰 듯 해서 슬쩍 올려다보는데 인기척을 느꼈는지 남자가 고개를 돌렸다.

 

 "..."
 "..."

 

 우연도 이런 우연이 다 있을까. 이렇게 생긴 얼굴이 내가 아는 박찬열 말고 또 있을지 모르겠다. 당황함에 커진 눈을 끔벅거리며 한동안 말없이 서로 쳐다보기만 했다. 그 사이 초록불이 켜져 건너편의 사람들이 걸어왔지만 우리 둘 중 아무도 발을 떼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깨달은 것이 우산도 없이 비를 맞아 흠뻑 젖어있는 박찬열의 얼굴이었다. 곧게 뻗은 동그란 콧잔등 위로 빗방울이 또르르 선을 따라 내려와 매달린다. 나는 이 횡단보도만 건너면 바로 앞이 집이었지만 박찬열은 아니었다. 일 년 새 이사라도 가지 않은 이상 박찬열의 집은 내가 알기로 10분은 더 걸어가야했다.

 요즘 독감이 유행이라던데. 겉으론 말없이 계속 쳐다봤지만 속으로는 안절부절 불안이 앞섰다. 다시 한 번 1년 전으로 돌아가 친구의 자격으로 걱정해 주고 싶었다. 그래서 발 끝부터 용기를 끌어모아 어렵게 손을 내밀었다.

 

 "이 우산, 너가 써."
 "..."
 "너 계속 비맞고 가야 되잖아."
 "..."
 "나는 이 앞이 지,집이니까."

 

 될 수 있으면 태연하게 말한다고 말한건데 결국 버벅거리며 말을 더듬었다. 온몸을 적셔가는 빗방울때문인지, 아니면 너를 마주하고 있기 때문인지 우산을 건네는 손이 벌벌 떨려왔다. 우산에서 벗어난 내 몸도 너와 마찬가지로 점점 젖어들어간다. 박찬열의 표정은 변화가 없었다. 가라앉은 눈동자가 나를 빤히 쳐다보기만 했다. 별 수 없이 나는 팔을 뻗어 박찬열의 손을 잡고 내 손에 들린 우산을 억지로 들려주었다.

 

 "..잘못하면 감기들어."
 "..."
 "우산은, 그냥 너 가져도 되니까,"
 "너 나 알아?"
 "......어?"
 "나는 너 모르는데."
 "..."
 "너는 모르는 사람한테 왜 우산을 줘?"

 

 박찬열이 그 이후로 나에게 말을 한 건 처음이었다. 눈동자만큼이나 내리앉은 목소리가 귓가에 웅웅대며 퍼졌다. 갑작스레 놀라움도 잠시, 너가 내게 전한 말은 지독히도 아팠고 내 가슴을 할퀼 뿐이었다. 혹시라도 전처럼 다시 다정하게 말을 건네줄까 하는 내 기대감은 보기좋게 어긋났다. 그런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는 착각이 너무 창피해서 얼굴에 열이 몰려왔다. 빗소리는 점점 더 거세졌다. 어찌할 줄 모르고 서있는 내게 박찬열이 다시 입을 열었다.

 

 "너는 그럴지 몰라도 나는 모르는 사람이 주는 건 안받아."
 "..."
 "우산, 너나 쓰고 가라."

 

 그의 손에서 파란색 우산이 보기좋게 바닥으로 내팽겨쳐졌다. 곧바로 켜진 초록색 신호등에 찬열은 망설임없이 몸을 돌려 건너갔다. 쿵 하고 마음이 추락하는 소리가 심장에 울렸고 나는 박찬열을 멍하니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신호가 깜박거리고 있음에도 따라 건너가지 못했다. 곧이어 완전한 빨간불이 켜지고 세찬 빗소리를 가르며 버스가 지나간다. 기다란 버스가 지나가고 다시 건너편을 봤을 때 너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젖어버린 눈가가 파르르 떨려왔다. 비에 서린 냉기가 몸 구석구석을 휘감아 올라왔다. 그제서야 머리로 받아들여지지 못했던 말이 차츰차츰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박찬열은, 나를 모르는 사람 취급하기로 한 것이다. 이제 박찬열한테 변백현이란 아이는 없는거다.

 

 "...흐으.."

 

 다른 무엇보다 그 사실이 슬퍼서, 뜨거워진 눈가에 물방울이 번지며 흐려졌다. 비에 섞인 눈물이 얼굴을 뒤덮는다. 하나 둘 씩 머리칼을 타고 흘러내린 빗방울은 곧 파들거리며 떨리는 눈썹에 매달려 눈물처럼 흘러내렸다. 새어나가던 흐느낌이 점점 더 절박하게 차올랐다.

 많은 것을 바란게 아니었다. 하지만 이렇게 상처받으려고 한 고백도 아니었어. 더 이상 너한테 나는 없는거야. 처음으로 너를 향한 지난 날의 내 고백이 후회되었다.

 

 

 

 길가에 내팽겨쳐진 파란 우산이 비바람에 쓸려 나동그라졌다.

 내 마음도, 너에게 버려진 우산처럼 나동그라진다.

 

 

 

 


*

 

 

 

 

 

 한차례 쏟아지는 비에 기온이 많이 떨어졌는지 자욱하던 열기가 식어갔다. 부모님도 큰 집에 제사지내러 가셨겠다, 모처럼 맞는 조용하고 시원한 주말에 도서관을 가지 않고 집에서 공부하기로 마음먹었다. 월요일까지 마무리지어야 하는 학원 과제를 학교에 놓고 온 것이 생각나서 급히 경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바깥에 있던 모양인지 주변의 산만한 잡음소리와 함께 경수가 흔쾌히 빌려주겠다며 마침 외출 중이니 한 시간 내에 자기가 가겠다고 했다.

 일부러 외출복을 갈아입을 필요가 없어져서 한결 여유롭게 샤워를 마쳤다. 편한 옷차림으로 갈아입고 눅눅했던 습기가 겨우 보송보송하게 말라가니 기분이 좋았다. 머리를 말리느라 젖은 수건을 대충 목에 두르고 기다릴 동안 가볍게 볼 심산으로 방에 들어가 정리노트를 펼쳤다. 타닥 타닥 가느다란 빗소리가 계속해서 지긋하게 차창을 두들겼다. 언제쯤 이 여름이 끝날 수 있을까. 어린애 같은 생각에 푸 하며 바람빠진 웃음이 났다. 지구가 자전하고 더이상 태양 주위를 공전하지 않은 이상 여름이 끝날리가 없다. 아마 평생 다시 돌아오기를 반복하겠지.

 목 언저리가 텁텁하게 막혀왔다. 남은 주스가 있나 생각하면서 주방으로 가려는데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 시간을 보아하니 아직 한 시간이 조금 안지났는데 벌써 왔나보다. 대답이 없자 다시 두번 문을 탕탕 치는 소리가 났다. 서둘러 걸음을 옮겨 현관문을 열며 가볍게 웃어보였다.

 

 "벌써 왔네. 내가 그냥 너네 집으로 갔어도 됬는... 데......"

 

 거기에 서있는 건 도경수가 아니라 박찬열이었다.

 

 "도경수가 한 시간 내로 못가져줄 거 같다고 해서. 내가 가져다 준다고 했어."
 "..."
 "..."
 "..."
 "..아니면, 다시 도경수한테 갖다주라고 해?"

 

 눈 앞에 보일리가 없는 찬열이 평상시와 다름 없는 얼굴로 제 앞에 서 있었다. 빗방울에 젖었는지 잘 빗어진 머리칼은 조금 흐트러진 채로였다. 너무 놀라 그 자리에서 굳어버린 채로 대꾸도 못하고 입만 벙긋거렸다. 계속 대답이 없는 날 보며 박찬열이 한숨을 쉬더니 손에 쥔 파일을 내밀었다. 얼떨결에 받아버린 나를 제치고 자연스럽게 들어와 쇼파에 앉는 행색에도 여전히 가만히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야."
 "..."
 "변백현."
 "......"
 "......"
 "...어? 어, 주스라도 마실래?"

 

 네 입속에서 불린 내 이름이 너무도 오랜만이라 낯설기 그지 없었다. 저기 앉아있는 박찬열이 학교에서 날 보고도 못본척 고개를 돌리던, 그 아이가 과연 맞는걸까. 그래도 집에 왔으니 뭐라도 대접해야하나 싶어 파일을 내려놓고 걸음을 돌리는데 갑자기 일어선 박찬열의 음성이 날 멈춰세웠다.

 

 "내가. 뭐 하나만 물어보려고."
 "......"
 "그래서 왔어. 일부러. 도경수 대신해서."
 "...아."
 


 내 입에서 짧은 탄식이 나오고 메마른 박찬열의 목소리가 잠시 멎었다. 짧은 텀이 있었고 그 텀이 숨막힐 듯 옥죄어 오는 떨림에 내내 애타는 침으로 괜스레 목을 축일 때, 찬열이 다시 말을 이었다.

 

 "너 아직도 나 좋아해?"
 "......"
 "...아니지. 날 왜 좋아해?"
 "......"
 "너랑 나랑, 같은 남자야. 안 역겨워?"
 "...야. 박찬열."
 "좋은 친구로 계속 남을 수 있었잖아."
 "야. 너 지금,"

 

 나한테, 진심으로 하는 소리야?

 차마 대꾸하지 못하고 속으로 말을 삼켰다. 잔뜩 상처받고 아물기를 반복했던 감정이 또 한번 크게 술렁인다. 지금 너의 말은 모조리 독이 되어 다시 돌아온다는 걸 박찬열이 모를 리가 없다. 그럼에도 그 흔한 욕 하나 대답하지 못한 까닭은, 사정없이 구겨진 너의 시선이 어느샌가부터 울고 있어서였다. 

 

 "왜... 왜 고백했어."
 "......"
 "고백 안했으면, 우리 이럴 필요 없었잖아."
 "......"
 "어? 대답 좀 해봐 씨발..."

 

 찬열이 참지 못하고 고개를 젖히며 마른 세수로 얼굴 전체를 쓸어내렸다. 마지막 말을 끝맺은 너의 낮은 목소리가 잘게 일렁였다. 한번에 봇물터지듯 터진 물음은 감정이 점점 격해지더니 결국 참지 못하고 욕짓거릴 내뱉음으로써 끝이났다. 아까보다 더 텁텁해진 목이 깔깔하게 막혀왔다. 나를 바라보는 박찬열의 눈은 화가 복받힌 듯한 울음기가 빨갛게 서려있었다.

 속에 맺힌 응어리가 목 아래까지 차올랐다. 고백의 대답은 실로 쓰라렸다. '미안해.' 적어도 이 말만이라도 해주길 바랬다. 거절할 생각이라면 얼마든지 예상했고,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받아드리고 체념할 각오도 되있었다. 3년. 박찬열이 대답없던 3년동안 어찌할 줄 모르고 발만 동동구르다가 상처입는 것은 나였다. 기다린 대가가 이거야? 당사자가 이렇게 얘기하는데 그동안 속만 까맣게 태운 나는 머저리 병신이었다. 여태껏 박찬열을 좋아했다는 게 짜증나고, 분하고, 씁슬해서 눈물이 났다. 데굴데굴. 바닥으로 뚝뚝 떨어지는 굵은 눈물방울을 보며 나는 입술을 잘근 깨물고 거친 숨을 삼켰다. 하지만 격양되는 울음에 헐떡이는 소리를 막을 수는 없었다. 울음에 숨이 가득찬 폐부가 참지 못하고 들썩이며 히끅거리는 소리를 내뱉었다. 그 소리에 박찬열이 발개진 눈가를 뒤로하고 내 쪽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미안해."
 


 결국 미안하다고 말하는 건 너가 아니라 내가 된다.

 

 "너한테 고백해서, 끅, 정말 미안한데."
 "......"
 "처음부터, 기대같은 거 안했으니까."
 "......"
 "걱정 마."
 "......"
 "나 이제부터 너 안좋아해 개새끼야."

 

 남아있는 감정도, 모조리 억지로라도 지울거니까. 짓물린 입가에서 비릿한 피맛이 새어들어온다. 당장이라도 엉엉 울고 싶었지만 이 이상 박찬열 앞에서 자존심을 뭉개고 싶지 않았다. 꾹꾹 울음을 눌러삼키며 보일새라 한 손을 들어 두 눈위에 얹었다. 뜨거운 열기가 고스란히 전해져서 나는 다시 한번 울음을 참지 않을 수 없었다. 박찬열 너가 뭐라고 이렇게 아파해야 하는 건가 싶어서.

 

 "...그래. 알았어."
 "......"
 "울려서... 미안하다. 그만 갈게 이젠."
 


 찬열이 무겁게 숨을 내뱉으며 일어섰다. 차마 그 모습을 바라보지 못한채 몸을 돌려 인사를 삼갔다. 이제 나는 너를 버텨낼 재간이 더는 남아있지 않았다. 삭혀왔던 3년의 마음이 지치고 메말라갔다. 걸음을 떼던 찬열이 나가다 말고 마지막으로 낮게 말을 끌었다.

 

 "...그런데 변백현."
 "......"


 ......

 

 타앙. 육중한 소리를 내며 현관문이 닫히고, 그 자리를 소음 대신 묵직한 공기가 자리잡았다. 이제서야 박찬열이 완전히 떠나버렸다. 조용히 속삭이듯 흘리고 간 말에 삼켰던 눈물이 엉엉 터졌고 서럽게 원망스러운 울음을 내뱉었다. 나가버리는 마지막 뒷모습을 참지 못하고 황급히 돌아봤었다. 들어올 때는 보지못했던 파란 장우산이 현관 입구 앞에 세워져있었고 너는 그걸 분명히 잡아들었었다.

 내 눈을 의심했다. 지지난 여름 내가 너에게 주었던 파란색 우산. 너에게 내쳐져 도로 바닥을 나뒹굴던 파란색 우산이 다시 네 손에 들려가는 것을 보며 설마하는 생각이 들었다. 끅끅거리며 간신히 숨을 부여잡고 베란다로 나갔다. 블라인드를 열어 젖히고 곧이어 입구에서 나올 찬열의 모습을 애타게 찾았다. 떨리는 심장을 애써 진정시키며 오로지 입구만을 뚫어져라 내려다보았다. 차창 표면이 빗물로 얼룩져가고 한참이 지났을 즈음 어슴푸레 한 인영이 걸어나온다.

 

 "아...."

 

 그에 나는 또 한번 울음을 터뜨린다. 부슬비에 차게 식은 네 모습은, 열일곱 우리의 파란색 우산 아래 가려져 있다.

 

 

 

 

 ......

 ...

 

 그런데 변백현.


 먼저 모른 척 피해버린 건, 내가 아니라 너였어.

 

 

 

 

*

 

 

 

 

 꿈을 꿨다. 불투명한 빗물로 넘실대는 거리엔 나와 박찬열이 서있다. 제작년과 마찬가지로 횡단보도 앞이었다. 먹구름으로 햇빛이 가로막힌 거리를 차들이 노란 불빛을 내며 밝혔고 오색찬란한 가게의 네온사인들이 우리 주위를 비추었다. 너와 나를 제외한 모든 소리와 움직임이 천천히 영화 속 슬로우모션처럼 멀어진다. 네 눈동자 속에는 오롯이 나만 담겨있었다.

 손에 들려있는 파란 우산을 찬열에게 건넨다. 꿈이겠지만 이번마저 거절당한다면 벌써 몇 번 째 실망인지 모른다. 움츠러든 나머지 건네는 우산으로 시야의 절반을 가려버렸다. 보이는 거라곤 빗물에 젖어들어가는 찬열의 바짓단부터 허리춤까지일 뿐. 계속해서 발 옆에 고인 빗방울만 응시하는데 한참을 지나도 너는 답이 없다. 스믈스믈 밀려드는 불안감에 살그머니 우산을 높여든다. 아래부터 시작해서 찬찬히 네 모습이 드러난다. 완전히 네 얼굴을 볼 수 있을 때 나는 의아함에 눈을 크게 떴다.

 

 박찬열의 눈빛은 그 때처럼 싸늘하지 않았다. 놀라 두 눈을 끔벅이며 내가 정면으로 올려다보자 가만히 있던 네 입꼬리가 슬쩍 위로 휘어졌다. 놀라울 새도 없이 멍청하게 서서 우산을 잡고있던 내 손을 박찬열이 그러쥐어 제 품에 가뒀다. 파란 우산이 그 때처럼 바닥으로 나동그라졌지만 너는 여전히 내 앞에 서있다. 듣기좋은 달콤한 저음이 귓가에 메아리친다. 

 


 "좋아해 백현아."


 환상인 걸까. 신기루처럼 너는 나를 보며 환하게 웃고 있었다.

 

 

 

 

*

 

 

 

 

 다시 잠에서 깼을 땐 새벽이었다. 어슴푸레한 빛이 창문 사이로 새어들어와 방안을 비췄다. 뻑뻑한 눈가를 비비며 침대에서 일어나는데 책상위에 올려놓은 핸드폰이 드르륵거리며 시끄럽게 진동을 울려댄다. 누가 이 새벽에 전화를 거나 싶어 가만히 생각하고 있으니 곧 진동이 멈추고 불빛이 깜박였다. 화면에 뜬 11개 숫자에 저장되어있는 이름은 없었지만 머릿속에서는 누구보다 한 사람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까만화면으로 물들어 잠잠하던 폰이 다시금 드르륵 요란하게 울려댄다. 저도 모르게 통화버튼을 눌러 귓가에 핸드폰을 갖다대자 역시나 했던 목소리가 들렸다. 칼칼하게 잠겨있어 평소보다 더 가라앉은 목소리에 나는 그저 듣기만 했다.

 

 -"이제야 받았네."
 "......"
 -"...변백현."
 "......"
 -"잠깐만, 나와봐 백현아..."

 

 뒷말이 흐려지며 그대로 통화가 끊겼다. 5시 13분. 이 시간에 너가 전화를 건 것도 처음이거니와 나를 불러낸 목소리가 불안하게 흔들려있었다. 나가야할지 말아야할지 혼란스러운 생각에 딱딱 소리를 내며 손톱을 물어뜯었다. 검지 손톱이 점점 흐물해지다가 결국 톡 하고 까져서야 서둘러 의자에 걸려있는 흰 니트가디건을 집어들었다. 급하게 걸쳐입고 신발장으로 가 아무거나 눈에 보이는 신발을 구겨신었다. 내가 선택할 수 있는 란은 어차피 처음부터 정해져 있는거나 다름없었다.

 꼭대기층에 멈춰있는 엘리베이터를 초조하게 기다리며 까진 손톱을 연신 긁어댔다. 긴장과 두근거림, 불안하고 초조해서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너는 알고 있을까? 이제부터 좋아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어도 한차례가 지나면 변백현은 어쩔 수 없이 박찬열을 바라보게 되있다. 나에게 박찬열은 그런 존재였다. 너라는 사람 하나만으로도 나는 쉽게 무너져 버릴 수 있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벽면에 붙은 거울을 보며 부스스하게 엉망이 된 머리를 손으로 빗어 잘 정돈했다. 거울 속의 나는 몹시 불안정해보였다. 빨라지는 거친 호흡을 애써 천천히 내쉬며 진정시켰다. 땡- 하는 1층 도착 알림음 소리가 서늘한 새벽공기를 가로질러 울렸다. 여름의 아침해는 빠르다. 아까만해도 푸르게 빛을 내던 새벽하늘은 끝언저리부터 붉노랗게 물들어 올라와있었다. 헐레벌떡 달려나가 익숙해질대로 익숙해진 뒷모습을 찾았다. 바로 앞 가로수길에 등나무에 몸을 기대 서 있던 박찬열이 나를 보고 몸을 돌려 걸어왔다.

 

 "왔네."
 "......"
 "진짜 왔어."
 "...박찬열."


  
 비틀대며 날 붙잡는 손길에서 싸한 알콜 향내가 흘러들어왔다. 너 술 마셨어? 몸도 잘 가누지 못하는 애를 붙잡고 놀라 소리쳐 묻는데도 박찬열은 흐물거리며 웃기만 했다. 어떻게 술을 구한 건지 알 도리가 없었지만 얇은 반팔티 하나만 걸치고 온 찬열은 새벽 기온에 감기라도 걸릴 새라 위태해보였다. 입고있던 가디건이라도 벗어줘야겠다고 주섬주섬 한 팔의 소매를 빼려는데 그런 제 손목을 거세게 움켜 잡았다.

 

 "야. 변백현."
 "......"
 "내가, 예전부터 알던 남자애가 있었거든?"

 

 콱 잡은 손목에 가디건이 반쯤 벗겨진 채 옴짝달싹 할 수조차 없어, 그대로 서서 말을 꺼내는 너를 바라보기만 했다. 박찬열은 취기에 오른 얼굴로 계속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어느 날 그 애가 나한테 고백을 한다?"
 "......"
 "처음엔. 당황했어. 생각해봐. 남자가 어떻게 남자를 좋아해."
 "......"
 "근데 이상한게. 거절할 수가 없는거야. 나는 걔랑 관계를 끊고 싶지 않았거든." 

 

 그 애를 정말 좋아했으니까. 그 동안 감춰왔을 너의 진심들이 홧김인지 술술 잘도 흘러나왔다. 웃음 반, 허둥거림 반으로 찬열은 두서없이 이야길 터나갔다. 어지러운 시선이 나를 똑바로 향하지 못하고 계속 엇나갔다.

 

 "그래서. 한참만에 대답을 준비해 갔었어, 나는."
 "......"
 "근데 그 때가 되니까 이미 날 피하는 거야. 눈도 안 마주치고, 말도 안 걸고. 서로 마주칠까 싶으면 새하얗게 질려서 도망가버렸어."

 

 어린 날의 나는 너의 대답이 무서웠다. 승낙이든 거절이든, 겁에 질려서 그 무엇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단지 작은 욕심 하나. 너를 멀리서나마 볼 수 있기라도 한다면 참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용기가 없어서, 불확실한 미래에 대해 오들오들 떨며 나는 박찬열을 피하기만 했었다.

 

 "그 때 생각했어."
 "......"
 "아. 저 애는 이미 마음을 접었구나. 날 모르는 체 하기로 결심했구나."
 "......"
 "그럼 나도, 그 결심을 따라줘야 겠구나..."

 

 어느 새 부터 찬열은 웃고 있지 않았다. 잔뜩 쉰 목소리는 애처롭게 떨리며 울고 있었다. 그에 따라 내 볼에 눈물 한줄기가 따라 흘러내렸다.

 그런게 아니었어. 박찬열. 너에 대한 마음을 접은 게 아니라 너를 잃고 싶지 않아서 그랬어. 찬열아. 나는 이기적이었다. 나 혼자 상처받는게 두려워서, 종국엔 너를 상처입히고 말았다.

 

 "하얗고, 예쁜 애였어."
 "......"
 "어중간하게 대하다가 상처주고 싶지 않아서, 너가 보여도 일부러 모른 척 했었어."
 "......"
 "백현아."
 "......"
 "변백현."

 

 아픈 칼날같은 목소리가 내 이름을 부른다. 내 귓가를 파고든다. 손목을 움켜쥐고있던 커다란 손이 느슨해지더니 천천히 내 등을 감싸안았다. 박찬열의 너른 품 안으로 내가 감겨들어갔다. 서로의 심장이 맞닿아 푸르게 고동친다.

 

 "미안해. 상처줘서... 결국엔 울려버려서 미안해."
 "...흐으..."
 "너무 늦게 알아채서, 미안해..."
 "......"
 "......"
 "......"
 "백현아."
 "...응."
 "나는 너무 멀리서부터 돌아왔어."
 "......"
 "이제야 겨우 만났네. 변백현."

 

 쓴 웃음이 내 머리위로 떨어지며 뜨거운 숨을 내뱉는다. 나른하게 올라갔다 내려가는 너의 가슴에 좀더 깊숙히 파고들었다. 뜨겁지만, 따뜻하다. 절대로 다시는 놓치기 싫어서 너의 등허리께를 꼭 안았다.

 

 "안녕 찬열아."
 "......"
 "만나러 와줘서, 고마워."

 

 출발점이 너무나도 멀고 달랐지만 우리는 결국 같은 곳에 도착했다. 세 번의 여름을 넘어 각자 서로를 찾아 헤매다가 이제서야 서로를 마주본다. 나는 처음으로 너의 앞에서 소리내어 울 수 있게 되었다.

 

 


 

 

 ......

 

 

 


 봄을 지나 여름이 돌아왔다.


 

 

 ...

 


 3년을 지나, 너가 내게 돌아왔다.

 

 

 

 

 

 

 

 

 

 

 

 

---

비록 여름은 다갔지만... 찬백행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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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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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1
언제나 아련하고 달달한 학원물은 옳습니다...ㅠ,ㅠ 서로의 맘을 확인한 찬백이들이 이제 행복하게 사랑할 수 있다니 엉엉 기쁘네요....좋은 글 써 주셔서 감사드려요!
12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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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2
ㅠㅠ 브금하고 내용이 더 어울려서 더 아련해보이는것 같아요 ㅜㅜ 찬백행쇼!!
12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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