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한 친구가 사라졌다. 아마도 근처에 있는 형무소로 잡혀간 것임이 틀림없다.
1913년 3월 9일에 태어나 일본국적을 가지고 이세상을 살아온 지 20년.
경성에서 꽤나 이름있는 조명가게 둘째 아들로, 일제의 억압속에서도 열심히 공부해 경성제국대학에 입학했다.
아직은 새내기지만 나름대로 마음맞는 친구녀석들, 선배들과 함께 대한제국 독립에 힘쓰는 청년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자부한다.
"....아무래도...."
대학 수업을 마치고 빈 강의실에 아무렇게나 앉아있는 선배 한 분이 한숨을 푹 내쉰다.
"박지민이 그자식은 잡혀간 것 같애."
"저희도 마치고 돌아오면서 차마..."
"....민윤기."
"네."
"너가 책임지고 데려와."
"...."
"데려오라고 이자식아!!!!!"
별안간 큰 소리가 울려퍼지더니 다시 정적이 된다. 깊이 숨을 고르더니 다시 천천히 자리에 앉았다.
"박지민이... 살아서 데려와야지..."
"슬퍼할 시간에 빨리 구출작전이나 세워."
"지금은 무리입니다. 제가 어떻게서든 살려서 데려오겠습니다."
"지금 경성 전체가 불바다가 되게 생겼는데 그게 중요해??!"
"....."
나를 붙잡고 날카롭게 소리지르는 김석진 선배의 눈이 참으로 연약해 보였다.
얼마전 아끼던 누이가 일제에 의해 영문도 모른 채 끌려갔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그 후로 항상 표정이 좋지 않았다.
그러다 아끼던 후배 한명이 또 일본에게 빼앗겼다.
지금 많이 힘들고 위험한 사람은 김석진일 것이다.
"죄송합니다..."
고개를 떨구며 그제서야 나를 놓아준다. 그리고 한참동안 창밖을 바라본다.
나도 따라 옆에 앉았다. 어떻게라도 위로해 줘야 할 것 같았다.
가방을 뒤져보니 어제 길가다 받은 알사탕 2개가 있었다.
슬며시 김석진에게 건네니 한참동안 가지고 놀더니 작게 입을 연다.
"....잡아먹는다네."
"누굴..."
"...우리 누나."
".....하..."
떨리는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주었다. 내가 해줄 수 있는 최선의 위로였다.
"일본군들이 데리고 다니다가...식량이 부족하면....크흑..."
까던 사탕을 던지고 다시 눈물을 보인다.
가만히 슬픔을 게워 낼 때까지 그를 지켜보았다.
"난 두명이나 보냈어.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
어젯밤 근처 음식점에서 과하게 마신 술이 탈이었다.
그중 가장 술에 취한 박지민이 일본어와 한국어를 섞어 쓰다가 일본인에게 한글신문을 들키게 되었고, 그길로 곧장 끌려갔던 것이었다.
친구가 끌려간 건 너무나도 비통한 일이지만 한가지 다행스러운 일이 있다면 함께 모여있던 일행들은 아무도 잡혀가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그 일행 중에 나와 석진형도 포함되어 있었고.
"아무 일 없을 겁니다. 두분 모두.."
"내 눈앞에서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게...너무 참을 수가 없더라."
"...."
"그런데...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말하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생살이 찢겨져 나가는 기분이었을 것이다.
일주일 새 사랑하는 누나와 사랑하는 동생을 한꺼번에 잃었다니, 그 슬픔이 짐작이 가지 않았다.
다만 내가 두려운 것은, 너무 큰 충격을 받아서 정신이 나가면 어쩌나 하는 것이었다.
한글을 사랑하고 지키고싶어하는 청년이면 모두 가입할 수 있도록 만든 조직 한글회는 우리학과에서 가장 우수한 학점을 가지고 있는 동시에 진취적이고 열정적인 김남준 선배가 조직했다.
각 지역에서 온 사람들의 사투리와 표준어 등을 기록하였고 일본어는 일체 말하지 않았다.
한글로 시를 쓰고, 소설을 짓고, 신문도 만들었다.
부산에서 온 박지민은 항상 사투리를 쓰면서 자신이 만든 신문을 부적처럼 여겼다.
그만큼 한글과 나라에 애정이 깊은 친구였다.
"내일..."
"...."
"내일 해가 뜨기 전에 데리고 오겠습니다."
"민윤기..."
"내일 다시 뵙겠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울고있는 선배님 앞에서 무릎을 꿇고 큰절을 올렸다.
뜨겁게 달아오르는 눈시울을 애써 참으며 강의실 문을 나선다.
한껏 무거워진 가슴을 쓸어내리며 앞으로 향한다.
'간다.'
*
"윤기야 밖에 손님이 오셔서...가게 좀 봐라~"
"네 어머니. 다녀오세요."
아버지 어머니 모두 가게를 비우는 바람에 조명들과 함께 가게에 남았다.
텅 빈 가게안이 오늘따라 쓸쓸하다.
밤이라서 그런지 좀처럼 손님이 오지 않았다.
지루해지던 차에, 천으로 온몸을 꽁꽁 싸멘 한 여인 하나가 들어온다.
가쁘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고, 많이 지친 기색이었다.
"어서오세요."
이리저리 가게안을 둘러보던 여인은 나를 발견하고는 나에게 다가온다.
바짝 다가오는 그녀에 놀라 한걸음 뒤로 물러서고 말았다.
"하...하아...저기...불알 하나만 주시라우."
"네?"
자기 몸집만한 보따리를 안고서 나에게 말한다.
"보아하니 긴불알은 아닌 것 같드매요?"
"네...? 어떻게 아시나요."
들어오자마자 낯부끄러운 말을 꺼내는 여인 때문에, 손으로 가리기에 바빴다.
"제가 급해서 그런데 불알하나만 주시라우."
"....지금...."
"씨불알정도면 좋겠시유."
"....."
"....."
그녀의 어투에서 경성 위쪽 지방 사람임이 느껴졌다.
그런데 어쩐 일로 경성 까지 와서 이 늦은 시간에 이제 갓 성인이 된 남자를 탐하려 한다는 것인가.
민망하고 부끄러운 마음에 고개를 돌렸다.
"흐흠..."
"하나만 팔아주시면 안됩네까?"
"저...손님 혹시 실례지만...남편되시는 분께서..."
"에...?"
"불임이라던가...어...어험....고..고ㅈ..."
"무슨소리 하시라요? 아직 혼인도 안했습니다요. 그만 나가보겠시우."
"아..저...저기..."
제아무리 모든걸 파는 잡화상이라도 그렇게 진귀한 물건은 팔지 않을 것이다.
아니 그걸 사는 사람이 있을까?
방금 나간 저 여자만 빼고...
한참을 이상한 표정으로 바라보다가 무심코 본 선반에, 비녀 하나가 놓여져 있다.
옥색의 곱고 깨끗한 비녀였다.
"김....여주."
아마도 음탕한 색이 가득한 그 여인은 다시 우리 가게에 찾아올 것만 같았다.
그래서 그 비녀를 서랍장 깊숙한 곳에 넣어두었다.
-
※불알은 북한말로 '전구'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경성은 서울의 옛말입니다!
혼자 망상하다 글쪄옴...8ㅅ8 연재할건데... 냉정하고 솔직하게 어때...?
+제목 아직미정, 이번편은 전지적 윤기시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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