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사랑하지 않는 나의 남편, 최고의 사업 파트너, 김준면.
[11]
퇴원 직후 준면은 나를 데리러 왔다. 낯설만큼 그는 나를 잘 챙기고 있는 중이었다. 미안한 마음, 혹은 의무감 둘 중 하나이거나, 둘 다이거나.
준면은 그날 밤 울며 내게 그 여자의 존재를 고백했지만, 난 그날의 기억을 지워내려고 무던히도 애를 썼다. 그는 술기운으로 그 날의 자신을 말끔히 지워내버린지 오래이니, 둘 중 하나가 갖고 있어봤자 불편한 기억이 될 것만 같아서.
달리는 차 안에서 문득 거즈가 잔뜩 붙어있는 손목을 내려다 보는데 그가 내 손목을 꾹 잡으며 내려놨다. 더이상 회상하지 말라는 무언의 위로였을까. 나는 그대로 허연게 잔뜩 엉겨붙은 손목을 내려놓고 창밖을 주시하기 시작했다. 꽃이 드문드문 고개를 빼꼼 내밀고 곧 제게 다가올 봄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바람이 쌩쌩 부니, 꽃샘추위가 심하긴 한가보다.
*
잠이 들어 감각이 무뎌진만큼 시간에 대한 개념은 멀어진 지 오래였다. 찌뿌둥한 몸에 몇 시간은 지난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눈을 뜨고 주위를 살피니, 해는 어둑어둑 저물 준비를 하고 있었고, 노란 하늘의 거울이 된 바다가 넓게 펼쳐진 진경을 보아하니, 적어도 집으로 향하는 길은 아니라는 생각이 확고해졌다. 나는 그저 아무 말 없이 휙휙 뒤로 지나가버리는 풍경들을 살폈다.
어느 지점에서 차의 시동을 끄고 차를 멈췄다. 고개를 돌려 그를 보니 가만히 나와 같이 예쁘게 저물어가는 노을을 살피는 중이다.
"좀 걸을래?"
그의 제안에 나는 아무 말 없이 안전벨트를 풀고 차에서 내렸다. 평소같으면 왜 마음대로 이런 곳에 온 것이냐고 화를 냈을 것이 분명했다.
처음이다. 그와 손을 붙잡고 어디를 간다는 것이, 내겐 참 생소하고 어색했다. 처음엔 걸음이 느리면 내 손을 놓고 가는 것은 아닐까 불안한 마음에 빠른 걸음을 그에게 맞추려 애썼지만, 그런 내 모습을 눈치 챈 그가 걸음 속도를 늦춰주는 덕에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안 놓을게."
"…."
"걱정 하지마."
우리는 손을 꼭 붙잡고 아주 느리게 가을인지 봄인지 경계가 모호한 그 계절의 바닷가를 거닐었다. 그의 손은 나와 반대로 참 따뜻하고 컸다.
우리는 바다 주위 벤치에 앉아 맥주를 마셨다.
우린 2년이라는 분명 적지 않은 시간 동안 함께 했는데, 우리가 동행하는 모든 광경은 내게 새롭고 낯설게 다가온다.
"있잖아,"
"…"
"OOO."
분명히 평안하고 고요한 마음이, 다시금 울렁거리며 파도를 치기 시작한다.
"내가 너 이렇게 처음 부르나?"
처음이지, 그렇게 나직하고 포근한 목소리로 제 연인 부르듯 제대로 내 이름을 불러준 적이 없었으니까.
당연했겠지, 너한테 난 언제나 죽은 김은재였을 테니.
"사실 나 지금도 니 얼굴이 겹쳐 보이거든. 걔랑."
"…."
"미안한데 어쩔 수가 없어, 불가항력이라."
준면의 때아닌 농담에 나도 모르게 비식비식 웃음이 터져 나왔다. 힘도 빠졌다. 난 여태 그날 밤의 일을 모르는척 하느라 혼이 났는데, 당신은 이렇게 취기를 빌미로 내가 꾹 눌러담고 있던 그녀의 말을 아무렇지 않게 꺼내는구나. 그래도 다행이었다. 적어도 무거워서 놓칠 것만 같은 그녀의 존재를 당신이 이렇게라도 끄집어내 주니.
"그 애가 아팠을 땐 항상 너도 아팠었어. 둘 다 허약한 체질이었으니까."
"…"
"근데 하루는 있잖아, 네가 심한 감기로 앓아 누웠던 적이 있었어. 기억 나?"
나는 무심히 두 캔째 비워낸 맥주캔을 쭈그러뜨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남편 노릇 하겠다고 어디가서 좋다는 약은 잔뜩 챙겨다 놓고, 손수 죽까지 쒀놓고 열 내리기까지 기다리고 있는데, 갑자기 그애한테서 전화가 왔어."
"…"
"많이 아프대. 좀 와 달래. 그래서 한걸음에 달려갔지, 걔네 집으로. 그리고 딱 문을 열고 들어갔는데, 애가 픽 고꾸라져있는 거야."
"…"
"그리고 나한테 제일 먼저 한 말이 그거였어. 오빠 미워."
"…"
"하는 수 없이 업고 병원으로 데려다 놓고, 이것 저것 하다 정신차려보니 어느세 밤이 된 거야. 또 정신없이 집으로 갔어.
근데 집에 오자마자 니가 내 얼굴을 보면서 제일 먼저 했던 말이 뭔 줄 알아?
오빠 고마워. 그랬어 니가 나한테."
"…"
"등신같이 지 남편이 딴 여자 챙기러 갔다 온 사이에 혼자 죽 챙겨 먹고, 약 챙겨 먹고 다 하고, 나한테 고맙다고 그랬어. 넌 나한테 그랬던 애였어."
"…"
"너 그렇게 착한 애였는데, 내가 이렇게 만들었어, 널."
우린 까마득히 긴 이야기와 함께 어딘가로 한참 걷기 시작했다.
"그 애가 죽고 난 뒤에 옷을 갈아입고 집에 도착을 했는데, 딱 보니까 죽은 김은재가 내 앞에 그대로 서 있는거야."
"…"
"근데 자세히 보니까, 아니야, 은재가 아니고 너야."
"…"
"너한테 미친놈처럼 화를 냈어."
나는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천천히 과거를 회상하기도 했다. 그의 말을 듣고 더듬더듬 기억의 조각을 끼워맞춰 보면, 어딘가 이상하다고 생각되었던 그의 모든 행동들이 이해가 갔다. 우리가 왜 그렇게 심하게 다퉜고, 어떻게 이렇게까지 멀어지게 되었는지까지도.
그런데 자꾸만 이상하게, 그와 대화를 이어나갈수록…, 2년 전 그 때의 그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술기운 때문인지, 아니면 정말로 그가 점차 자신의 모습을 되찾고 있는 것인지는 몰라도, 내 눈엔 내가 그 시절 사랑했던 '준면 오빠'의 모습만이 그득했다.
까득거리며 맥주 캔을 거의 다 구겼을 때였다. 술기운에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열심히 그의 걸음을 따라 밟았다. 다리가 아파 올 쯤이었던가, 그는 한 납골당으로 향했다.
무언가에 홀린 듯 어느 납골함에 멈춰 서는 준면의 시선을 좇았다.
납골함에 비친 그의 눈동자와 그녀의 눈동자가 맞딱드린다. 그는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납골함을 향해 미세하게 떨리는 손을 조심스레 가져간다.
그가 그녀의 사진 부근을 어루만진다. 그 슬픈 손짓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나는 차고 있던 목걸이를 소중하게 그녀의 납골함으로 가져갔다.
김준면이 아름다운 선물을 남기고 싶었던 것은, 나를 통해 보이던 '김은재' 였으니까.
새빨개진 눈을 한 그가 나를 숨이 막히도록 꽉 안았다. 나는 눈을 질끈 감고 울음을 토해냈다. 눈물의 의미가 무엇인지 나도 알 수 없었다. 그녀를 통한 애도인지, 준면을 향한 연민이었는지, 그의 옷깃을 꽉 붙잡고 울었다.
마음이 새까맣게 타들어간다. 식지 않은 잿더미를 마신 듯 가슴이 쓰라리다.
나는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그는 아직도 그녀를 아주아주 많이 사랑한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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