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인반수 권순영 키우기!
W. 권순돌
나 왔어, 순영… 구두를 벗고 거실에 들어서기 무섭게 발등에 살포시 내려앉는 깃털에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둥실둥실 떠다니는 오리털, 하얗게 뒤덮인 거실, 그리고… 정신 못차리고 아직까지 방석만 물어뜯고 있는 저 지랄맞은 개새끼.
" 권순영! "
" …주인? "
" 너…이게 무슨, 아, 진짜… "
" 아니, 오늘은 왜이렇게 일찍왔, "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화에 휙, 고개를 돌려 권순영을 쳐다보자 금새 다시 개새끼로 변해 얌전히 입을 다문다. 내가 미쳐. 이마를 짚고 가방을 내려놓기 무섭게 내 옆으로 다가온 권순영이 제가 가장 좋아하는 방석위로 얌전히 올라 앉는다. 너 이따보자.
*
" 너 요즘 또 왜그래? "
" ……킁. "
" 뭐 힘든일 있어? 힘든일 있으면 말이라도 해주던가. 이걸 이렇게 다 물어뜯으면 어쩌자는건데? "
이미 권순영의 이빨에 온통 뜯겨버린 방석을 봉투에 담고나서 한숨을 내쉬었다. 저봐라, 저봐. 잔소리하는 내 목소리에 몸을 쭉 뻗고 누워 제 두발 사이로 얼굴을 묻는다. 살랑거리는 꼬리를 쳐다보다가 고개를 젓고 봉투를 묶어놓고 쇼파에 앉았다. 혼나면서도 끼부리지, 아주. 그러자 귀신같이 눈치챈 권순영이 몸을 벌떡 일으키며 자세를 바꿔 내 허벅지의에 제 얼굴을 올려놓고 나를 빤히 올려다본다. 뭐, 쳐다보면 다 해결 돼?
" 아, 잘못했어. "
" 진짜 이러는거 보면 아직도 어른되긴 멀었어. "
" 나 인간나이로 21살이거든? 어린애 취급 좀 그만해. "
" 너가 이러니까 그렇지. "
제 애교에도 쉽게 넘어오지 않는 내 모습에 결국 포기한듯 모습을 바꾼 권순영이 쿠션을 껴안으며 말했다. 내가 뭐. 평소에 자길 어린 강아지 취급하는걸 가장 싫어하는걸 알기에 그냥 입을 다물었다. 아무튼… 다신 이러지 마, 알겠지?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인 권순영이 기지개를 피며 말했다. 회사는 어때?
" 항상 똑같지 뭐… 니 생각처럼 그렇게 재밌는곳은 아니야. "
" 그런가? 뭐, 주인얼굴보면 그런거 같기도해. "
익숙하게 내 허벅지를 베고 리모콘을 쥔 권순영의 말에 고개를 갸웃했다. 내 얼굴이 왜? 그냥, 항상 힘들어보여서. 회사에 나같은 사람만 있으면 주인 얼굴이 좀 나아질텐데. 그치? 개구지게 웃으며 나를 올려다보는 권순영의 얼굴에 웃음이 터졌다. 너 오면 더 힘들꺼같은데? 너가 종이 다 물어 뜯어놀꺼 같단말이야. 베시시 웃는 내 얼굴에 금새 몸을 일으킨 권순영이 말했다. 아 미안하다니까? 그만 놀려.
" 아, 재밌다. "
" 주인아. "
" 왜? "
" 배고파. "
" 밥먹을래? "
" 응. "
슬쩍, 시간을 보자 점심시간을 살짝 지난 2시이다. 그러고보니, 오늘은 왜이렇게 일찍왔어? 앞치마를 두른 내 뒤를 졸졸 따라온 권순영이 식탁에 앉아 턱을 괴며 물었다. 그냥, 오늘은 부장님이 바쁘셔서 조기퇴근하라고 하셨어.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인 권순영이 손가락으로 햄을 가리키며 물었다. 나 햄 많이 줘. 웃기시네, 다 안넣을꺼거든? 탕탕, 당근을 써는 내 손을 바라본 권순영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당근은 왜 넣어?
" 왜 넣긴, 너 건강하라고! "
" 나 완전 건강한데? "
" 더 건강해지고 싶다고? "
" 아.. 진짜. "
훗, 그래봤자 니가 내 말을 이길수 있을꺼같아? 착잡하다는듯한 표정으로 당근을 볶는 나를 바라본 권순영이 삐죽, 입을 내밀었다. 그럼 햄 한통 다 넣어줘. 뭐? 안돼. 아 왜! 짜서 못먹어! 너 짜게 먹으면 안좋은거 몰라?! 삐삐죽. 아주 지구를 뚫고 갈정도로 튀어나온 입에 한숨을 쉬고 결국 햄을 다 썰어 몽땅 넣었다. 내가 진짜.. 어휴. 그런 내 행동에 꾸러기같은 웃음을 지은 권순영이 이를 들어내며 해맑게 웃었다. 아싸.
순영아, 밥통 열어봐. 내 말에 지익, 의자를 끌고 내 옆으로 걸어 온 권순영이 밥통을 열었다. 밥 별로 없어. 그래? 잘됐네. 나 밥 생각없어. 내 말에 인상을 찌푸린 권순영이 말했다. 그래서, 주인 밥 안먹게? 응. 무덤덤한 내말에 맘에 안든다는 표정을 지은 권순영이 밥통을 싹싹 긁었다.
오랜만에 같이먹는데 밥이없어. 투덜대는 목소리에 피식, 웃자 뭘 웃냐는듯 나를 한번 쳐다본다. 너 귀여워서 웃었어. 누가 누구보고 귀엽다고… 어우 저 징징이. 키도 크면서 옆에서 계속 중얼거리는 권순영에 정신이 사나워 결국 먼저 의자에 앉혔다. 너 기다리고 있어.
" 권순영, 편식하면 안된다니까? "
" 아 나 당근 싫다니까? "
" 왜? 볶음밥은 당근이랑 같이 먹어야 더 맛있어. 얼른. "
" 아 싫어. "
" ……. "
다 만든 볶음밥을 올려놓자 슬쩍, 인상을 찡그린 권순영이 고개를 저었다. 나 당근 안먹어. 그 하는짓이 꼭 세살배기 어린아이같아서 한숨을 쉬었다. 좋아, 이렇게 나온다 이거지? 내가 진짜 권순영 당근 먹이려고 연기를 다하네.
" 이거… 내가 진짜 너 먹여주고 싶어서 넣은건데…. "
" ……. "
" 나는… 너가 먹어줄줄 알고 그랬어, 미안해… 다시 만들어줄께. "
" ……. "
툭, 접시위로 숟가락을 내려놓고 눈꼬리를 축 내렸다. 아, 물론 입꼬리도. 그런 내 행동에 제가 이겼다는듯 의기양양하게 미소짓고 고개를 든 권순영이 내 표정을 보고 얼굴이 서서히 굳어졌다. 사실 이 말에 거짓말은 없었다. 진짜 나는 너 건강하게 키우고 싶다고 이 개자식아! 내 침울한 얼굴에 입을 벌리고 나와 당근을 번갈아 본 권순영이 입을 앙 다물었다. 어쭈, 이래도?
마지막 시도로 볶음밥이 담긴 후라이팬을 양손으로 붙잡고 일어나 다시 싱크대로 걸음을 옮기자 급하게 의자 끄는 소리가 들린다. 쿵쾅거리며 달려온 권순영이 내 팔뚝을 잡아 확, 제 쪽으로 돌렸다. 나 먹을께. 어라…? 진지해진 권순영의 얼굴에 오히려 내가 당황해 입을 벌렸다.
" 그러니까, "
" ……어, 어어. "
" 그런 표정 짓지마. "
" ……. "
" 내가 미안해. "
권순영의 말을 끝으로 정적이 흐르는 주방에 입을 다물었다. 그런 내 얼굴을 한번 쳐다본 권순영이 내 손에 들려있던 후라이팬을 들고 가 다시 자리에 앉았다. 숟가락을 집고 복스럽게 먹는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새삼스럽게 고마워졌다. 항상 져주는건 권순영쪽이었으니까. 그 모습에 쪼르르 달려가 나도 의자에 앉았다. 안먹어? 내게 눈을 올려 한번 쳐다본 권순영이 우물거리며 볶음밥을 씹었다.
" 우리 순영이 잘먹네. "
" 뭐야, 새삼스럽게? "
" 그냥, 이제 진짜 다 컸구나 싶어서. "
" 또 그 얘기지? 나 진짜 다 컸다니까. 나도 성인이야. "
싹싹, 마지막 밥톨까지 긁어먹은 권순영이 제 배를 통통 치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진짜 다 먹었네. 그 많은 양을 먹어치운 권순영을 기특하게 바라보다가 싱크대에 접시와 후라이팬을 집어넣었다. 밥까지 차려줬으니 이제 좀 씻어야겠다. 권순영, 밥먹자마자 누우면 소화안돼! 앉아서 봐, 알겠지? 쇼파에 누워서 티비를 보고있는 권순영에게 한마디하고 방안으로 들어섰다. 하여간… 똥강아지.
권순영 시점外
주인이 방안으로 들어가는 소리를 듣고 나서야 몸을 일으켰다. 억지로 당근을 씹어삼켰더니 속이 더부룩한게 영 찝찝하다. 명치께를 손으로 툭툭치며 주방으로 다가가 사이다 한모금을 마셨다. 이거 마시는거 봤으면 또 난리났겠지? 권순영, 너 그런거 먹으면 이빨 다썩는다? 몸에 안좋으니까 먹지말라고오! 제 머릿속에서 들리는듯한 목소리와 억울한듯한 표정에 순영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사실 그 당근은 안먹어도 그만이었다. 왜냐면 주인이 억지로 먹이고 싶어서 그랬다는걸 알고 있었으니까. 근데, 참 이상한것이, 다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인의 그런 표정을 막상 마주하니까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랄까. 아무튼, 손끝이 저릿저릿한게 괜히 큰 잘못을 저지른 기분이었다. 그래서 주인을 더 웃게 해주고 싶었고.
" 아, 진짜 당근은 나랑 안맞는거 같아. "
주인잘때 확, 버려버리던가 해야겠어. 아직도 괜히 그 이상한 느낌이 생생해 손끝을 어루만지며 빠르게 쇼파위로 올라갔다. 지이잉- 앉기 무섭게 울리는 진동소리에 주변을 흝었다. 아, 주인 핸드폰. 가방에서 핸드폰을 꺼내 주인의 방문을 두드렸다. 주인, 이거 전화왔어. 쫑긋, 귀를 세워도 들리지 않는 대답에 똑똑, 노크를 해봤지만 대답이 없다. 이상하네.
" 주인? "
함부러 방에 들어가는건 예의가 아니란걸 알기에 고개만 내밀어 방을 살펴보자, 화장실불이 켜져있다. 아, 화장실에 있구나. 그냥 화장대에 올려놓고 가야겠다 싶어 방안으로 들어서 핸드폰을 내려놓으려 팔을 내리기 무섭게 덜컥, 하고 열리는 화장실문에 고개를 돌렸다. 주인, 이거 전화왔,
" ……. "
" ……어, 어어? 그, 거기 냅둬! "
몽글몽글, 수증기로 뒤덮인 뜨거운 김이 발바닥을 감싸안았다. 사워가운을 두른채 젖은 머리의 물기를 손으로 대충 어루만지며 내게 말하는 주인의 목소리에 황급히 핸드폰을내려놓고 방안을 박차고 나왔다.
" …헐. "
쇼파에 앉아 멍하니 손바닥으로 얼굴을 감쌌다. 주인은 씻어도 예쁘구나. 괜히 죄를 저지른 기분에 침을 삼켰다. 볼이 예쁜 분홍색으로 물든 주인의 얼굴이 자꾸 생각났다. 그래. 이건 아까 사이다를 주인 몰래 먹은탓일꺼야, 라고 생각하며 새삼스럽게 쿵쿵거리는 가슴께를 손바닥으로 눌렀다. 주인이 나오면 실토해야겠어. 그러면 좀 나아지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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