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페라는 커피에 적신 비스킷과 가나슈를 층층이 쌓은 후 초콜릿으로 코팅한 케이크다 이것의 이름이 오페라가 된 이유는 확실치 않은데 케이크를 개발한 제과점에 자주 들렀던 오페라의 무용수들에게 헌정하기 위해서거나 그 모양이 오페라하우스의 무대를 닮았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추정될 뿐이라고 한다 하지만 케이크를 처음 봤을 때 내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오페라하우스의 무대라기보다는 피아노였다 매끈하고 우아한 자태를 뽐내는 갈색의 피아노 겉에선 그저 커다란 직사각형처럼 보이지만 뚜껑을 열면 하얀 건반과 검은 건반이 줄지어 층을 이루며 반짝이는 그런 피아노 말이다
어린 시절 내게도 그런 피아노가 있었다 나는 피아노를 무척 좋아했다 동네의 피아노 학원에서 선생님이 깎아주던 연필로 정해진 횟수만큼 연습을 마칠 때마다 사과 그림에 색칠하던 기억이나 거실에 놓여 있던 피아노 의자 안에 악보와 책 과자 같은 것들을 숨겨놓고는 비밀 창고라고 여겼던 기억들 음악에 남다른 재능이 있는 아이는 아니었고 그 반대에 가까웠는데 피아노를 왜 그렇게 좋아했는지는 모르겠다 피아노가 내 인생에서 사라진 것은 열네 살 때의 일이다 어느 날 집으로 돌아와보니 피아노가 사라져 있었다 평수가 절반이나 줄어든 집으로 이사를 가야 하는 상황에서 피아노가 처치 곤란해졌기 때문에 팔아버렸다는 설명을 추후에 들었으나 예고나 조짐도 없이 맞닥뜨리게 된 이별 앞에서 오랜 친구를 잃은 듯한 상실감을 느꼈던 기억은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대학생이 된 이후 음대생을 만나 피아노를 잠깐 다시 배운 적이 있다 음대 연습실에 몰래 숨어서 피아노를 배웠다 오랜만에 피아노 건반을 눌렀을 때의 기쁨이란...... 하지만 나는 어느새 양손으로 피아노 치는 법을 잊은 사람이 되어 있었다 열심히 연습하면 기억이 되살아날 수도 있었겠지만 나는 금세 포기를 하고 말았다 전공생들이 만들어내는 화려한 음색 앞에서 나의 더듬거림이 부끄러웠기 때문일 것이다
피아노에 대한 추억을 불러낸 것은 〈건반 위의 철학자>라는 책 때문이다 철학 교수이자 아마추어 피아니스트인 저자는 한 시대를 대변하는 철학자들이며 글을 통해서는 전위적인 예술에 관한 관심을 드러내왔던 사르트르, 니체, 바르트가 일상 속에서는 낭만주의 음악을 즐겼다는 아이러니에 주목한다 저마다의 방식으로 피아노를 아꼈고 피아노를 통해 사유했던 철학자들
그들이 사랑했다는 슈만과 쇼팽의 피아노 곡을 번갈아 들으며 책장을 넘긴다 집 안엔 피아노 소리만 가득하고 책을 읽다가 고개를 들고 옆을 바라보면 현관 위에 난 창으로 하늘이 보인다 노을이 지고 있는지 하늘은 고개를 들 때마다 점점 더 분홍색으로 물들고 있다 해 질 녘은 참으로 이상한 시간이라 매번 나를 꼼짝없이 그리움 앞에 붙잡아두지만 피아노 선율마저 더해지면 나는 속수무책이 된다
[피아노 소리는 한동안 잊고 살았던 과거의 추억을 재개시키며, 소리의 기억은 과거로서의 현재, 영원히 잊혀질 과거가 되기 전에 추억으로 채색된 현재를 만들어낸다. 바르트에 따르면 시간을 구성하는 매 순간은 ‘다가올 과거’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바르트에게 피아노는 노스탤지어 공장 같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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