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끝끝내 포기하지 않던 주장이 있었다. 너와 내 사이에 달라진건 없다. 단지 달라진건 서로에 대한 귀찮음이 조금 늘었을뿐이라고. 이 바보같은 주장은 나 스스로를 세뇌시키기 충분했고 기어코 끝장을 보고야 그 주장을 포기할 수 있었다. 구질구질하게 연을 이어와 알게된건 우리 사이에 달라진건 너무나 많았고 되돌리기엔 너무 많이 와버렸다는것이다. 내가 지금까지 해온 짓은 다 꺼진불씨를 살려보겠다고 부채질을 하고있는 격이었다.
" 김여주 "
" 왜 나 잘거야. "
" 난 네 목소리 더 듣고 싶은데. "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좋은 목소리에 가슴 간질간질거리던 시절이 있었다. 요즈 흔히들 말하는 썸이란걸 타던 우리의 모습을 되뇌어보니 남들 하는건 다 했었던것같다. 침대에 멀뚱히 누워 옆에 놓여있는 핸드폰을 들어 의미없이 화면을 띄었다 껏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핸드폰이 시계란 말을 몸소 실천이라도 하고 있듯 그 흔한 카톡 한 번이 울리지 않는다. 핸드폰을 침대에 내팽겨치고 다리를 번갈아 들었다 놓으며 침대를 마구잡이로 쳤다. 침대에서 아무리 데굴거려도 괘씸함은 사라지지 않는다. 정확히 어제 저녁 11시경 전정국은 달랑 카톡 하나 남겨놓고 오늘 오후4시까지 또 부재다.
- 나 오늘 연락 안될지도 몰라. 먼저 자.
안될지도 몰라 라는 전정국의 말은 뭐하는데? 라고 보낸 나의 답문을 씹음으로 안될지도 몰라가 안돼 라는 뜻이란걸 확인시켜주었다. 보나마나 뻔했다. 또 그 친구들이랑 어울려서 마셔라 부어라 하고 있는 꼴이 안봐도 눈에 훤하다. 같은 고등학교에서 같은 대학 같은 과까지 진학해버린 우리는 입학때부터 우리 대학교 명물이었다. 이 시대의 로맨티스트 커플, 대학까지 함께한 사랑꾼 커플 별별 수식어가 다 따라다녔다. 이 이유때문에 전정국이 연락이 안되어도 전정국을 찾을 방법은 많았다. 전정국이 어디서 술을 마시고 있다더라 라는 사실은 어렵지않게 알 수 있었다. 처음엔 술집을 따라가 왜 연락을 안받느냐, 뭐하는거냐 따지기도 많이 했지만 더이상은 나도 지쳤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나갈 준비를 하고 전정국 집을 향해갔다. 익숙한 현관을 지나 도어락 비밀번호를 찍고 문을 여니 침대에 널부러져 있는 전정국이 눈에 보였다. 이불에 돌돌 말려있는 꼴이 웃길만도 한데 웃음이 나오진 않는다. 침대 앞에 쪼그리고 앉아 전정국의 어깨를 잡고 흔들어 깨웠다.
" 야 전정국. 일어나봐. "
" ... "
" 일어나보라니까? "
" ...아 왜 또. "
귀찮다는듯이 눈을 반쯤 뜨고 겨우 말을 이어나가는 전정국이었다.
" 나 물 좀. "
" 니가 떠 마셔. "
" 또 왜이렇게 까칠할까. "
" 네가 까칠하게 만들잖아. 어제 누구랑 술 마셨어. "
" 호석이. "
" 정호석 걔는 존나 한가하나보다? "
" 아 호석이한테 뭐라 하지마 또. 정호석이 나때문에 너랑 서먹해졌다고 지랄한단 말이야. "
" 내가 지금 너한테 지랄하는건 안 보이냐? "
그제서야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전정국은 물병을 열어 물 한잔을 벌컥벌컥 마시더니 하품을 한번 쩍 해보이고는 화장실로 들어가 씻기 시작했다. 물 소리를 들으며 마음을 가라 앉히자고 아무리 다짐을 해봐도 분한마음은 쉽게 가라앉지가않는다. 전정국은 수건으로 머리를 탈탈 털며 화장실에서 나왔다. 그런 전정국을 보는 내 눈초리가 분명 따가울만도 한데 아무렇지 않게 핸드폰을 보고있는다. 핸드폰을 저렇게 쥐고 있는애가 내 문자엔 답이 없다. 참 아이러니하다.
" 으, 속 쓰려. 밥 먹으러 가자. "
" 나 밥 먹고 왔어. "
" 그럼 나 먹는거 봐. 나가자. "
미친놈이.. 또 지 할 말만 하고 쏙 나간다. 전정국을 따라 나가니 저만치 앞에 서서 걷는 전정국이 보인다. 제몸에 맞지 않는 큰 후드집업을 걸치고 슬리퍼를 질질 끌고 걸어가는 뒷모습을 보며 따라갔다. 전정국은 해장국집에 앉아 익숙한듯 해장국 한그릇을 시켰다. 전정국은 해장국을 시키고 또 다시 핸드폰을 만지작거렸고 우리 둘 사이엔 정적만이 흐를뿐이었다. 해장국이 나오고 해장국을 열심히 먹는 전정국을 빤히 쳐다봤다.
" 아, 체하겠네. 왜 그렇게 빤히 쳐다봐. 잘생긴사람 하루 이틀 보는거 아니잖아. "
참 행동 하나하나에서 달라진게 너무 눈에 훤히 보인다. 안 쳐다볼테니까 먹어 라고 말한뒤 나도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나도 모르게 앨범 사진을 훑어 보며 우리가 다정하게 사진 한장 찍었던게 언제였던지를 찾고 있었다. 아무리 눈 씻고 찾아도 보이지 않는 사진에 아예 스크롤을 바닥으로 내리니 사진이 보이기 시작했다. 뭐가 그렇게 재밌는지 활짝 웃고있는 전정국과 내 모습이 보인다. 무슨 상황이었는지는 너무도 명확히 그려지는 와중에 어떤 기분이었는지는 가늠이 되지않는다. 최근에 느껴보지 못한 생소한 감정이라 그런지 아무리 되뇌어봐도 모르겠다. 그렇게 핸드폰을 내려놓고 내 앞에 앉아있는 전정국을 보았다.
" 전정국 우리 데이트하자. "
" 지금 데이트 하고 있잖아. "
" 아니, 오랜만에 영화도 보고 돌아다니고 그런거."
전정국은 바쁘게 움직이던 숟가락질을 멈추고 날 쳐다봤다. 마치 그 눈빛은 갑자기 또 왜이래 였지만 난 확인할게 있었다.
" 그러든가. 영화 뭐 볼지 골라놔. "
벌써부터 내 앞에서 수줍고 뭐든 처음해보는 설렘에 들떠있던 소년 전정국과는 많이 다른 전정국이었지만 몇년동안 그짓을 하니 귀찮을 법도 하지라며 애써 넘겼다. 예전과 비교하지 않으려 아무리 애써봐도 자꾸만 겹쳐오는 잔상에 마음이 좋지않았다. 전정국이 밥을 다 먹고 식당을 나섰다. 전정국은 기지개를 펴며 나보고 어떻게 할거냐는 눈짓을 해왔다.
" 나 집 갈게. 내일 늦지말고 나와. "
" 아 귀찮은데. 꼭 영화관 가야 돼? 집에서 보면 안돼? "
" 그냥 내일 하루만. "
" 어? 분명히 너 입으로 내일 하루만이라 그랬다? "
" 어. 내일 하루만. "
전정국은 기어이 손으로 약속 복사 확인도장까지 찍어냈다.
" 잘 가 . 김여주. "
" 아 괜찮다니까. 아직 그렇게 안 어두워. "
" 씁, 큰일 날 소리하네. 어둡고 안 어둡고가 중요한게 아니야. 내가 어떻게 널 혼자 보내. "
전정국은 꽤나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손을 흔들어 보였다. 뭐가 그렇게 만족스러운지는 알 턱이 없다. 아니 애써 외면하고 있는걸지도 모른다. 그래 내일 하루다. 내일 하루면 나도 마음정리 완벽하게 할 수 있을것같다. 누가봐도 명백한 상황을 나 혼자 애매하다고 줄다리기 하는건지는 내일이면 더욱 확실해진다. 4년간의 연애의 종지부는 전정국 네가 쥐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