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여주씨.”
“네, 팀장님?”
“오늘까지 끝내라고 한 자료 정리 다 했습니까?”
“아 네, 제가 안 그래도,”
들고 제 방으로 오세요. 내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자기 할말만 찍 내뱉고 매정하게 걸어가는 등 뒤로 찬바람이 쌩쌩 불었다. 평소보다 눈썹도 화가 잔뜩 난 각도를 잡고 있는게,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이태용은 지금 화가 나있다. 쾅! 하고 닫히는 팀장실 문 소리가 확신을 줬다. 뭐야, 아까 아침에 잠깐 통화할 땐 나긋나긋 괜찮았는데? 무슨 일인지 내심 걱정이 들면서도, 한숨이 절로 나왔다.
책상 위에 올려두었던 자료더미들을 손에 쥐고 팀장실로 향했다. 팀원들의 눈빛이 일제히 내게 쏠렸다.
“왜요..그렇게 보지 마세요..”
내가 울상을 짓자, 다들 작은 목소리로 화이팅이란다. 저러니까 나 완전 성난 늑대한테 잡아 먹히러 가는 양 같잖아…T^T 아, 어제 회식 때 마신 술도 아직 덜 깼는데. 머리가 지끈 거렸지만, 늦게 가면 또 한소리 들을까봐 얼른 발걸음을 옮겼다. 공과 사가 철저한 사람이라 회사 안에선 아무리 여자친구라도 칼같은 존댓말에 봐주고 그런게 없더라. 누가 아침부터 우리 이팀장 화나게 했냐!!!!!!!!!!! 도대체 누가!!!!!!!!!!!
♡^♡
“뭡니까, 이거.”
“…네?”
“제가 이걸 오는 길에 확인해서 설명이 좀 필요합니다.”
“...ㅇㅁㅇ..”
시ㅎ바, 이팀장 화나게 한 사람 아무래도 저 같습니다만?ㅎ 자료 정리한거 갖고 오라더니 정작 두 손으로 떠안겨준 자료는 펴보지도 않고 제 핸드폰을 내 앞으로 내미는걸 보면 그랬다. 날 바라보는 눈빛에 다정함이라곤 눈꼽만큼도 보이지 않았다. 아니, 도대체 내가 뭘 그렇게 잘 못했는데? 뭔데 설명이 필요한건데? 쭈뼛쭈뼛 시선을 내려 환하게 켜져있는 핸드폰 화면을 확인했다.
“….”
“….”
뭐야, 그냥 우리팀 단톡방이구만. 난 여기서 말도 잘 안 하는데? 이게 뭐 어쨌냐는 듯 다시 이태용에게 시선을 돌리고 싶었지만, 앞에서 느껴지는 매서운 시선이 나를 뚫어버릴 것 같아 그러질 못하고 화면에만 눈을 박았다. 근데 계속 보다보니 그…대화 내용이 뭔가 굉장히 구리다…?
“어제 회식 끝나고 정재현씨가 데려다 줬습니까?”
놀란 마음에 재빨리 고개를 들었다. 이태용의 눈이 매섭게 빛났다. 그 눈빛에 목구멍이 꾹 막혀 아무 대답도 못하고 곰곰이 어제 회식이 끝난 후를 떠올렸다. 분명 선배들이 주시는 술 다 받아 먹은 것 까진 기억이 나는데, 그 후가 아무리 생각해도 생각이 안 난다. 내가 정재현 등에 업혀서 집에 갔다고? 정재현 그 자식이 나를 집에 데려다 줬다고? 지 전여친을 아무렇지도 않게? 이건 내가 더 뒷목 잡아야 할 일인데? 아, 그래서 오늘 아침에 김동영이 나보고 미친년이라 한건가? 짧게 생각을 하며 미간을 좁혔다.
“술 취해서, 정재현 등에 업혀서 집 갔냐고, 여주야.”
나 어떡해…?후^후
♡^♡
내가 아무말도 못하고 멍하니 서있기만 하자, 이태용은 깊은 한숨과 동시에 나가보라며 나를 내보냈다. 자리에 돌아와 다른 팀원들 몰래 카톡창을 열었다. 어차피 지금 다시 들어가서 미안하다고 하지도 못할거 뻔하고, 카톡이라도 보내봐야지 했는데….
…내가 저딴 말을 지껄이고 딴 남자 등판에 업혔구나. 내가 잘못했네. 김동영 그 시끼가 요즘 쓰는 말로 표현하자면, 오열각인가(폭풍)(오열).
몇달 전 정재현, aka 개같은 전남친이 우리 회사에 신입 사원으로 입사하고 하필이면 우리 팀으로 들어온 날, 나는 한창 비밀연애 중이던 이태용에게 숨김 없이 모든걸 말했다. 나중에 괜히 오해할 수 있는 상황이 생길 수도 있는거고, 말을 해야 뭔가 내 입장이 조금 더 편해질 것 같아서였다.
“이번에 들어온 신입 말이에요, 팀장님.”
“응.”
“사실 제 전 남자친구에요.”
그때 이태용은, 뭐랄까. 조금 놀랐고, 조금 거슬릴 것 같지만 크게 상관은 없다는 듯한 반응을 보였었다.
“괜찮아.”
“정말요?”
“안 뺏겨.”
주장이 아주 확고했지. 문득 그 때 생각이 떠올라 세모눈을 하고 쩌어기 건너편 끄트머리 책상에 앉아있는 정재현을 노려봤다. 이게 다 저 자식 때문이야. 저 자식이 날 업어가지만 않았어도! 이런 내 속도 모르고 열심히 타이핑을 하고 있는 정재현을 쭉 쏘아보다, 시선을 거두곤 다시 똑바로 핸드폰을 잡았다.
조심스럽게 불러봤지만 읽지도 않는다.
Fail…☆★
2차시도.
Fail…☆★
3차시도.
Fail…☆★
결국 다시 한번 머리를 굴리다 평소 삐친 태용을 다룰 때 사용하던 스킬을 써보았다.
근데 이렇게 불러도 안 읽는거다. 말도 안돼. 솔직히 이건 성공할 줄 알았다. 아니 내가 태용 오빠라고, 어? 그렇게 불러달라 할 때 안불러 주던거 이렇게 한번 불러 봤는데도 반응이 없다 이거야? 어? 핸드폰을 잡은 손을 부들부들 거리다 결국 홀더키를 눌렀다. 이제 이 스킬도 소용 없다 이건가. 그 정도로 화난건가. 으앙, 진짜 어떡하지. 금방 울상을 지으며 두 손으로 양 볼을 감싸 눌렀다. 그런데 그 때 팀장실이 벌컥, 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김여주씨, 자료 정리가 엉망이네요.”
“네..에..?”
“제 방으로 오죠.”
이태용이 낮은 음성을 내뱉으며 나와 눈을 마주했다. 물론 금방 등을 돌리고 문을 닫긴 했지만, 이번에는 쾅! 하고 큰 소리는 나지 않았다. 애써 입꼬리를 가만히 놔두려 꾹 눌러 참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팀원들의 뜨거운 시선(= 여주 또야…? 졸라 불쌍..) 이 또 다시 온 몸을 찔러왔다. 근데 지금 그게 무슨 상관이겠어!!!!!! 다 비켜!!!!!!!!!! 걸음을 빨리할 뿐이였다.
♡^♡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이냐 하면, 나더러 제 방으로 오라던 이태용이 나를 앞에 세워두고 말이 아닌 메신저로 대화하는 상황이였다. 어우, 근데 갑자기 결혼하겠다는 뉘앙스를 폴폴 풍기는게 아닌가. 괜시리 부끄러워 수줍게 이모티콘 하나를 보냈더니, 피식 웃는다.
“미워할 수가 없네요, 김여주씨.”
“미워하면 안되죠. 너무해.”
이태용의 말소리가 작게 팀장실 전체를 흔들었다. 덤으로 잇사이로 새어나오는 작은 웃음도. 이태용은 나를 한참 바라보다 책상 안 쪽으로 팔을 뻗더니 작은 음료수 병 하나를 꺼내 내게 건냈다. 이번만 봐주는거야. 너 두고 회식 빠진 내 잘못도 있으니까. 그런 예쁜 말과 함께.
“마시고 술 마저 깨요. 점심 때 둘이 몰래 해장국 먹으러 가요, 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