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use Boy!
: 아무도 모르게 시작
05
04 화
Final Sentence
나는 그런 남자의 눈을 맞추고, 마음 속으로 할 말인 '완전 그래도 돼'를 누구보다 씩씩하게.
"응! 완전 그래도 돼!"
외쳤다.
남자는 그런 내가 웃긴지 크게 웃어보이고는, 내 머리를 쓱쓱, 쓸어내렸다. 그리고는 내가 완전 그래도 되는구나. 하고 나를 놀리듯, 고개를 연신 끄덕였고.
"그럼 이것도 완전 그래도 되는 걸로 해요." 하며
제 커다란 손으로 내 손을 덥석 잡아왔다.
나 이거 썸, 맞지?
남자와 어떻게 편의점까지 걸어왔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남자는 걷는 중간중간 내 손을 고쳐 잡아왔고, 나는 그런 남자의 모습에 혼자 얼굴이 붉어지고는 했다. 남자랑 손을 처음 잡아보는 것도 아닌데, 손에 힘을 얼만큼 줘야 할 지 - 손에 땀이 나면 어떻게 빼내야 할 지 등의 유치한 고민들만이 머릿속을 붕붕. 떠다녔다. 남자 역시 내 손을 고쳐 잡을 뿐, 어떠한 말도 걸어오지 않았다. 남자의 성격상 부끄럽다거나, 수줍다거나 뭐. 그런 쪽은 아닌 것 같은데. 왜 말이 없지? 내가 손에 힘을 너무 풀었나? 아니... 깍지가 불편한가?
내 모든 신경이 우리 둘의 마주잡은 손에 집중되어 있었다면, 남자의 신경은 오로지 빨리 편의점에 도달하는 데에 있었던 것 같다. 제 긴 다리로 휙휙 걸어가는 남자에 나는 평소의 두 배 가까이 되는 걸음으로 그 뒤를 따랐다. 치, 천천히 좀 가지. 오래 보게.
편의점에 도착하자마자 남자는 내 손을 자연스럽게 놓았고, 순식간에 짝을 잃은 내 손은 제 자리를 찾았다. 원래 자리를 찾아 온 것 뿐인데, 괜시리 마음 한 구석이 알 수 없는 감정으로 휘몰아쳤다. 남자는 어느새 음료 진열대 앞에 서 있었다. 많이 목 말랐나? 그렇게 오래 걷지도 않았는데. 생각보다 체력이 별로인가 보네. 근데 뭐야. 이럴거면 손은 왜 잡았어 -. 나는 꽁한 속마음을 최대한 감추고, 남자의 옆으로 향했다. 그리고는 남자에게 혹시 뭐 먹고 싶은게 있냐고 물으려 고개를 들었는데
좀 전의 내 얼굴처럼
남자의 귀 끝이
붉었다.
남자의 붉은 귀를 보고, 내 얼굴은 또 다시
화르륵.
남자의 옆에 더 이상 있다가는 잔뜩 붉어진 얼굴을 들킬까, 진열대를 열자마자 보이는 음료를 집어 들고
"고르면 계산하고 가져와요. 도, 돈은 계산대에 둘게요!"
내가 고른 음료는 확인도 하지 않은 채로, 계산대에 음료를 올려두고 나왔다.
저 남자꺼랑 같이 계산해주세요. 카드는 여기요!
남자는 금새 편의점 문을 열고 나왔다. 편의점 앞 테이블에 앉아 있던 나는 남자의 손에 들려진 음료를 보고, 의아 할 수 밖에 없었다. 아니. 학생이 무슨!
"저어-"
"네?"
"맥주... 마실 거예요?"
"나한테 묻는 거예요?"
"아니, 그 오른손에 든 거 맥준데!"
아직 학생이라 뭐가 맥주인지 모르나... 하긴, 아직 정확한 나이도 모르는데. 그래. 요즘 학생들이 여러 면에서 아무리 빠르다고 해도, 음주는 또 아닐 수도 있지. 오늘을 기회로 남자에게 음주 강습을 해주어야 하나 싶은 마음에 남자를 바라보자, 가장 먼저 보이는 건
빈틈없이 목 끝까지 채워진 교복단추였다.
언제부터 교복이 이렇게나 야한 옷이었을까. 아니, 노출이 하나도 없는데 이렇게 야한 게 가능해? 나 막 제복, 교복 그런거 판타지 있었나. 아직 술을 한 모금도 하지 않았지만, 잔뜩 취한 기분이었다.
남자는 저를 빤히 쳐다보는 내 시선에 제 왼 손을 들어보였다. 그리고는
"내껀 이거지. 교복입고 술은"
남자는 태연하게 의자를 잡아 끌며,
섹시하죠. 너무
나 혹시 속마음 들킨거니? 쟤 독심술 뭐 그런거 하는 거 아니야? 나는 마치 예상치 못했다는 듯, 두 눈을 크게 뜨고는 네? 하고 되물었다. 좋아. 뻔뻔하게 잘하고 있어 탄소야.
그러자 남자는 바람 빠진 웃음을 살풋 내뱉고는, 맥주 캔을 따 내게로 건넸다.
"이건 어른꺼."
"...고마워요."
"이건 어린이꺼."
교복만으로도 죄책감은 충분히 들었다. 아직 남자와 손을 잡는 것을 제외한다면 그 어떤 것도 하지 않았는데, 그냥 세상 모든 신들을 모셔다가 사죄하고 싶었다. 지금까지의 일들 뿐만 아니라, 앞으로의 일들까지 전부 다.
그런데, 남자의 손에 가지런히 들려진 음료는 그런 내 사죄의 마음에 불씨를 당겼다.
교복에
흰 우유는 너무하잖아. 진짜.
속이 탔다.
이럴 땐, 술이지.
맥주 한 캔을 중간 쯤 마셨을까. 남자는 우유를 다 먹었는지, 팩을 곱게 접었다.
팩을 접는 남자의 손이 예뻤다.
"손도 잘생겼죠."
아.
또 들켰다. 쟤 진짜 뭐 능력 있나봐.
"열아홉 살이에요. 이름은 전정국이고."
열아홉. 십대의 마지노선! 남자의 입에서 열아홉이라는 단어가 나오는 순간부터, 그 뒤의 말은 그 무엇도 중요하지 않았다. 열아홉이래잖아. 뭐가 더 필요해.
"계속 그쪽 그쪽, 그게 아니면 저기요. 이렇게 부르는데"
내가 그랬었나.
"듣는 정국이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아서."
"아아..."
그러고 보니, 아직 남자의 이름을 한 번도 제대로 부른 적이 없었다.
"전정국이요. 편하게 정국이라고 하세요."
"그, 그래! 나는 김탄소야."
"알아요. 이름."
"그렇구나 - 아, 아까 진술서 봤다고 했ㅈ."
"나이도 알고."
이씨.
맥주를 마셨다. 아니, 들이 부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지도.
"그게 뭐 -! 나도 너 나이 알아!"
"난 그냥 나이 안다고 한 건데, 왜 발끈하지."
"내가 언제 발끈했어!"
"이것 봐. 또. 또."
말을 말자. 내가 열아홉이랑 나이 얘기해서 좋을 게 뭐야.
나는 가만히 손에 들린 멕주만 마실 뿐이었다.
"근데"
"왜! 뭐! 또 나이 얘기하게?"
"안해요. 나이 얘기."
나를 놀려오던 표정과는 다르게 사뭇 진지한 표정의 남자가 말했다.
그 나이로 하나도 안보여요. 난 나랑 동갑이거나 더 어릴 거라 생각했는데.
내 취향은 연상 쪽에 더 가까워서.
쟤 저거 우유 아닌 거 아니야?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저런 말을 막 하냐구. 아니면 여자를 많이 만나봤나? 조금 더 친해지면 물어 볼 게,
너무 많다.
"야, 야! 너는 무슨 말을 그렇게 그냥 막. 어?!"
누나 심장 떨어지게 하니.
"근데 진짜로."
"..."
"새벽에 거긴 왜 왔어요? "
"그럼 너는?"
"내가 먼저 말했는데."
"그런 게 어딨어."
"유치하게 뭐, 먼저 말하는 사람이 임자죠. 이런 말 해야 돼요?"
"아니, 그냥 더 듣고 싶은 사람이 먼저 말하는거지."
너야말로. 고딩이 말이야! 그것도 고 삼이, 그 화재현장에는 왜 있었어?
남자는 혼내는 듯한 내 말투에 등받이에 제 몸을 기댔다. 그리고는 스스로 팔짱을 끼고, 말했다.
"내가 먼저 말하면, 후회 할 텐데."
"후회 절-대 안하거든요."
"할 걸요."
내가 말하면, 누나 거짓말 못해요. 거기 온 이유.
그럼 내가 먼저 말했으면, 정국이는 나한테 거짓말 할 생각이었나?
참나. 이건 무조건 내가 먼저 들어야 돼.
"난 거짓말 안 할거야. 숨길 이유도 없고."
사실이었다. 뭐, 글 쓰러 갔다. 이게 숨겨야 할 이유는 아니니까
"나 마지막으로 기회주는 건데."
"필요없거든요 -"
완연히 오른 취기에 테이블 위로 상체를 기울였다. 말해봐아
"거기서"
"응 -"
"죽었어요."
"..."
"아빠가"
감기 기운처럼 몸을 감싸오던 취기가 순식간에 달아났다. 나는 테이블에 기울어진 몸을 일으켜
남자의 덤덤한 시선을 마주했다.
현재 04.
"갈아 입어."
"싫어!"
"갈아 입으라고 했어."
"싫다고 했어."
갈아 입으라니까. 싫다니까. 아, 진짜. 아, 진짜 뭐!!
그렇게 영양가 없는 실랑이를 반복했다.
전정국 미워. 내 속도 모르고. 그래도 아버님 처음 만나뵈러 가는 건데... 예쁘게 보여야 될 거 아니야.
나는 차마 입 밖으로 뱉지 못한 말을 속으로 삼켰다.
"아니. 누가 한겨울에 다리를 다 내놓고 다녀."
아니. 무릎에서 조금. 아주 조-금 위로 올라오는데...? 이게 다 내놓고 다니는거야?
"야. 저기 횡단보도 건너편 여자 봐봐."
저 여자는 어? 아주 그냥, 손바닥만한 치마를 입었구만! 구두도 저렇게 높은 거 신고!
건조하게 여자를 한 번 바라본 정국이가 말을 이었다. 봤는데, 뭐.
봤는데, 뭐?
"저 여자가 입은 치마는 내 치마로 네 개는 만들 수 있겠다!"
"그럼 가서 만들어 주고 와."
"뭐라고?"
"가서 만들어 주고 오라고."
"그런 뜻이 아니잖ㅇ."
"저 여자가 뭘 입는게, 나랑 뭔 상관이야."
"아니, 내 치마는 짧은 게 아니다. 뭐 그런ㄱ."
"짧아."
"말은 좀 끝까지 들어!"
"짧다고."
이러다가 오늘 안에 출발은 할 수 있을까. 우리?
만나기로 한 약속장소 앞에서 전혀 - 길지도 않은 치마로, 괜한 싸움이었다. 둘 다. 그래도 정국이의 아버지를 뵈러 가는 거니, 오늘은 정국이의 말을 들어야겠다 싶어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이려는 찰나.
"저..."
"네?"
"김탄소 작가님 아니세요? [LD] 쓰신...?"
"아, 네."
내 독자인 것처럼 보이는 남자는 연신 헐- ,대박을 외쳐대다가
"저, 손 한 번만...! 진짜 팬이에요!"
"물론이죠. 고마워요."
남자는 악수를 마친 내 손을 쉽게 놓치 않은 채로 '진짜 너무 예쁘세요. 와. 글도 잘 쓰시는데, 얼굴도 진짜 아름다우세요.' 라고 말했다. 나는 말도 안되는 칭찬에 아니에요! 하고 답했다. 속으로는 내심, 전정국 듣고 있냐! 를 외쳤지만.
짧지만 꽤나 요란했던 독자와의 만남을 끝내고, 전정국을 바라보니
"왜에..."
"좋아 죽더라."
"전혀"
"아주 눈웃음이 막."
"뭘 또 눈웃음이야!"
"그렇게 환하게 웃는 건 또 처음 보네."
참자. 내가 누나니까.
"나 바지로 갈아 입을래."
"마음대로 해."
"집에 가자."
"갔다와. 나 여기 있을래."
"같이 가자."
"싫어"
"추우니까, 우리 집에 와서 기다려"
"싫다니ㄲ."
"싫어?"
"어딜 가서 기다려?"
"우리 집."
"ㅇ, 야.
정국이 얼굴 빨개졌다.
귀여워.
"내 방도 괜찮고 - "
"..."
"같이 가자. 정국아아"
*
안녕하세요. 겨울소녀입니다.
이제 막 시작하려는 두 사람의 이야기에 다들 예쁜 감정을 느끼셨으면 좋겠어요. 미묘한 감정들이 잘 드러났으면 했는데, 다 쓰고 나면 왜 이리 부족한 것만 보이는지...! 더 노력해야겠어요.
다들 좋은 밤 되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