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아, 예쁘니까.
02
"…네?"
이건 무슨 상황일까. 웬 잘생긴 훈남이 내 옆자리를 가리키며 자리가 있느냐고 물어본다. 자리가 없긴 하니 '아니요….' 하고 대답을 하자, 'Thank you.' 하며 자리에 앉는 훈남. 와, 발음 죽이네. 무슨 외국에서 살다 왔나.
아니 그것보다도, 왜 하필 내 옆자리인 걸까? 사실 따지고 보면 이건 굉장히 흔한 일일지도 모른다. 이 사람은 그저 여기에 앉고 싶어서 자리가 있냐고 물어본 것이겠지. 하지만 누구나 나를 기피하는 게 익숙해져서인지 나는 이마저도 굉장히 부담스러울 뿐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혼란스럽기도 했고.
"미술 좋아하세요?"
"네?"
그 사람과 부딪히지 않기 위해 몸을 최대한 떨어뜨리며 마저 웹툰을 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생뚱맞게 미술을 좋아하냔다. 뭐야…. 이 사람 무서워. 왜 계속 말을 걸고 그러는 거야. 그리고 미술을 좋아하긴, 개뿔. 그냥 이 수업을 다들 잘 안 들으니까 선택한 것 밖에 없는데. 그런데 생글 생글 웃으면서 미술을 좋아하냐고 묻는 이 사람에게, 내가 이 교양을 듣게 된 솔직한 이유를 말한다면 뭔가 죄를 짓는 것 같은 기분에 나는 대충 얼버무려야 했다.
"네…. 뭐, 그냥. 좋아하는 편이에요."
"아, 그러시구나! 저도 미술 정말 좋아해요. 그래서 이 수업 꼭 들어야지, 했었는데 항상 시간표가 안 맞아서 못 들었었거든요."
아… 그렇구나. 그렇게까지 자세하게 궁금하진 않는데…. 나는 고개를 두어 번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어느 과세요?"
"저요?"
"네."
"…국문과요."
"오, Literature."
이 사람 진짜 외국에서 살다 왔나. 뭔가 자랑하려고 영어를 섞어 쓰는 게 아니고, 정말 무의식적으로 자연스럽게 나오는 영어라 내가 조금 의아하다는 듯이 쳐다보자, 그런 나를 알아챈 건지 그 사람은 조금 멋쩍은 듯 뒷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사실 제가 외국에서 살다 와서… 가끔 이렇게 영어가 튀어나오곤 하더라고요."
"아…."
"저는 경영학과 홍지수라고 해요. 그쪽 이름은 뭐예요?"
"저는 김여주… 라고 해요."
"예쁜 이름이네요."
……? 예뻐? 내 이름이? 약간 얼떨떨한 기분에 멍하니 그 사람만 쳐다보고 있는데, 때마침 강의실로 들어오는 교수님에 그 사람은 나를 보고 씨익 웃고는 앞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이 사람은 대체 뭘까. 내 이름을 듣고 예쁘다고 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는 이름보다 '돼지', '아싸' 이런 것들로만 호칭을 불려왔던 나였기에, 지금 이 사람이 내게 건넨 말을 듣자 속에서 무엇인가가 울컥 차오르면서도, 또 다른 한편으로는 의문이 생기기도 했다. 개강 첫 주, 교양 OT날 처음 만난 사람이 왜 내게 이런 말들을 하는 걸까.
혹시 친구들하고 내기를 했는데 진 건가? 쪽팔려 게임이라든가, 그런 걸 했는데 져가지고 제일 만만한 나를 꼬신다거나, 뭐 이런 걸 벌칙으로 하는 건가? 정말 그런 건가 싶어 주위를 두리번거려봤지만 딱히 이 사람의 친구라고 보이는 사람은 없었다. 정말 내기를 한 거였다면 누군가가 우리를 보고 큭큭 웃거나 시선을 주곤 했을 텐데, 아무도 우리한테 관심이 없었거든.
그런 게 아니라면 이 사람은 나한테 왜 이러냔 말이야…. 내가 평범한 여자였다면 혹시 이건 썸이 아닐까? 하고 혼자서 설렜을지도 모르겠다만, 나는 그런 것조차 상상할 수 없는 사람이다. 이런 훈남이 내게 관심을 가질 리가 없잖아….
아… 머리 아프다.
내 옆에 있는 남자, 홍지수에 대해 생각을 하느라 OT도 제대로 듣지 못 했다. 교수님이 무슨 말을 하든 말든 나는 그저 혼자서 끙끙 앓고 있을 뿐이었고, 한 시간만에 끝난 OT에 나는 그저 얼른 이 자리를 벗어나야겠다는 생각 하나로 빠르게 일어났다.
"여주씨!"
그때 나를 붙잡는 홍지수, 그의 목소리.
"…네?"
"다음에도 수업 같이 들어요. 어차피 우리 둘 다 혼자니까."
……에?!! 예상치도 못한 말에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니 그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왜요?' 하고 물었다.
"아니, 그게…."
내가 왜 당신이랑 같이 수업을 들어야 하는 거죠…? 소심한 나는 차마 뒷말은 하지 못하고 그저 당황해서 안절부절못하고 있자, 그는 내 손을 잡더니 내 새끼손가락에다가 제 새끼손가락을 걸고서는,
"약속, 한 거예요. 우리?"
그럼 다음 주에 봐요. 이 말을 하고선, 강의실을 빠져나갔다.
"…허."
허허. 이제는 조금 어이가 없어지려는 이 상황이 웃겨 나는 헛웃음만 내뱉었다. 저 남자는 대체 왜 내게 접근을 한 걸까. 내가 뭐 돈이라도 많게 생겼나? 그런데 지금 내 행색을 보면 그건 아닌 것 같고… 아니면 내가 쉽게 생겨서 이러는 건가. 대체 무슨 꿍꿍이인 걸까, 저 사람은? 만약 우리가 문장 부호를 볼 수 있었다면, 지금 내 주변에는 온통 물음표로 가득했을 것이다.
"교양 좀 편하게 들으려고 했더니…."
전공은 전공대로, 교양은 교양대로 불편해질 판이다, 지금. 에휴. 내가 그렇지, 뭐. 나는 한숨을 푸욱 내쉬고는 다음 강의를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
나 같은 아싸는 음식점 같은 건 꿈도 못 꾼다. 물론 혼자서 밥을 잘 먹는 사람도 있겠지만, 나는 아싸에다 쫄보이기까지 해서 혼자서 밥은 절대 못 먹었거든. 그래서 나는 항상 편의점에 가 라면에 김밥 한 줄을 사고는 후딱 먹고 나오는 편이다. 오래 있으면 또 사람들의 눈치가 보이니까. 메뉴가 질리긴 해도 어쩔 수가 없다. 나는 하루하루 오늘은 어떤 라면을 먹을까, 오늘은 어떤 김밥을 먹을까 하면서 위안을 얻어야만 했다. 점심에 이렇게 대충 먹고 나서 집에 가서는 폭식을 하니 살이 이렇게 찔 수밖에. 고쳐야지, 싶다가도 집에만 가면 긴장이 풀어져서 그런지 마구 먹어대는 나를 나조차도 주체를 할 수가 없다, 속상하게도.
"…으으."
오늘따라 좀 급하게 먹은 건가. 속이 답답한 마음에 가슴팍을 두드리며 편의점을 나오는데, 내 앞으로 지나가던 여대생 두 명이 커피를 들고 걸어가는 게 보였다. 그러고 보니까 아메리카노는 지방을 분해하는 성분을 가지고 있다고 하던데, 저거나 한 번 먹어볼까? 아메리카노는 굉장히 쓰다는 말을 들었기에 그동안 시도를 못해봤는데 오늘은 왠지, 그냥 저걸 마셔야겠다는 기분이 들었다.
아메리카노를 먹는다는 생각 때문인지 나는 항상 눈치를 보면서 들어갔던 카페도 당당히 들어갈 수 있었다. 원래 단 걸 좋아하는 나였기에 맨날 자바칩 프라푸치노, 이런 걸 먹어야 직성이 풀렸었는데 내가 그 메뉴를 시키고 나면, 혹은 그 메뉴를 시키고 나서 '휘핑크림 올려드릴까요?' 하고 물어보는 점원의 말에 내가 소심하게 고개를 끄덕일 때면, '저런 걸 먹으니까 살이 찌지.', '휘핑크림까지 올려 먹네. 양심도 없나.' 이런 소리를 들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기에 나는 카페에서 주문 하나도 마음대로 시키지 못했었다.
하지만 괜찮아!
난 오늘 아메리카노를 시킬 거니까!
카페에 들어가 주문을 하기 위해 사람들이 줄을 서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맨 뒤에 서서 사람이 줄어들기를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헐."
나는 나도 모르게 나온 말에 입을 헙, 다물었다. 아니, 내가 지금 헛것을 보고 있는 건가? 아닌데. 그래도 나 시력이 그렇게 나쁜 편은 아닌데…? 손으로 눈을 비비고 다시 앞을 바라보는데,
내 앞에 디카프리오가 서 있었다.
"와…."
정확히 말하자면 내 앞의 앞에. 미쳤어, 진짜. 우리 학교에 저런 사람이 있었다니. 어느 과 사람일까? 생긴 걸로 봐서는 혼혈 같은데, 그럼 영어과이려나? 와… 정말 영어과 사람들 복 터졌겠다. 나는 왜 영어과가 아닌 것일까. 나는 사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광팬으로서, 그가 나온 영화는 이미 다 섭렵한 사람이었다. 그의 데뷔작 크리터스3부터 시작해서 최근에 나온 레버넌트까지. 그런데 저 사람은 무려 디카프리오의 리즈시절, 흔히 말하는 토탈 이클립스나 타이타닉 시절의 레오를 똑 빼닮은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하나요."
저 사람도 아메리카노를 시키는구나. 그래, 오늘은 정말 아메리카노를 먹으라는 신의 계시임이 분명해. 저 사람이 아메리카노를 시키는 걸 보니 먹어보지 않아도 굉장히 맛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몇 분 후에 커피가 나오고, 테이크아웃을 해가는 그의 뒷모습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커피 한 모금을 마시며 나가는 그를 보고 있자니 마치 이곳이 뉴욕인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우와, 진짜 잘생겼다…. 저런 얼굴로 살면 어떤 기분일까. 한동안 멍하니 그에 대해 생각을 하고 있었을 때,
"…저기 손님?"
"네?"
"주문 도와드리겠습니다."
어느새 다가온 내 차례에 나는 황급히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외쳤다. 아메리카노는 원두를 갈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기에 다른 음료와는 다르게 금방 나왔다. 프라푸치노는 조금 걸렸던 것 같은데 말이야. 아메리카노를 들고 있으니 물론 지금도 어른이지만, 괜히 더 어른이 된 것 같은 기분에 우쭐해져서 혼자서 큭큭대다가 한 모금을 쭈욱 들이켰다.
"…우웩!"
아, 이게 뭐야. 이걸 대체 무슨 맛으로 먹는 거야?!! 혀를 강타하는 엄청난 쓴맛은 내 인상을 찌푸리게 만들기 충분했고, 나는 정말 이걸 계속 마셔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했다.
"진짜 맛없어…."
아까 그 남자는 되게 멋있게 먹던데… 다 그것도 얼굴이 잘생겨서 그렇게 보였던 건가. 버릴까 생각을 해봤지만 돈이 아깝기도 하고, 또 지방을 분해한다고 하니까. 아까 먹은 라면과 김밥을 분해시킨다는 기분으로, 정말 거의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나는 다시 쪽쪽 들이키기 시작했다.
다음부터는 이거 절대 안 먹어야지.
*
오늘의 마지막 시간. 오늘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수업은 바로 전필이었다. 전선은 말 그대로 전공 선택이었기에 15학번 애들 전체를 만나는 일이 드물었는데, 이 수업은 전필, 즉 전공 필수였기에 동기들을 다 만난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였다. 그래서 나는 정말 전필이 싫었다. 차라리 나를 가만히 내버려 두면 모를까, 다들 알다시피 나를 엄청나게 놀리는 그 동기 놈도 함께 수업을 듣는 것이었기에 나는 벌써부터 마음이 심란해지기 시작했다. 걔 진짜 군대 언제 가냐, 빨리 좀 가버리지.
심호흡을 크게 한번 하고는 강의실 문을 열었다. 그런데 내가 예상했던 풍경과는 조금 다르다. 원래대로라면 삼삼오오 모여 다들 떠들기 바쁠 텐데 모여서 떠들기는커녕, 없는 애들도 꽤 보였다. 전필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제일 놀라운 건 이지훈이 지금 이 자리에 없다는 것. 15학번 사이에서 매일 1등을 하는 아이였기에 수업을 절대 빠지는 애는 아니었다. 출석에서 점수가 깎이는 건 바보 같은 짓이라고 하는 걸 몇 번이나 들은 적이 있었거든. 그런데 이상하게 걔가 없다. 그리고 나를 놀리던 동기 놈도 없었고. 권순영이랑 전원우는 있긴 했는데 책상에 엎드려 도통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건 다른 동기애들도 마찬가지였다. 모두 병든 닭처럼 골골대고 있을 뿐이었다. 이게 무슨 일이래…? 한참을 생각하던 나는, 곧 떠올렸다.
"아."
어제 개강 총회가 끝나고 뒤풀이가 있었다는 것을.
다들 어제 엄청 달렸구나. 이지훈 학교 안 나올 법도 하네. 어제 대충 들어보니까 술 못 마시는 것 같던데. 오늘이 OT임을 이지훈은 정말 감사하게 생각해야 할 것이다. 나는 골골대고 있는 동기들을 피해 맨 뒷자리에 앉아 가방을 내려놓았다. 대체 얼마나 마셨으면 저러는 걸까…. 술을 제대로 먹어본 적이 없어 나는 숙취, 이런 걸 전혀 알지 못한다. 그냥 이런 광경들을 보면서 정말 안 좋은 거구나… 하고 지레짐작만 할 뿐.
그때였다.
"권순영-! 안 일어나?"
"…아, 선배님. 저 진짜 죽을 거 같아요."
"뭘 이런 걸로 죽어. 안 죽으니까 괜찮아."
……?! 저 선배는 어제 봤던 그 예쁜 선배잖아? 그 선배가 왜 지금 이 강의실에 들어오는 거지? 지금은 2학년 전필 시간인데…? 영문도 모른 채 그 선배가 권순영이랑 얘기하는 걸 멀뚱 멀뚱 쳐다만 보다가, 뒤이어 들어오는 사람을 보고 나는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애들이 왜 이렇게 약해 빠졌어. 우리 때는 이 정돈 아무것도 아니었는데."
"그러니까 말이야."
…오 마이 갓. 어떡하지? 일단 화장실로 튈까? 그런데 좀 있으면 교수님 들어오실 텐데? 의자에 앉지도, 일어서지도 못하고 옴짝달싹 하지도 못한 채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는데, 이쪽을 바라보는 선배에 놀라 나는 황급히 고개를 푹 숙였다.
설마 기억하겠어? 어제 그것도 잠깐 마주친 거고, 그리고 나는 원래 존재감이 없는 애니까 나 같은 건 기억 못할 거야. 그래, 그게 당연한 거야…! 하지만 생각과는 다르게 초조해지는 마음에 나는 어느새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고 있었다. 권순영과 정한 선배의 목소리가 들리는 걸 보니 그 선배도 아직은 저기 있나 보다. 아, 그냥 화장실에 있다가 수업 시작할 때쯤 다시 들어올까? 별의별 생각을 다 하고 있는데 옆에서 누가 털썩, 앉는 소리가 들려왔다. 원래대로였다면, 왜 내 옆에 앉았지? 하고 생각했겠지만 지금은 누가 내 옆에 앉든가 말든가.
그래. 좀 이따가 다시 들어오자. 지금은 그게 최선인 것 같아.
그렇게 생각하고 강의실을 나가려 고개를 들었을 때였다.
"……헉!"
"안녕, 후배님?"
"나 기억하지?"
읽어주세요♡ |
안녕하세요. 차차차입니다! 저번에 정말 생각지도 못하게 많은 관심과 사랑을 받아서 저는 진짜 너무너무 행복했답니다ㅠㅠㅠㅠㅠ 제 글을 읽어주신 독자님들의 수와... 댓글과... 그리고 초록글까지....! 모두 다 독자님들 덕분입니다ㅠㅠㅠㅠㅠ 그래서 또 이렇게 금방 찾아왔네요 히히 내일 학교 일찍 가야 되는데....ㅋㅋㅋㅋㅋㅋ 사실 글은 1시에 다 썼는데 짤을 찾느랔ㅋㅋㅋㅋㅋㅋ 시간이 이렇게 늦었네요 짤 찾는 게 너무 어려워요... 적절한 짤을 찾아서 독자님들의 상상력을 더욱 자극하고 싶은데...ㅠㅠ 너무 어렵습니다...ㅠㅠㅠㅠ
사실 독자님들께 고마운 마음이 커서 일찍 찾아온 것도 있지만 다음 주부터가 당장 시험이라... 아마 2주 정도는 못 올 것 같습니다..ㅠㅠ 그래서 2편밖에 쓰지 못했는데 죄송한 마음뿐이에요 진짜ㅠㅠㅠㅠ 그래도 저 잊지 않으실 거죠....? 시험만 끝나면 금방 돌아오도록 하겠습니다!
모두들 감사합니다♡♡♡♡♡ 하트 뿅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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