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IA-너라는 시간이 흐른다
하루 내내 내리쬐던 햇빛이 어느새 사라지고, 어두워진 하늘 위에 초승달만이 외로이 떠있었다. 은은히 내리는 달빛 아래에 눈물이 날 것 같아, 자꾸만 눈가를 비집고 흘러나오려는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 이불을 머리 끝까지 뒤집어 썼다. 이불 끝자락을 놓칠새라 꽉 잡고 있는 내 손 위로, 따뜻한 손길이 덮어져 가만히 내 손을 밀어냈다.
"마마, 손이 아파하고 있지 않습니까."
걱정스런 눈을 하고 부드러이 말하는 민규의 모습에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칭얼댔다. 민규야, 왜 그렇게 말해 불편하게... 불편하다며 연신 칭얼거리는 내 모습에 민규가 가만히 고개를 저어보이며 말했다.
"그리 예쁜 얼굴을 하고 행동하는건 영락없는 어린아이니, 이제부턴 마마가 아니라 아가라 불러야겠습니다."
민규의 말에 배시시 웃어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아가라 불러줘. 내 말에 그는 낮게 웃어보이고선 가만히 내 귓가에 속삭였다.
"아가, 어디가 그리 불편하여 울상이신겁니까."
따스히 내 귓가를 울려오는 그 목소리에 다시금 울음이 쏟아져 나올 것만 같았다. 민규야, 내일이 안왔으면 좋겠어. 이어진 내 대답에 민규는 화들짝 놀란 듯, 문이 잘 잠겼는지 다시금 확인하고선 누가 들었으면 어찌합니까, 마마! 하며 당황한 기색이 역력히 드러나는 표정을 해보였다. 그에 입술을 댓발 내밀며 대답했다. 들으면 뭐 어때. 정말 싫단 말이야. 그 말을 하며 몸을 일으키려는 내 팔을 그가 세게 잡았다.
"마마, 당장 내일이 합방일인데 지금 잠에 들지 않으시면..."
타들어가는 내 속도 모르고 연신 눈치없는 말들만 늘어놓는 민규의 모습이 싫어, 실눈을 뜨며 민규에게 말했다. 넌 아무렇지도 않아? 내일 폐하께서 나한테 사랑한다고 하실꺼고, 그리고 날 안을테고, 그리고...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민규가 굳은 얼굴을 하고 거칠게 내 옷 앞섶을 끌어당겨 제 품에 안았다. 이내 낮게 그르렁대듯, 속삭이는 그의 음성에 가만히 허리를 움츠렸다.
"생각만 해도 짜증나."
그 말과 함께 민규는 제 입술에 내 입술을 쓸어담듯, 한 치의 빈틈도 없이 내게 입맞추기 시작했다. 내 피부 위로 느껴지는 그의 손길이 거칠어 거의 우는 소리를 내며 아파, 하고 칭얼대면, 그런 날 달래듯 아까와는 다르게 부드러운 손길로 부서질새라, 조심스레 날 안은 채 머리를 쓰다듬는 김민규다. 이윽고 귓가에 아가, 아파? 하고 속삭이듯 묻는 그의 물음에 고개를 젓자, 이내 웃으며 목덜미에 붉은 열꽃을 남기기 시작한다.
"내꺼야."
그 말을 끝으로, 우리 둘만의 비밀을 지켜주려는 듯, 조용한 세상 아래에 말없이 비추던 달마저 풀숲 뒤로 숨어버렸다. 정말, 내일이 오긴 할까 민규야.
이 밤은 참 길고, 너의 손가락도 참 길다.
하늘엔 달이 아닌, 태양이 떴다. 그토록 오지 않길 바라던 오늘인데. 침음성을 내보이며 눈을 감은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않은 채로 말했다. 민규야, 나 아파. 내 말에도 한참동안 돌아오지 않는 대답에 의아해 눈을 떠보이면, 내 시야에 들어오는건 김민규가 아니었다. 폐하... 내 당황스런 말투에 폐하는 낮게 웃으며 내 이마를 쓸었다. 이마를 훑고 지나가는 그 손길이 너무 차가워, 심장이 뛰는 사람의 것이라곤 할 수 없을 정도였다.
"어디가 그리 아파 일어나시지도 못하십니까 부인."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묻는 그에게 가만히 고개를 저어 보였다. 그런 내 모습을 보는 지훈의 눈빛이, 묘하게 경직되어 있었다. 내게 아무말 않고 그저 눈을 바라만 보고 있는 그의 행동이 부담스러워, 몸을 움추리며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지훈이 입을 열었다.
"부인은 어찌 내게 작은 일도 말해주기 꺼려하십니까."
"그 아이에겐 잘만 하는 이야기를, 어찌 제게만..."
애처로이 끝맺어진 그의 말에 나 또한 물기어린 목소리로 응수했다. 폐하, 정말 그런게 아니... 그런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지훈이 갑작스레 제 품에 날 가까이 끌어당겨, 내 이마에 제 이마를 갖다대었다. 속삭이듯 작은 목소리로, 거의 한뼘도 안되는 거리에서 그가 굳은 얼굴을 하고 내게 묻는다.
"그럼 지금 부인의 머릿속에 맴도는 생각이 뭐길래 이리 부인을 힘들게 하는겁니까."
그 말에 가만히 고개를 돌려보였다. 내게 속삭이는 그 목소리가 비수가 되어 그대로 가슴께에 내리꽃히는 기분이었다. 무언가 폐하께 크게 죄지은 기분. 내 굳게 닫힌 입술을 알 수 없는 시선으로 길게 응시해보이던 지훈은 이내 한숨을 쉬어보였다. 합방일은, 미루기로 하지요. 이토록 부인이 아파하는데 어찌 부인을 품에 들이겠습니까. 그 말에 기쁜 기색을 숨기려 애쓰며, 한숨을 내쉬기도 잠시. 지훈의 눈초리가 일순간 사나운 모양새를 해보였다. 금방이라도 제 사냥감에게 이빨을 꽂을법한, 그런 살기어린 눈빛. 이내 그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헌데,
"부인 목의 그 상처는, 무업니까."
낮게 묻는 그 목소리에 시야가 하얘졌다. 목에 자국이라면, 필히 어제 김민규가 남긴 자국일것이었다. 바싹 말라오는 입술을 혀로 훑으며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게..., 어제 잠이 안와 정원을 거닐다가 그만,
장미에 찔려버렸어요.
내 말에 지훈의 입꼬리가 묘하게 뒤틀렸다. 그랬습니까, 하고 되묻는 그의 표정이 무언가 심하게 잘못 돌아가고 있음을 말해주는 듯 했다.
"흉지진 않을까, 걱정입니다."
그 말을 끝으로 내 머리를 가만히 정리해주던 지훈은, 이내 처소 밖으로 나가다 말고 멈춰선 조용히 말했다. 내 말하지 않았습니까. 부인에게 상처입히는 그 무엇도 멀쩡히 놔두지 않겠다고.
"그러니, 장미를 꺾으러 가야지요."
폐하께서 그 말을 남기고 떠난지 장장 몇시간이 지났는데, 민규는 코빼기도 비출 생각을 안했다. 답답한 마음에 이불을 박차고 나와 창문을 살피며 소리나게 손톱을 딱, 딱 물어뜯었다. 제 몸을 함부로 대하는게 보기 안좋다며 손톱뜯는 버릇을 고치라고 귀에 딱지가 않도록 말하던 민규였다. 그런 김민규가, 아무리 애를 써도 보이지가 않았다. 아무래도 안되겠어. 혼잣말을 내뱉으며 처소를 나섰다. 이윽고 내 눈에 들어온 풍경에,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정원에 심어진 꽃들이 누군가 난도질 해놓은 듯, 단 하나의 이파리도 남기지 않은 채 모조리 베어져 있었다. 그에 경악해 가만히 정원을 바라보고 있으면,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너무 두려워, 귀에 담기조차 두려운 그 누군가의 목소리가.
"부인의 몸에 감히 흔적을 남긴 장미들 중, 유난히 신경쓰이는 장미 하나가 있었습니다."
"허나 그 장미가 얼마나 억센지, 내 손에 잡히려 하지 않더이다."
"그렇게 질기게 감겨오는 장미를 꺾어냈으니, 이제서야 부인이 덜 아프겠습니까."
떨리는 내 뒷모습이 보이지도 않는지, 담담히 뇌까리는 그 모습에 소름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그 말에 대한 의미는 더 물을 필요가 없었다. 힘없이 바닥에 주저앉으며 내게 걸음하는 그의 모습에 손을 내저었다. 민규를 어떻게 했어요. 힘없는 내 물음에 지훈의 표정이 일순간 유하게 풀어지다, 이내 날카로이 제 자리를 찾았다. 눈을 느리게 깜빡이며, 간신히 제정신을 붙들고 있는 내 얼굴을 제 손으로 쓸었다. 그리고 그 감촉은, 마치 서슬퍼런 칼날이 내 얼굴을 어루만지는 듯한 착각을 일게 만들었다. 내 귓볼에 제 입술을 바짝 갖다댄 지훈이 느리게 속삭였다.
"이제 호위무사는 필요하지 않을겁니다. 내 처소에서 한발자국도, 나가지 못하게 할테니까."
그에 눈을 번쩍 떠보이며 일어서려하는 날 가뿐히 안아올린 지훈이 빠른 걸음으로 제 처소로 향했다. 그의 처소로 가는 길 내내 발길질을 하며 어떻게든 그의 품에서 벗어나려하는 날 표정없이 내려다보던 지훈은 이내 처소의 문을 큰 소리가 나도록 열어젖히곤, 거칠게 제 침대에 날 눕혔다. 끊임없는 반항 끝에 지친 내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 민규, 어디있어요. 그런 내 물음에 아무일도 없다는 양 무표정하게 침대 끄트머리에 앉아 날 바라보던 지훈이 이내 입가에 잔잔히 미소를 띄우며 몸을 돌리곤 가만히 날 내려다보다, 이내 입을 열었다.
"그 입에서 앞으로 다른 이의 이름이 나오는 일은 없어야 할겁니다."
"어차피, 이제 부인의 세상엔 내가 유일한 주군이지 않습니까."
해 달 별 구성하다가 장편으로는 못올것 같아 비슷한 장르로 써본 오직 꽃님쓰들을 위한 글... 처음에는 당찬 포부로 시작했으나.... 갈수록 퀄리티가 영.... 마음에 안듭니다. 오랜만에 와서 이런 글을 놓고가다니 저를 매우 치십쇼... 아쉬워요... 아쉽다 8ㅁ8 허... 꽃봉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