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GM :: 스웨덴세탁소 - 다시, 봄
W. 너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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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 첫번째 메시지입니다.'
[엄마야, 백현이 돌아왔다고 하더라. 그래도 고등학교 때 맨날 같이 다녔었는데, 마중이라도 나가봐야하지 않겠니?
이따가 2시에 들어온다고 하니까 인천공항으로 나와. 부모님도 오신다고 하니까 신경써서 나오고.]
'메시지를 다시 들으려면 1번, 저장 하시려면 2번...'
비가 오는 날이다. 여태 주황색 햇빛이 매일마다 내 아침, 점심을 비추다가 사라지곤 했었는데, 오늘은 추적추적 비가 내린다.
평소와는 다르게 음성메시지를 들으며 아침을 맞이하니, 아침이 아침 같지 않다.
솔직히 말하면 음성메시지 탓이 아니다. 그냥 비가 와서, 비가 내 아침을 깨우던 햇살을 막아버려서, 다른 아침이 되어 버렸다.
내가 그렇게 햇빛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닌데 비가 다 막아버리니, 괜시리 그게 보고 싶어진다.
맨날 내가 갈 앞을 밝혀주던 아이였는데, 없으니까 이상하다.
아,
그리고 오늘은, 비 만큼이나 달갑지 않은 연락이 온 날이기도 하다.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일주일 만에 듣는듯한 엄마의 목소리, 그 엄마의 입술에서 달갑지 않은 이름이 나왔다.
'백현이.'
그래, 오늘 백현이가 오는 날이다. 내 오랜 친구였지만, 아닌, 그런 친구.
갑작스래 오는 비처럼, 초대하지 않은 손님.
"...변백현."
나는 아침의 그 포근한 느낌에서 다 깨기도 전에 일어나서 곧장 씻으러 들어간다.
그를 만나러 가고는 싶지 않았지만, 궁금하기도 했다. 어떻게 변했는지, 잘 지냈는지.
수도꼭지를 오른쪽으로 돌려 물을 트니 투명하고 맑은 물이 세면대 가득 차오른다.
나는 두 손을 모아 가득 모여진 물로 세수를 하다가 문득, 머릿속에 가득 무언가가 차오름을 느낀다.
*
"백현아, 사랑해."
"나도, 아니. 내가 더 많이 사랑해."
3년 전이었다. 이렇게 입술 사이로 나오는 말마다 온갖 사랑이 넘쳐 흐르는 때가.
그 당시 우리의 나이는 열여덟. 그 어느 푸르른 새싹보다 예쁘고 고운 시절이었다.
서로를 향해 마주보고 앉은 S카페 테이블 위에서, 우리는 반지를 낀 서로의 손을 맞잡으며 약속했다.
오직 서로만을 바라보며 앞으로 남은 나날들을 살아가겠다고.
그땐 카라멜 마끼아또처럼 달콤했고, 그 누구보다 행복했으며, 에스프레소처럼 진했다.
카페에서 나와 우리는 깍지 낀 손을 놓지 않으며 가로수길을 돌아다녔다.
커플 아이템이 있으면 그 가게 앞에 멈춰 서서 이게 더 예쁘다, 저게 더 예쁘다. 귀여운 실랑이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보니 알바로 모아둔 돈은 모두 이런 곳에 쓰이기 십상이었다. 하지만 아깝지 않았다. 백현이랑 나랑 함께 사용하는 거니까.
우리가 제일 좋아하는 민트색으로 핸드폰 케이스도 맞추고, 빨간색 커플 목도리를 두르며 이곳 저곳을 활보했다.
조금 있으면 크리스마스인데, 벌써부터 그 향기가 물씬 풍겨왔다.
"우리 크리스마스 때 명동가자! 나 거기서 남자친구랑 보내보고 싶었어!"
애교 섞인 목소리로 오른쪽에 딱 붙어있는 백현이의 다크브라운 눈동자를 위로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래, 니가 하고 싶던 일이었으면 나도 하고 싶은 거니까! 벌써부터 설렌다, 그치?"
그런 내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백현이가 나에게 더 밀착을 하며 대답했다.
더 붙어있으니 괜시리 더 떨렸고, 부끄러웠다.
아, 오늘같은 날만 매일매일 살았으면 정말 좋겠다. 백현이도 좋고 나도 좋은 그런 행복한 날.
갈색빛이 맴도는 머리와 뽀얀 피부, 너무 순둥이같은 귀여운 눈꼬리, 얇지만 분홍빛 솜사탕 같은 입술.
그런 백현이를 보고 있으면 정말 너무도 행복했고, 웃음이 나왔다.
백현아, 이 꽃은 조화야. 난 니가 정말 조화. 앞으로 시들지 않는 조화처럼 너만 바라보며 사랑할께.
-
세수를 마치고 수건으로 물기를 닦으며 거울을 본다.
내 머릿속에 가득 차지하고 있는 3년 전 나는, 내가 아니다.
그냥 되게 웃긴, 실없는 소리만 해대는 어리숙한 바보. 그게 지금에서야 내가 내린 3년 전 그 아이의 정의였다.
3년 전에 나는 참 행복했었던가? 정말로?
아니, 지금은 그 때의 그 설레임도 남아 있질 않다.
이런 건 나이가 많이 든 후에나 나타난다던데, 아닌것 같다.
그 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정말 확연히 다르다.
[엄마, 지금 준비하고 있어. 엄마가 일주일만에 보낸 연락인데, 지켜야지. 1시 쯤 출발할 것 같아.]
나는 엄마에게 문자를 보낸 후 부엌에 들어가 토스트기에 우유식빵 두개를 넣는다.
비 때문에 햇빛이 보이지 않으니 곧 있으면 정오인데도 새벽같은 낮이다.
곧 있으면 천둥번개도 비 따라서 온다던데, 점점 더 싫어지는 날이다. 왜 하필 오늘 비가 내리는거야.
아니, 오늘 내려야 정상인거구나. 오늘이니까, 오늘.
토스트기에서 파박- 하고 올라오는 토스트를 꺼내다가 바로 앞에 있는 동생 방을 본다.
저 침대 위에 놓여져 있는 분홍색 토끼인형은...
...그래. 내가 그애한테 '줄 뻔' 했던 거.
**
어느덧 크리스마스가 3일 앞으로 다가왔다. 크리스마스 이브는 아닌데, 되게 설렜다.
드디어 백현이와 함께 크리스마스를 맞이하는 건가.
이번 크리스마스는 눈도 온다던데.
백현이와 함께 명동을 다니며 크리스마스 밤을 보낼 생각에 몸이 되게 찌릿했다.
크리스마스가 되면, 평소에 받았던 선물에는 못 미치지만 나도 선물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일단 무작정 코트를 입고, 동생에게 언니 간다라는 말을 냅두고 문 밖으로 나왔다.
"나 인형 되게 좋아해! 너처럼 귀여운 인형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 잠 잘 때 옆에 꼭 껴안고 자게."
아, 그래. 백현이가 했던 말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나는 이 말이 생각나자마자 곧바로 팬시점으로 들어갔고, 이내 몇 분 지나지 않아 백현이와 나를 꼭 닮은 토끼인형을 구매했다.
백현이가 이걸 보고 좋아할 생각을 하니, 또 괜시리 웃음이 지어졌다.
-
토스트를 다 먹을 동안 난 그날을 잼 삼아 함께 곱씹는다.
그때 내가 왜 저걸 살 생각을 다했는지, 나 자신이 되게 촌스러웠다.
그 때의 알바비를 털어서 산 인형이었는데, 그 일이 지나고 나니 비싸고 환불도 안되서 그냥 동생을 주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지금 와서 저 인형을 보니 정말 나랑 그 애랑은 하나도 닮지 않은 인형이었다.
그냥 저 초롱초롱한 눈망울 자체가 마음에 안들었다. 저 목에 달려있는 하얀색 리본도.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아서 나는 동생의 방문을 닫아버린다.
[그래, 마중 나간다니 다행이야. 너 안나올까봐 조금 조심스러웠는데, 잘 생각했어.]
옷마저 다 갈아입으니 엄마의 답장이 와 있다.
나는 답장을 하려다, 어차피 곧 있으면 나갈 것이고 간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으므로, 그리고 귀찮아서 취소 키를 누른다.
비는 계속 오고 있다. 물방울, 자기네들끼리 붙었다 떨어졌다를 계속 반복하면서.
나도 그렇게 붙었고, 떨어졌었다. 하지만 '반복'은 없었다. 그저 한 번 그랬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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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너그입니다.
처음 인사드려요. 반갑습니다 :)
싫은 날은 여주가 싫어하는 '비 내리는 날'을 생각하며 지은 제목입니다.
제목은 그닥 별 신경 안 쓰셔도 됩니다.
아, 그리고 이건 단편인데 01,02로 전개 할 계획입니다.
보고 가시면 댓글 부탁드려요 ^_^
맞춤법 오류, 오타 지적 감사히 받겠습니다.
피드백도 어느 정도는 해주세요. 말도 당근과 채찍을 받고 사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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