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니까 내가 명수를 좋아하는 거 같아서."
아, 좆됐다. 차마 입으로 꺼내지 못한 한마디였다.
1. 어쩌면 처음부터 안 될 인연이었을지도…….
때는 바야흐로 무려 6개월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 꽃 피는 춘삼월. 나는 그 당시 K대학교 경영학과에 입학한 그저 풋내기 대학생이었다.
대학교는 뭐가 이리 넓은 건지 여긴 어디요, 저긴 어딥니까, 혼자 안절부절 못하며 헤매 이던 중 내 발에 걸려 꼬꾸라진 것으로 기억한다.
지금 생각해도 지우고 싶은 과거이며 난 어쩜 그리 엉성한지 쪽팔려서 남 몰래 얼굴을 붉히고 있었는데 나 혼자 있다고 생각한 그 외딴 곳에
다른 무리가 있을 줄이야.
"괜찮아?"
고개를 들며 소리 나는 쪽을 바라보니 허리를 숙인 채 나를 마주보는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남자의 눈은 굉장히 깊다고 해야할까,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잘 모르겠지만 그대로 시선이 멎어버려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렇게 멍하니 있다가 나 혼자 또 화들짝 놀라며 허둥지둥 무릎과 엉덩이를 털고 일어났다. 정말 잘생겼다고 생각했다.
그나저나 어디서 본 듯한 얼굴인데 잘 생각나지 않았다. 솔직히 이런 얼굴이면 잊어버릴 수가 없는데 말이다.
감사하다는 말만 번복하며 머리를 굴리고 있는데 그 남자가 방긋 웃는다.
요즘 남자 연예인들처럼 씨익 하고 올라가는 입꼬리가 아니라 그냥 남자다운 웃음이라 그게 더 와닿았던 거 같다.
아, 생각났다. 내가 나온 남고에서 잘생겼다며 유명하던 선배였다. 가끔씩 급식실에서 멀리서 보는 게 전부였던 지라 잘생겼구나-
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가까이서 보니 이건 그 정도가 아니었다.
진짜 신은 불공평하다는 게 피부로 확 와 닿아 가슴이 꽂히는 기분이더라.
이 남자는 신의 불공평함을 온 몸으로 설명하고 있었다. 안 돌아가는 머리를 아침부터 열심히 굴리며 생각해낸 게, 그 선배 이름이 김명수 였지, 아마?
"너, 우리학교 후배 맞지."
"신흥고 말씀하세요?"
"그… 이름이 뭐더라……. 이성종!"
적지 않게 놀라 두 눈을 크게 떴다. 내 이름을 어떻게 아는 거냐고 물어보기도 전에 명수선배가 대답했다.
"급식실에서 몇 번 봤는데 기억 안나? 전에 후배 중에 예쁜 애 있다고 이름 많이 들었는데 그게 너였네."
또 웃는다. 그저 머릿속이 멍해지고 한동안 벙쪄 있는데 봄바람이 머리카락을 스치고 지나간다. 내가 고등학교 때 그렇게 유명했던가?
어찌되었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선배가 나와 같은 과라는 걸 안 건 같이 경영학과 건물을 걸어가며 문 앞에 도착했을 때였다.
명수선배는 먼저 친하게 지내자고 하며 내 번호를 가져갔고 얼떨떨했지만 난 번호를 찍어주었다.
그리고 손을 흔들며 헤어졌다. 친절하고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한 호감 정도가 전부였다, 그 당시의 감정은.
그 이후로부터 시간이 흘러 흘러 6개월이 지난 후 지금은 명 선배와의 연락은 약간 뜸해졌지만 자주 만났었고 친분도 쌓였다.
그 과정에서 나 혼자 서툰 감정을 키웠고 그러던 도중 성규 선배와 친해져 속 이야기까지 터 놓는 사이가 되었다. 이렇게 빨리 친해진 계기는
성규 선배와 사귀던 애인이 헤어지고 내가 도움을 많이 줌으로써 그 형이 나에게 의지했고 나 역시 의지했기 때문 이랄까.
하지만 명수형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는 않았다.
나 조차도 자세히 모르는 애매모호한 감정을 말하고 싶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사적이고 지극히 개인적이었으니, 고민을 나누거나 키우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여느 때와 같이 성규형과 카페에서 마주보고 앉아 과제를 하고 있는데 성규형이 앞에 있던 레몬에이드를 확 들이켰고 콜록대는
형의 등을 토닥여 주고 있는데 뜬금없지만 그 때 티슈로 입가를 닦던 성규형이 말을 꺼낸 것이다.
설명했다시피 진지한 이야기를 할 분위기는 아니었다.
"너 명수 알지?"
난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지내던 형이지만 서로 몰랐어도 잘생겼다고 지나가다 이름 한 번쯤은 들어봤을 형이라 모를 수가 없었다.
성규형이 명수형하고 스스로 친하다고 하는 얘길 들은 게 2달 전으로 기억난다. 성규형의 손은 가만히 있지 못하고 자꾸만 움직였다.
"그니까 내가 명수를 좋아하는 거 같아서."
아, 좆 됐다. 아마 입으로 꺼내지 못한 한마디였다.
사실 튀어나올 뻔 했지만 손바닥으로 입을 가리며 간신히 막았따다. 그 이후로는 성규형이 무슨 말을 했었는지 도저히 기억이 나질 않는다.
나도 명수형을 좋아하는데 성규형도? 이 무슨 삼류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상황인데!!
사실 그럴 것도 없던 게 명수형은 워낙에 잘생기고 성격도 서글서글하고 좋으니 우리학교 내에서 속앓이 하는 사람만 수십 명 일거고
그 사람들이 서로 잘 알고 편하다는 건 어쩌면 확률적으로 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눈치를 줘도 모르더라. 요즘 들어 피하기만 하고. 아, 이미 알아버린 건가?"
"다시 한 번 연락해봐. 나도 요즘엔 잘 못 봤는데……."
"근데 전에 사귀던 애가 맘에 걸린다."
"그 애가 맘에 걸릴 게 뭐야. 좋으면 좋은 거지. 먼저 대쉬 해봐."
성규형의 피부는 하얗다. 그 하얀 피부가 부끄러움에 의해 발그레 해지고 작게 뜬 눈은 수줍은 웃음으로 곧 사라지고 그 모습은 내가 봐도 귀엽다.
내가 먼저 명수형한테 말해 볼까. 그런데 성규형을 두고 어떻게 그런 말을 해. 나한테 얼마나 배신감을 느끼겠느냐고.
손가락으로 허벅지에 자그마한 사각형을 계속 같은 자리에 반복해서 그린다. 머릿속이 새하얗다.
내가 어떻게 그래.
"나는 형 응원할게. 잘됐으면 좋겠다. 행쇼!!"
이제 빼도 박도 못하게 되었다. 이젠 명수형이 정말 혹시나 기적에 가까운 확률로 나를 좋아했다고 해도 사귈 수가 없다. 아, 이제 진짜 어떡해.
그냥 땅에 얼굴을 쳐 박고 소리치고 싶었다. 아무에게나 붙잡고 소리치고 싶었다. 왜 이렇게 멍청하고 왜 이렇게 바보 같은 거냐고.
답답하고 먹먹한 이 맘을 어떻게 달래야 할지 잘 모르겠다.
"고마워."
성규형이 웃는다. 아, 이제 이대로 성규형이랑 명수형이랑 사귀는 거고 난 밑도 끝도 없이 병신이 되어가는 거고 그와 함께 내 감정도 그대로
죽어버렸으면 좋겠다. 가장 좋은 결말이었다. 그냥 나 혼자 참아내면 되는 거니까.
과제를 어느 정도 끝내고 카페에서 헤어져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명수형에게 문자를 보냈고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제발, 제발, 제발 받아라.
"여보세요."
핸드폰 너머로 들리는 우형이의 목소리가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더라. 그게 약 20분 전 일이고 지금은 반가운 남우현을 만나 남우현의
자취방에서 휴지만 손에 쥐어 잡고 펑펑 울어 제끼고 있었다. 남우현은 얼음을 까드득 까드득 씹으며 뭐냐는 듯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소주는 있는데 안주가 새우깡 뿐이다. 가져올까?"
"그냥 새우깡만 줘."
훌쩍. 그 소리가 듣기 싫었는지 남우현은 내 등을 팍 내리치고 싱크대 아래 서랍에서 새우깡을 꺼내 나에게 던졌다.
윗부분을 잡아 뜯는 뒤 눈물과 함께 새우깡을 먹었다. 결국 소주를 들고 온 우현은 내 앞에 털썩 주저앉아 소주병을 깐다.
"왜 우는데 이 가스나 같은 새끼야."
"성규형이 명수형을 좋아한데."
"뭐?"
되물으며 소주한잔을 훌쩍 들이키고 크- 하더니만 새우깡을 씹어먹는다. 얘는 내 말을 제대로 듣고 있긴 한 건가.
"너 저번에 명수형 좋다고 했잖아."
"내가?"
"그 이주 전쯤에 나랑 술 마셨을 때. 취해서 기억 안 나나?"
바삭바삭 새우깡만 서로 씹어먹었다. 내가 그런 말도 했구나- 하는 한심한 생각을 하고 있는데 머릿속에 번개처럼 진짜 술 마시면 안되겠다!
라는 생각이 스쳐 지나간다. 머리를 쥐어 싸맸다. 내가 혹시 다른 술자리에 가서도 그런 말을 한 건 아닐지 걱정이 되는 거다.
"성규형이 나랑 진짜 친하거든. 그래서 내가 잘되라고 응원해줬다. 행쇼 라고도 해줬어."
"너 명수형 좋다며."
"응."
"근데 왜?"
친하다니까. 웅얼거리며 말하니 남우현이 나에게 다가와 그 큰 손으로 내 등짝을 후려친다. 아 졸라 아파! 소리치고 싶었지만 더 맞을 거 같아서
아랫입술을 깨물며 눈물만 찔끔 내보일 뿐이다. 하필 손이 닿지도 않는 부분을 때려서 어루만지지도 못하고 쓰라림을 고스란히 느끼고 있었다.
"팔자 좋은 소리한다, 병신새끼."
"……."
"많이 좋아하는 거 아니지?"
"응."
"그럼 마음 접어. 성규형에, 이성열에, 이성종까지. 아주 성 트리오를 다 잡아 먹네."
새우깡만 우적우적 화난 듯 씹는 남우현을 바라보았다. 우현이는 혀만 끌끌 차며 내 손에 소주잔을 쥐어주고 소주를 따라주며 마시라고 고갯짓했다.
어찌되었든 후딱 들이키니 쓴 맛이 확 올라오는 게 나쁘지만은 않았다. 이래서 다들 술을 찾는 건지.
"근데 성열이가 왜?"
"걔도 한 일주일 전쯤인가 나보고 김명수 좋다고 털어놓더라."
헐. 나 남우현 전화 안 받으면 이성열한테 말하려고 했는데 큰 일 날뻔했네. 뻑 하면 나랑 똑같은 상처 줄 뻔 했잖아.
우현이가 전화받은 게 얼마나 다행이야.
"김명수 좋은 이미지 일지는 몰라도 그냥 어장 놓는 거 같은데 너만 알고있어라. 알았지? 넌 그 어장에서 빠져나오고, 깨끗하게 맘 접어라.
다른 애들한테는 말하지 말고. 걔네는 또 괜히 상처받잖아."
고개를 끄덕인다. 새우깡만 씹어대다가 결국 소주를 한 잔 더 들이킨다. 남우현은 그런 나를 잠깐 놀라운 눈빛으로 바라봤다.
사실 남우현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니다. 나는 그냥 빨리 깨끗하게 마음 접고 어장에서 몸만 나오면 되는데 그게 내 생각대로 되냐고.
사람 마음 이끌리는 대로 가는 법이다. 우현이에게는 말 못했지만 내 마음은 이미 접을 수 있는 한계치를 넘어버린 듯 하더라.
데려다 주겠다는 남우현을 뒤로하고 휘청휘청 버스정류장으로 걸어갔다. 많이 취하진 않았지만 술 냄새도 날 거고 얼굴도 빨갛겠지.
가을이라 날씨가 쌀쌀하다. 금새 차가워진 손을 빨갛게 익어버린 내 눈 두덩이와 볼에 가져다 대었다. 따뜻해.
빨리 가라앉아라. 버스도 빨리 와라. 눈이 자꾸 감기려고 하는데 심상치가 않았다. 마른 세수를 해본다.
"어? 진동이다."
속으로 했으면 됐을 혼잣말을 입으로 내뱉는 게 아무래도 제정신은 아닌 듯싶다.
주머니에서 짧게 진동이 울렸고 문자가 와있길래 확인하니 명수선배였다. 그러고 보니 우현이랑 술 마시기 전에 문자를 보낸 기억이 떠올랐다.
그런데 이제야 대답하네. 쪼그라드는 심장에 억지로 피식 하고 웃었다. 바보 같아, 진짜.
+미안, 늦게 봤다.+
+그런데 무슨 일 있어?+
오오, 연속으로 두 번이나. 그런데 무슨 일이라니? 내가 세시간 전쯤에 보낸 문자를 확인한다.
+선배, 나 어떡해요.+
미친. 핸드폰을 땅바닥에 내리꽂아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산지 고작 3주된 스마트폰을 땅바닥에 꽂아 박살내버릴 수는 없었다.
수중에 현금이 고작 34800원뿐인 가난한 대학생이 무슨.
그나저나 3시간 전에 나는 도대체 무슨 심정으로 이렇게 밑도 끝도 없이 어떡하냐는 말만 보냈을까. 시간을 되돌리고 싶다.
후회에 찬 한숨이 새어나오고 앞머리와 함께 얼굴을 쓸어내린다. 답, 답 해줘야지.
+아무것도 아니에요.+
전송버튼을 누르고 나서 핸드폰 액정을 쓸어 내리며 또 다시 후회. 도대체 이게 뭐야… 울고만 싶어라.
절망하고 있는 사이 버스가 왔다. 가방에 넣어두었던 지갑에서 교통카드를 재빨리 꺼낸 뒤 마지막으로 버스에 올라타며 카드를 기계에 찍었다.
내가 찍자마자 문이 닫히고 출발하는 버스에 봉에 어깨를 찧었다.
아야, 아프다. 대충 슥슥 문지르며 부딪혔던 봉을 잡고 교통카드를 다시 지갑에 넣은 뒤 가방안에 넣고 닫았다.
그리고 안쪽으로 들어가 손잡이를 잡고 한 손으로 핸드폰을 확인한다.
+뭐가 아닌데+
궁금해 하는게 당연하다. 나 같아도 저렇게 어색하게 말돌리며 답 보내면 다 눈치 까겠네. 어떻게 대답해야할까 잠깐 고민했다.
+다 해결됐어요+
이제 문자 안 오겠지? 미소지으며 핸드폰 알림을 끄고 주머니에 넣었다. 신경이 쓰이지만 애써 무시하고 창밖을 본다.
항상 그랬으니 곧 잊혀지겠지. 답답한 가슴을 꾹꾹 눌러쳐도 시원히 트이지가 않는다.
-
ㄲ..끝인데요..흡..
미안해요 불타는 19일의 금요일에 불타는 떡설을 쓰고 싶었는데 내 기분이 너무 아련터져서 차마 그럴 수가 없었어요..
그런데 나는 떡설볼거야..ㅁ7ㅁ8
제 필력 딸리는 게 느껴져서 더 아련터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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