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족
10
눈을 떴을 때, 항상 들려오던 빗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나는 이불을 걷고 바로 창문 앞으로 가서 커튼을 젖혔다. 놀랍게도 하늘은 말끔했고 비가 오지 않고 있었다. 마냥 쨍하고 맑은 날씨는 아니었지만 습하지도 않고 적당히 햇빛이 비치는 좋은 날씨였다.
" 식사하러 내려오시랍니다. "
늘 그렇듯 늙은 여자의 힘없는 목소리가 복도에 울려퍼졌다. 나는 욕실로 들어가 씻고, 허리까지 굽이치며 내려오는 긴 머리칼을 빗어넘기고는 방문을 열고 나왔다.
" 몸은 좀 어떠십니까. "
" 괜찮아졌어. "
나와 정국은 동시에 서로를 보고 웃었다. 정국이 요새 부쩍 자주 웃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내가 홀에 도착했을 때 고모부와 고모는 나를 흘낏 쳐다보았을 뿐 아가야, 같은 호칭은 입에 올리지도 않았다.
그들은 조용히 식사를 했고 이따금씩 나를 훑어보았다.
나는 차라리 이런 식의 대화가 없는 식사가 더 편했다. 억지로 꾸며낸 듯한 다정한 목소리로 -하렴, -어떠니 하고 같잖은 음식들을 들이미는 것보다 이렇게 각자 그릇에 고개를 처박고 먹는 것이 훨씬 나았다.
귀족
11
나는 방으로 돌아와서 창문을 열고 오랜만에 보는 햇볕을 구경했다.
손을 내밀면 항상 그랬듯 빗방울이 들이치는 게 아니라 따스한 햇빛조각들이 손에 부딪혔다. 그 간질간질한 느낌이 너무 좋아서 한참 손장난을 하다가 정국을 불렀다.
정국이 방을 가로질러서 창가에 앉아있는 내게로 다가왔다.
" 이것 봐, 나 햇빛도 손에 넣을 수 있어. "
나는 햇빛이 손에 닿자 그대로 그 것을 움켜쥐면서 정국에게 보여주었다. 정국이 그 것을 보고 씩 웃었다.
" 너도 비 오는 것 싫다고 했잖아. 오늘은 기분이 한결 낫지? "
" 그렇네요. "
" ..있잖아, 혹시나 나중에 집에 돌아가면 말이야. 그때도 내 경호원 해 줘. "
" 네. "
정국이 대답을 망설이지 않아서 좋았다. 평소같이 대답을 안한다거나 한참 있다가 대답하지 않아서 좋았다. 정국은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나와 함께 창 밖을 내려다보았다. 밖에서 들어온 바람이 내 머리카락을 쓸고 지나갔을 때, 고개를 돌려 정국을 보았다. 나는 햇빛에 빛나는 정국의 큼직한 눈동자가 새삼스레 예쁘다고 생각했다.
귀족
12
나는 오랜만에 맑은 저녁하늘을 보면서 잠이 들 수 있었다.
하지만 잠든 지 얼마나 되었을까. 갑자기 내 방 문이 벌컥 열렸다. 들어올 때 문 세 번 두드리랬잖아, 라고 말하려던 순간 정국의 다급한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정국의 머리카락은 땀으로 젖어 이마에 달라붙어있었다. 문 손잡이를 한 손으로 잡은 채 거친 숨을 몰아쉬는 정국에 내가 깜짝 놀라 물었다.
" 왜? 왜 그러는데? "
" 불, 불이요. 불이 났어요. "
정국이 힘겹게 말을 마치고는, 곧바로 침대에 앉아있는 내 손을 끌어당겼다. 나는 정국이 이끄는 대로 정신없이 내 방에서 빠져나왔다. 방에서 나오는 순간 매캐한 불 냄새가 코를 찔렀다. 자욱한 연기가 온 천장을 뒤덮고 있었으며 사람들의 비명소리와 고함소리가 뒤섞여 시끄러웠다.
" 빨리 오세요. "
정국이 머뭇거릴 시간이 없다는 듯 내 손을 꽉 쥐고 계단을 빠르게 내려갔다. 나는 계단을 급히 내려가다가 긴 치맛자락에 걸려 넘어질 뻔 했다. 평소에도 길고 경사진 계단과 복잡한 복도가 싫었지만 이토록 원망스러운 적은 처음이었다. 우리 둘은 아무도 없이 연기만 가득한 복도를 내달렸다.
한참 달리다가 저기 밑층에서 홀에서 빠져나와 급하게 달려가는 고모와 고모부가 눈에 보였다. 곁에는 늙은 여자도 함께였다. 셋은 빠른 속도로 밖으로 나가는 복도에 들어서고 있었다. 그들은 곧 집을 빠져나갈 것 같았다.
나는 터져나올 것 같은 숨을 억지로 들이쉬면서 달음박질했다. 눈 앞이 뿌얘질 정도의 연기에 정신을 차리기가 쉽지 않았다. 정국은 내 심상치 않은 숨소리에 고개를 돌려 내 얼굴을 확인했다.
" 조금만 더 가면 돼요. 그러면 나갈 수 있어요. "
" 알았어. "
정국이 약간 느슨해지려는 내 손을 좀 더 세게 붙잡았다.
계단들과 꽤 많은 복도를 지나온 것 같았다. 홀이 눈 앞에 보이고, 더불어 출구로 통하는 복도도 눈에 띄었다. 정국이 조금만 더요, 하고 중얼거리던 그때에 갑자기 천장에서 콰르르, 하는 소리가 났다.
그러더니 바로 뒤에서 천장과 벽에 붙어있던 나무판자가 하나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꽤 무겁고 커다란 나무판자였다. 뒤를 확인하는 순간 정국과 나는 온 힘을 다해서 뛰었다. 저 나무판자들이 우리 머리 위에 떨어져 넘어진다면 우리는 그대로 끝장이었다. 하지만 점점 뒤에서는 수많은 나무판자들이 위협적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콰르르, 하는 소리가 다시 들려오는 그때 정국이 갑자기 내 손을 놓았다.
내가 놀란 얼굴로 정국을 돌아보자, 정국이 나무판자 여러개를 어깨에 받치고 더 이상 나무판자들이 떨어지지 않도록 벽을 붙잡고 있는 게 보였다. 정국이 이를 악물고 나를 올려다보았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 ..빨리 가요. "
" 너는! "
" 빨리요! 제가 가면 이것들 다 무너져요. "
" 어, 어떻게 가-. "
나는 발을 구르면서 울었다. 얼른 나오라고 손짓해도 정국은 움직이지 않았다.
" 전 알아서 나갈 수 있어요. 저희 아버지도 그랬잖아요. "
정국이 힘을 실어 한글자씩 내뱉고는 씩 웃어보였다.
나는 정국과 복도를 흔들리는 눈빛으로 번갈아보다가 결국 뛰었다. 눈물이 나와서 앞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데도 뛰었다. 복도 끝에 거의 다 가서 마지막으로 정국을 돌아보았을 때까지도 그는 그 자세 그대로 가만히 있었다.
귀족
13 (完)
왜 그때 그 날은 비가 오지 않았을까.
지겹도록 싫었던 비였는데, 정국에게 비 때문에 옷을 말릴 수가 없다고 몇 번이고 투덜거렸었는데, 그 날은 비가 오지 않았다. 비가 오지 않았다면 그때 그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거라고 되뇌이곤 한다. 아니, 차라리 정국과 내가 그 저택으로 가지 않았었더라면 그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나는 그토록 꿈에 그리던 집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집에 돌아와서도 내 경호원이 되어주겠다던 정국이 없다. 아버지처럼 죽음을 주저하지 않는다던 정국은 끝내 나무판자를 치워내지 않았다. 아버지와 달리 그는 돌아올 수 없었다. 내가 저택 앞에 서서 밤새 울었는데도, 내 울음소리가 들릴 때면 주저않고 바로 나타나던 정국이었는데도 그는 그 저택에서 나오지 않았다.
순간은 짧았지만 그의 그 눈동자는 절대 잊지 못할 것이다.
오늘처럼 비가 오는 날이면, 천둥번개가 칠 때면 정국을 기억한다. 나를 잠자코 지켜보던 정국을 기억한다. 내 어깨를 두드리던 정국을 기억한다.
그때의 나는 정국에게 귀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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