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년 X월 X일 오랜만에 지호를 만났다. 저번에 보고 아마 3년만인가? 이제 중2가 되는 지호는 아직 키가 나보다 작다. 지호는 나를 보자 흠칫 떨며 외숙모 뒤로 숨었다. 외숙모가 어른들끼리 할 얘기 있다며 유권이형이랑 놀고 있으라고 나와 지호를 내 방에 밀어 넣는다. 방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듣고 지호가 벌벌 떤다. 나를 바라본다. 지호야, 왜그래? 아직도 여기가 아파서 그래? 손으로 그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괜찮다. 지호는 이미 소리를 못지르니까. X년 X월 X일 외숙모가 여기 한동안 있다 가신다고 했다. 일주일이 될지 한 달이 될진 모르겠다. 지호가 외숙모 옷자락을 잡으며 떼썼다. 그래봤자 아. 아. 하는 소리만 내는 게 다다. 외숙모는 이상해하시며 니가 좋아하는 유권이 형이랑 놀라고 방으로 보내신다. 지호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몸이 파르르 떨린다. 오늘은 기분이 좋다. 지호야, 형이랑 놀자. 같이 보드게임도 하고 기집애같지만 공기놀이도 했다. 지호는 매번 진다. 지더라도 아. 우. 하는 소리만 낸다. 시끄러워서 머리를 한대 쳤다. 머리 병신된 걸로 모자르냐? 존나 시끄럽네. 지호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기분이 나빠져서 한 대 더 쳤더니 방바닥에 엎어졌다. 어차피 어른들은 다 나갔으니까 상관없다. 기분 잡쳤다. 그냥 침대에 누워서 잤다. X년 X월 X일 인터넷에 글을 올렸다. 어렸을 때 사촌동생 밀쳤다가 뒤로 넘어져서 머리 다치고 지체장애인 됬는데 말도 못하게 됬다고. 근데 죄책감은 안 느껴진다고. 이거 이상한 거냐고. 사람들에게 욕만 먹고 글을 지웠다. 다 병신들이다. 자기들도 내 처지 되보면 공감할거다. 맘대로 갖고 놀 수 있는 장난감 같이 생각하면 된다. 지호 피부는 사춘기 중2짜리 애 답지 않게 부드럽다. 여자같은 피부였다. 자세히 보면 얼굴도 은근히 예쁘게 생겼다. 키도 조그마한 게 좋았다. 허벅지를 만져보았다. 지호가 몸을 뒤척이며 피했다. 오기가 생겨서 방구석에 밀어넣고 얼굴을 만져봤다. 우유같이 부드러웠다. X년 X월 X일 오늘은 다같이 외식을 했다. 내가 좋아하는 소고기였다. 내 옆에서 고기를 굽던 엄마가 맞은편에 앉은 외숙모에게 축하한다며 말을 꺼냈다. '축하해, xx아, 지호 점점 나아지고 있다며.' 뭐라고? '유권아, 너도 좋지? 지호 이제 1년 정도만 치료 더 받으면 다시 말 할 수 있댄다. 어휘는 아직 부족하겠지만. 어쩜 좋니. 잘됐대 얘!' 난 집었던 고기를 내려놓았다. 그럼 나는? 난 어떻게 되는거지? 그 새끼가 다 말하면? .... 식당에 놓인 아이스크림을 퍼와 지호에게도 주었다. 바보처럼 기뻐한다. 그럼 그렇지. 이 바보새끼가 뭘 알겠어. X년 X월 X일 오늘 외숙모가 돌아가신다. 지호랑 헤어져야 한다니 아쉽다. 떠나는 지호에게 공기세트를 선물로 주었다. 너 공기 잘 못하잖아. 다음에 볼 땐 연습해 오기야! 지호가 나를 잡고 방으로 끌고 들어갔다. 뿌리치지도 못하고 가만히 끌려가줬다. 지호가 펜을 엉성히 잡고 삐뚤 빼뚤 종이에 글씨를 쓴다. '유건이 형 고마워' 난 유건이 아니라 유권인데? '2년 후 만나 꼭 다시' ... 그리고는 재빨리 뒷면에 무언갈 끄적거리더니 꾸겻니 바닥에 버렸다. 곧바로 어기적 거리며 현관문으로 뛰어가는 것이다. 대충 배웅을 해준 뒤 방으로 돌아와서 그것을 읽어 보았다. '2년 후 찾아갈게 꼭' 어쩐지 소름돋아 휴지통에 버렸다. 장난감이 없어지니 허전하다. 방 안의 남자가 일기장을 읽던 걸 멈추고 의자에 앉은, 아니 묶여있는 남자의 옆에 놓는다. 그 방이었다. 지호의 인생을 쥐어 비틀어놓은 그 방. "형, 반갑네. 이렇게 다시 만나니까." 묶인 유권이 지호를 노려보며 몸을 비틀어댔다. 소용이 없었다. 입을 달싹댔지만 단단히 붙여진 청테이프 덕분에 말을 할 수 없었다. 유권은 지호가 청테이프를 떼내자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하려던 말을 급하게 쏟아내었다. "야, 우지호. 왜이러냐 나한테?! 이거 풀고 말해. 너 후회한다 진짜, 풀어. 안 풀어?" "후회하는 건 형이지. 내가 왜이러는지 몰라서 그래?" "어 몰라, 모른다고. 내가 너한테 얼마나 잘해줬는데 이러냐? 씨발. 머리 병신 새끼가 지랄이야." 지호가 유권의 뒤로 갔다. 가만히 감정을 억눌렀다. 1년 간 축적해온 감정들, 아니 그 옛날 옛적부터.... 그 모든게 지호의 볼을 타고 흘렀다. 뜨거운 눈물이 되어 흘렀다. 기쁨의 눈물이었다, 이제 곧 모든 걸 이룰테니. "내 머리를 고장낸 건 상관없었어. 난 형이 좋았어. 내가 바보가 되도, 말을 못해도 괜찮았어. 그 때 내가 한 말 기억하지?" 울음섞인 고백에 유권은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일기장에 낱낱이 적힌 그의 소행은 그도 기억하고 있었다. "이렇게 2년 후에 찾아왔잖아...너무 좋아, 유권이 형. 너무 좋아. 그때처럼 나를 때리고, 만져도 좋아. 난 기뻐...." 지호가 바닥에 떨어져있던 야구방망이를 집어든다. 몇번 바닥을 툭 툭 두드린다. 스르릉거리는 쇠소리가 유권에게도 들렸다. 그 순간 지호가 다시 청테이프로 유권의 입을 막는다. 웁, 웁하고 빠져나가려는 비명과 몸부림이 가득 찬다. 지호가 계속 흐르는 눈물을 닦는다. 그 자리에 기쁜 웃음이 가득찬다. "내 기쁨을 형도 알게되면 좋겠다. 그치? 내가 알려줄게. 똑같이 만들어줄게. 나는 몇년 밖에 못누린 기쁨, 형은 평생 누릴 수 있게 해줄게. 안 아파, 그치? 김유권....나처럼 돼 봐." 금속배트로 강하게 내려친다. 죽었을까? 숨은 붙어있다. 쇠 배트를 내려놓자 달그락 거리는 소리가 난다. 얼굴에 튀긴 피를 닦았다. 벽에 붙은 거울을 보았다. 평소와 같은 표정이다. 기절한건지 고개를 떨군 유권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차라리 죽었으면 좋았을것을....지호는 그 방을 나갔다. 우지호의 17년 인생, 지독한 인생의 막이 열린다. 지호는 그때서야 살아있음을 느꼈다. 그리고 직감했다. 지금 이 순간은 시작에 불과하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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