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진아… 문 좀 열어줘…
…석진아…
…….
석진이 숨을 거칠게 몰아세우며 잠에서 깨어났다. 몇 년만에 꾼 꿈일까. 석진은 식은 땀이 줄줄 흐르는 줄도 모른 채 눈썹 언저리로 손을 갖다대었다. 심장이 아직까지도 쿵쿵대었다. 의도적으로 나타난 거겠지. 다 알고 있으면서 기억 안나는 척 하는 거겠지. …왜. 이유가 뭘까.
그의 거친 숨소리에 금방 잠에서 깬 진리가 걱정되는 얼굴로 석진의 팔을 살포시 잡았다. 하지만 밤새 옆에 붙어있었다는 사실에 기뻤는지 그녀는 곧 작게 미소를 지었다.
라퓨타
천공의 성
김석진은 주말이 지나고 나서야 학교에 나왔다. 그동안 김태형의 고집 아닌 고집 때문에 먹었던 그와 김남준과의 점심은 오늘부로 끝이었다. 이래서 익숙해질까봐 그토록 뿌리쳤던 건데. 나는 종이 치자 마자 내 자리로 다가오는 김태형을 못 본 척 하며 책상 위에 엎드렸다. 오히려 이 상황에서 그의 눈치를 보듯 쳐다보면 같이 급식 먹던 것에 미련이 남기라도 한 것처럼 보일 것 같았다.
"전학생. 좋은 소식."
"……."
"자는 거야?"
자는 척이라도 해보려 애썼지만 내가 책상 위로 얼굴을 대고 있는 쪽을 향해 몸을 숙여 눈높이를 맞춰오는 김태형의 돌발 행동에 나는 결국 감았던 눈을 뜨고선 아니요… 마지못해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러자 김태형은 한번 씨익 웃더니,
"석진이가 너랑 같이 밥 먹고 싶대."
내 귀를 의심할만큼 거짓말 같은 소리에 나는 대답없이 눈만 깜빡였다. 분명 저기까지 들렸을 텐데 김석진은 아무 반응도 없이 창가 쪽에서 조용히 휴대폰만 만져대고 있었다.
"그치, 석진아?"
"……."
같이 먹는 것이 아닌, 그냥 혼자인 내가 불쌍해서 같이 먹어주는 듯한 느낌이 들어 썩 달갑지가 않았다. 또 며칠 사이에 갑작스레 저런 식으로 태도가 바뀌었다는 게 어딘가 찜찜하기도 했고. 책상 위에 몸을 엎드린 채 김석진의 옆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자니 전에 김석진이 학교에 오면 꼭 자기네 반으로 찾아오라고 신신당부했던 그 3학년 여자가 생각이 났다. 이름이 뭐였더라. …김유빈이었나? 나는 몸을 일으킨 뒤 핑계도 댈 겸 입을 떼었다.
"저 점심시간에 어디 좀 가야 되서요."
그럼…
김석진은 말끝을 흐리며 의자에서 일어서는 날 한번 흘끗 쳐다보다가 다시 휴대폰 액정 위로 시선을 돌리고는 말했다.
"그냥 같이 먹지."
"……."
"학교생활 편하게 하고 싶음 지금이라도 내 사촌이라고 하고 다니든가."
그의 말에는 덤덤한 듯 하면서도 어딘가 상대방을 무시하는 듯한 말투가 깔려있었다. 나는 어이없다는 듯이 실소를 한번 흘리고선 그대로 교실을 나왔다. 전학생, 하고 부르면서 쫓아올 것 같던 김태형도 더 이상 따라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찾아오게 된 게 3학년 4반 교실 앞. 수험생이라는 이유로 다른 학년보다 점심을 더 일찍 먹었기에 사람이 많은 걸 보니 이미 다들 밥을 먹고 돌아온 후인 듯 했다. 나는 침을 한번 꼴깍 삼키고선 말을 무어라 붙일지 고민했다. 사실 괜히 왔다는 생각부터 들었다. 그저 김석진의 도발에 욱해버려서 찾아와 버린 건데…
"진짜 왔네?"
교실 안에 있을 줄 알았던 김유빈은 예상 외로 내 뒤에서 나타났다. 그녀는 샐쭉 웃고 있었다. 갓 담배를 폈는지 담배냄새가 확 풍겨왔다. 잔뜩 긴장한 나는 허리 숙여 인사할 생각도 않고 고개를 빳빳이 들고선 아무 말 없이 그녀를 응시했다. 그러자 김유빈은 곧 제 친구들을 부르고선 내 주위에 세웠다.
"우리 이제 어디 좀 갈 건데, 김석진이 안오면 구라 친 건 아니니까 덜 맞을 거고 김석진이 오면 더 맞을 거야. 알았지?"
너가 석진이한테 친한 척 하는 게 짜증나서 그래… 김유빈이 킥킥대며 덧붙였다.
심장이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나도 미쳤지. 누가 봐도 이럴 상황이었는데 여길 내 발로 찾아오다니. 김유빈이 계단 쪽으로 턱짓하자 그녀의 친구들이 양쪽에서 내 팔을 잡아왔다. 나는 반항할 새도 없이 끌려갔고, 복도를 구경하고 있던 3학년들도 당연한 결과라 생각했는지 별 관심 없이 저들 교실로 들어갔다.
그렇게 반 강제로 끌려온 곳은 급식소 뒷편이었다. 건물 사이사이라 눈에 띄지도 않았고 햇볕이 들지도 않았다. 잡초처럼 무성히 난 풀 위에는 담배꽁초가 수십개는 버려져 있었다. 나는 시선을 어디다 둬야 할 지 몰라 그저 땅바닥 위로 떨구었다. 오는 내내 들었던 얘기로만 추측해보면 김유빈이나 그녀의 친구들은 모두 내가 거짓말 하고 있는 거라 생각하는 듯 했고, 거짓말이 아닐 지라도 우리반 여자애들의 말을 토대로 내가 김석진과 엮이고 싶어한다고 보는 듯 했다. 그래서 날 이렇게 부른 거고. 내가 내 스스로 김유빈을 찾아온 것에 대해서도 뻔뻔하다는 식으로 얘기했다. 일부러 보란듯이 찾아온 거라고.
"야, 방금 방민아가 그러는데 이 년 어제 태형이랑 남준이랑 급식 먹었다는데?"
"그래, 내가 봤다니까. 어떤 여자애 하나 끼워서 먹는 거. 얘잖아."
최대한 덤덤해보이려 노력했으나 말 한마디 한마디에 반응이 오는 건 막을 수가 없었다.
"이름이 뭐라 했지?"
"…김탄소요."
"탄소는 석진이랑 태형이랑 남준이 중에 누가 제일 좋아?"
제 친구들의 얘기를 들은 김유빈이 내게 가까이 다가오더니 화를 삭히듯 숨을 천천히 고르며 물었다.
"……."
그래. 애초에 내가 틀렸던 것이다. 내가 정말 싫었었다면 김태형에게 싫다고, 절대 안먹을 거라고 어떻게 해서든 뿌리쳤겠지. 하지만 나는 합리화 하기에 바빠 내심 좋았던 속을 감추고선 정말 아이들의 말대로 여우년처럼 싫은 척 내빼면서 따라갔고 오늘 김석진의 이상한 태도에도 또 다시 싫어하는 척을 했다. 나는 대답없이 고개를 숙였다. 내 잘못이다. 내 잘못이다…
"음~ 셋 다 좋은가보네."
김유빈의 비아냥 거리는 말투에 그녀의 친구들이 조롱하듯 웃었다. 내가 또 대답을 않자 김유빈은 답답했는지 혼잣말 하듯 수차례 욕을 내뱉더니 내 머리를 손바닥으로 툭툭 내리쳤다. 내 고개는 저 먼 바닥으로 추락할만큼, 내리 꽂혔다.
"미친년이 어디서 자존심을 세워."
야, 대답을 하세요. 대답을. 셋 중에 누가 제일 좋냐니까?
귓가에 울리는 그녀의 목소리에 나는 김석진과 처음으로 눈을 마주했을 때를 떠올렸다. 나를 전부터 알던 사이처럼, 안좋은 일이라도 엮였었던 것마냥 익숙하면서도 불쾌하다는 듯 쳐다보던 그 표정. 점점 더 세지는 강도에 나는 눈을 꾹 감았다. 김유빈은 내 뒷머리채를 잡더니 얼굴이 보이도록 고개를 위로 잡아끌었다.
"넌 석진이는 포기해야겠다. 너 존나 팰 거니까 여기 올 거면 오라고 문자했는데 안 오는 거 보면."
말이 마치기가 무섭게 뺨에 얼얼한 통증이 일었다. 그 손 힘에 내 고개가 옆으로 꺾이자 누군가가 내 머리채를 휘잡고 얼굴을 똑바로 세웠다. 김유빈은 그 위로 다시 뺨을 때렸다. 몇 분이고 예비종이 날 때까지 때리고, 또 때렸다. 나는 울지도, 그만해달라 빌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떳떳하게 고개를 들지도 않았다. 나는 떳떳하지 않으니까.
"어머… 약 좀 발라야겠다. 또 친한 척 얼쩡댔다간 얼굴로 안 끝내. 알았지?"
나를 받치고 있던 누군가가 팔을 쓱 빼자 온몸에 힘이 풀렸던 나는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김유빈의 협박을 끝으로 다 교실로 돌아가고 나서야 나는 울 수가 있었다. 왜 그런진 모르겠지만 가슴이 찢어지듯 아렸다. …아… 아아… 참을 수 없는 통증을 그대로 입으로 뱉어냈다. 아무도 보지 못 할 거란 안도감에 눈물이 더 쏟아졌다. 예비종이 친 걸 보면 오후 수업 직전일 텐데 몸을 일으킬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 때, 맞은편 건물 바깥쪽에 누군가 벽에 기대어 서있는 게 보였다. 고개는 정면에 둔 채 곁눈질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눈물이 시야를 가려 흐릿하게 보였으나 새까만 머리칼과 익숙한 분위기에 나는 그가 누군지 단번에 알았다.
마음 같아선 왜 왔냐고 대체 무슨 생각으로 나한테 이러는 거냐고 소리치며 따지고 싶었지만 눈이 마주치자마자 내게 천천히 걸어오는 인영에 말없이 고개를 숙일 수 밖에 없었다. 그는 나와 두 발자국 정도를 사이에 두고 서서, 거의 쓰러지듯 앉아있는 나를 내려다보았다. 이 정도로 아픈 걸 보면 피도 꽤나 났을 텐데 그의 표정엔 안쓰러움도, 놀라움도 없었다. 그저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언제부터 보았을까, 문자를 보고 과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정적이 흐르는 동안 수많은 생각들이 스쳐지나갔다. 결국 수업을 알리는 종이 울리고, 천천히 떼어낸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었다.
"나 죽이러 왔냐."
"……."
난데없는 물음에 내가 말 없이 고개를 들어 그의 눈을 마주하자 김석진은 한참을 날 바라보더니 재차 물었다.
"복수라도 하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