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씨..."
기록적인 폭염 속에서도 냉방 기능이라고는 눈 씻고도 찾아 볼 수 없는 방송실에 발을 들이자마자 욕짓거리가 입에서 맴돌았다. 오른쪽 벽 꼭대기에 달려있는 에어컨은 방학 전에 틀어보려고 고군분투하다 갑자기 흔들린 의자에 방바닥 키스를 할 뻔한 뒤로 거들떠도 안 봤다. 내가 부장을 맡고 가장 다짐했던 게 방송실에 제대로 된 에어컨 하나 놓는 거였는데...
이 학년이 되고, 작년 이 학년 선배들이 올해 그 무섭다는 고삼이 되어 방송부 인생에 종지부를 찍을 때 내게 부장 자리를 맡겼다. 일 학년 세 명과 이 학년 네 명으로 구성된 현재 방송부 중 믿을만한 사람은 나밖에 없다나... 그나마 성실한 김민규라는 방송부원이 있었지만, 걔는 좀.
사실 우리 학교 방송부, 봉사 시간 꽁으로 채우기 위해 들어오는 동아리로 유명하다. 돌이켜 보면 별다른 할 일 없이 살았던 그때가 좋았지만 1학년 중반의 나는 그러지 못했다. 우리 학교 방송부의 위상을 높일 거라며 당찬 다짐을 마음 속으로 했지만 일개 방송부원인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 다짐은 학년 말에 친구들이 봉사 시간을 채우려 아등바등할 때 깨지고 말았다. 편한 게 좋은 거지, 안 그래? 하면서 이 생활에 만족하고, 방송부장이 되어서 일 학년을 뽑을 때도 대충이었다. 어차피 하는 일도 없을 텐데. 우리 학교는 고삼 그딴 거 없고 일 더럽게 시킨다며 한탄하는 순영 오빠를 보면서 아, 꿀 빠는 거 행복하다! 를 외쳤다.
근데 이 행복은 놀랍게도 딱, 한 달만에 깨지고 말았다. 우리 학교는 이 조그마한 방송부에서도 알 수 있듯 고삼들을 엄청 배려해 줬고, 그는 회장 선출에서도 보이는 것이었다. 2학년이 전교 회장... 어찌 되든 난 상관이 없었다. 등교길에 마이에 붙어있는 스티커들을 떼내는 게 귀찮았을 뿐.
회장 선거일, 나는 후보가 누군지도 모르고 그 후보들을 찍기 위해 카메라를 들고 있었다. 아무리 방송부가 한가하다 해도 이런 행사 때는 일한다. 그렇게 의미 없는 셔터질을 계속하던 찰나, 자신을 기호 2번 이석민이리 소개하는 후보자의 당찬 목소리가 내 귀를 후벼팠고 나는 인상을 찡그릴 수밖에 없었다.
"두 번째, 제가 회장이 된다면 점심 시간마다 원하는 학반 한정 신나는 노래로 여러분의 학습 능률을 올려 드리겠습니다. 노래와 더불어, 아침에는 이 잘생긴 얼굴로 학교 소식 및 학업 정보를 브리핑하도록 하고요."
저 말을 마친 이석민은 티 나게 표정이 굳은 날 보고 씩 웃었다.
저거는, 방송부 엿 먹이려는 거 아니면 나올 수가 없는 공약이잖아!
ㅡ
하여튼, 학생들을 위한다는 명목 하에 내세운 공약은 정말 어이없게도 반응이 좋았었다. 이석민은 회장에 당선됐고... 나와 김민규는 4월이 시작된 날부터 쭉, 하루도 빠짐없이, 아침 시간 및 점심 시간에 방송실로 호출당했다. 그 사이에 나는 전혀 안면이 없었던 이석민과 불편하지 않을 정도의 사이가 되었다. 그래도 자기가 내세운 공약이라고 이석민은 아침이 아닌 점심 시간에도 꾸준히 얼굴을 비췄다.
"야, 여기 왜 이렇게 덥냐?"
"알면 에어컨 좀 달아 주지?"
뭐, 여름 다 지났는데. 오늘 노래 뭐 틀 거야. 오늘도 손으로 부채질을 하며 이석민은 방송실로 들어섰다. 이석민의 말에 대한 대답은 모니터를 향한 김민규의 손가락이 대신했다. 허리를 숙여 노래 제목들을 찬찬히 훑어보던 이석민은 석연치 않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무슨, 남돌 노래가 이렇게 많아."
"애들이 틀어달래."
"와, 부장님 권력남용. 그리고 이건 너무 옛날 노래 아니냐?"
"너는 하루에 노래가 여섯 곡, 것도 애들이 잘 알만한 노래로 꼬박꼬박 나오는 줄 아냐?"
"그런가. 그래도 아이오아..."
그거 저번 주에 틀었어, 병'신아. 내 완벽한 선곡표에 자꾸 토를 달던 이석민은 기어이 손바닥으로 차지게 뒤통수를 얻어맞았다. 매번 이런 식이다. 네 달 가까운 시간 동안 쟤와 얼굴을 보며 한 번도 곱게 넘어간 적이 없다. 매번 이건 너무 처지지 않냐, 분위기 좀 맞춰서 틀어라, 아이돌 노래만 명곡이냐... 등등의 이유로 시비가 털렸다. 언제는 내가 너무 화나서 한 마디 하면
"야, 인마. 그딴 식으로 태클 걸 거면 네가 배워서 네가 직접 트세요, 회장님."
"어허, 이게 어디서 또 일 안 하려는 수작이야."
이러며 넘어가는데, 솔직히 반박을 할 수 없지... 아무래도 이석민, 작년부터 날 흠모하다가 저 공약을 내세움으로써 내 관심을 끌어, 막. 그런 잘해보려는 거 아니야? 라는 정말 말도 안 되는 상상을 들게 만든다. 아마 내가 이런 생각을 했다는 걸 알면 이석민은, 네가 나를 좋아하는 거라며 뒈질 때까지 놀릴 게 분명했고.
그리고 한 가지 사실은, 점심 방송 때 우리 사이는 아주 양호한 것이다. 원체 잠이 많은 나는 아침에는 이 세상 사람들 절반은 경험하진 못했을 예민함을 보여 주곤 했다. 그래서 보통 등교하면 바로 교실 책상에 엎드려 자다가 자습을 시작하는데 이제는 자습 종이 울리자마자 시작하는 아침 방송에 강제 출근을 하게 되었으니, 일말의 상냥함도 남아있을 수 없다.
시험 때문에 2주 동안 중지되었던 아침 방송을 재개하던 날이었다. 이 학교는 배려심도 없는지 월, 화, 수, 목까지만 시험 기간을 잡았고, 금요일은 정상 수업으로 진행되었다. 시험 마지막 날에, 이석민은 신나서 방긋 웃고다니던 내 어깨를 치며 방송부장, 내일 아침 방송 할 거니까 알아둬. 라는 소름 끼치는 소리를 했고, 나는 시험 준비로 4일 도합 다섯 시간도 못 잔 몸을 이끌고 왔었다.
하루에 열다섯 시간을 자도 부족한 몸이, 4일 동안 다섯 시간 가량밖에 못 잤는데 어찌 버틸 수 있겠는가. 방송 시작 약 40분 전에 방송실에 도착해 김민규와 이석민을 기다리며 책가방을 끌어안고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얼마나 잤을까, 별안간 이석민의 그 성량 오지는 목소리가 들렸다.
"방송부장! 회장님 오셨는데 엎드려 자냐? 어?"
"이게 어딜 봐서 엎드려 자는 거냐?"
"어쨌든 잤잖아? 방송부 수장님이 그렇게 나약해서 돼?"
"표정 좋네, 넌 공부도 안 했냐. 회장이라는 게..."
"너보단 잘 쳤어요, 너보단."
됐고, 대본이나 읽어 봐. 이석민은 내게 대본을 던져 줬다. 인정하기 싫었지만, 이석민은 능력 좋은 회장이었다. 확실히 올해 우리 학교가 좋아진 것도 느끼고... 그건 방송 때마다 써오는 대본에서도 알 수 있었다. 거의 빈틈이 없었고, 글빨로는 누구에게 안 밀리는 내가 봐도 완벽에 가까웠다. 그런데 오늘 던져 준 대본은 곳곳에 실수한 티가 났다. 아직 작년의 사명감이 다 죽지 않은 방송부장은, 내 방송에 빈틈을 만드는 게 싫었다.
"야, 이석민. 볼펜이랑 화이트 좀 줘 봐. 너도 공부하긴 했네, 실수를 다 하고."
"무슨, 고치게? 됐어, 네가 왜 내 대본에 손을 대냐."
"너는 왜 내 방송실 마음대로 처들어오시는데요? 빨리 내놔. 15분도 안 남았어."
"부장님 엔지니어 아니야? 에이, 고치려면 3반에 걔 작가라며. 걔 데려오지? 존나 예쁘던데."
"존'나? 와, 회장님 욕도 쓰시네. 방송할 때도 이번 시험은 대체로 존나게 어려웠습니다. 이러겠다?"
흠, 아나운서도 예쁘던데... 걔도 불러 주면 안 되냐? 내 말은 아예 필터링 한 채 다른 두 방송부원을 찾는 이석민에 고개를 젓고 어느샌가 옆에 와있던 김민규에게 펜을 받아 어색한 부분에 줄을 쫙 그으며 고쳐나갔다. 혹시 악필로 유명한 내 글씨를 못 알아볼까 거의 시험 서술형 답안지처럼 또박또박 적어 주는 이 방송부장의 배려심, 크으.
어쨌든 고친 대본을 이석민에게 건네 주고 이제는 익숙하게 방송을 틀었다. 처음에는 중간에 카메라 꺼지고 난리였는데, 이제는 3분 컷으로 준비 완료 된다는 거지. 방송 기계 앞에 자리를 잡아 보는 이석민은 유일하게 달라 보였던 부분이다. 그렇게 방송을 진행하다 내가 수정해 준 부분을 읽을 차례였다. 난 기대 안 하려 노력했지만 어쩔 수 없이 더 귀 기울였다.
아, 새끼. 결국 내 말 들을 거면서 난리는.
ㅡ
"노래 꺼 봐. 방송할 거 있어."
"갑자기 처들어와서 왜 지랄이세요, 회장님."
"닥치고 얼른 끄기나 하세요, 부장님."
야, 김민규. 소리 낮춰 봐. 김민규가 노래 소리를 낮추자 마이크 전원을 켜서 이석민에게 전해 주었다. 각 학년 새봄제 부스 신청 학급 실장들은 모두 2학년 윤정한 선생님께 가시길 바랍니다. 다시 한 번 알립니다. 새봄제 부스 신청 학급 실장들은 모두 2학년 윤정한 선생님께 가시길 바랍니다. 늘 느끼지만 성량 하나는 타고난 이석민의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말을 마치고 마이크 전원을 내린 후에 내게 마이크를 건네는 이석민이었다.
"야, 김민규. 너 이제 할 거 없지."
"아니거든? 존나 많거든?"
"내가 맨날 와서 보는데 그걸 모르겠냐? 빨리 교실로 가라. 나 얘랑 할 말 있어."
할 일이 없다는 것에 발끈한 김민규는 교실로 가라는 소리를 듣자마자 수고하라는 말과 함께 내게 허리를 숙여 인사하며 방송실에서 나갔다. 나는 배신자 새끼라 입은 외쳤지만 손은 다정히 흔들어 주었다. 그래... 교실로 갈 기회 있을 때 가야지. 그리곤 고개를 돌려 이석민을 바라보았다. 할 말이 뭔데? 단도직입적으로 물으니 이석민은 시선을 피하며 헛기침을 했다.
"너 사고쳤냐?"
"내가 그럴 인간으로 보이냐?"
"어. 그러니까 무슨 말 하려고 했던 건지 알려달라고!"
"야, 너 뭐... 나한테 부탁할 거 없냐?"
아니, 그러니까 부장이 나한테 개인적으로 부탁하는 거 말고. 방송부의 미래를 위하여 부탁할 일, 그런 거지. 뻘쭘해 하며 말을 뱉어놓고 이어 다급히 변명 아닌 변명을 하는 모습이 웃겨서 소리내 웃었다. 이석민은 오늘 아침 방송 대본으로 잘게 부채질을 하며 없으면 됐다는 야속한 말을 했고 난 급히 말렸다. 아, 엄청 많았는데 이렇게 갑자기 말하려니까 생각이 안 나네... 아.
"나도 임원 회의 들어가게 해 줘."
"얼씨구? 들어가서 뭐 하게. 건의할 거라도 있냐?"
"방송부 회식!"
풉. 내 입에서 나온 대답에 아까 내 모습처럼 이석민이 웃기 시작했고 난 덧붙여 말했다. 운동부는 운동하는 애들이니까 회식한다 쳐. 근데 도서부는? 도서부도 회식을 하는데 왜 우리는 안 하냐고. 내가 말을 끝내자마자 이석민은 내게 들고있던 대본을 약하게 던지고는 좀 한심하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주, 성이름 머릿엔 먹을 생각밖에 없지?"
"임원 회의 가면 햄버거도... 아니거든? 말이 심하다?"
"좀, 발전적인 걸 생각해보지 그러냐. 네 사리사욕 채우는 거 말고."
"많아, 많은데, 방금 딱 떠오르는 게 그건 걸 어떡해."
다시 웃기 시작하는 이석민을 보고 이석민에게 다가가 뒤통수를 아프지 않게 때렸다. 와, 이번엔 진짜 감정 실어서 때릴 뻔했다. 갑자기 한 대 맞은 이석민은 웃음을 멈추고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나 성적 떨어지면 네 탓이라느니, 회장한테 이래도 되냐느니 를 지껄였다. 나는 어깨를 으쓱이곤 고개를 돌려 컴퓨터를 확인하는데 이내 이석민의 불평불만이 멈추더니 헛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야, 방송부장."
"어, 말해라."
"나 봐."
고개를 돌려 본 이석민은 아까 내게 할 말을 하기 전 모습처럼 뜸을 들이고 있었다. 얼핏 떨군 내 시야에는 옆에 있던 대본을 말아쥐는 손이 보였다.
"그러니까, 그... 너 회의 들어오게 해 줄게. 지원금도 받아 주고."
"그걸로 우리 맛있는 거 먹으면 되는 거고?"
"어, 근데 맛있는 거... 먹기 전에 조건 하나만 걸자."
뭔데? 갑자기 내걸겠다는 조건에 의아해져 이석민을 봤다. 이석민은 눈을 질끈 감았다 떴고 목울대가 크게 울렁였다.
"이번 주말에 같이 밥 먹자, 맛있는 걸로. 우리 둘이."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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