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한핀잔
: 왔네. 나의 평범한 너
12
**
그가 내게 건네준 팔찌만 만지작거렸다.
-
"나는 너한테 못가."
"..."
"단 한 발자국도, 갈 수가 없어."
"..."
"저 사람들이 네 가족인 이상."
"..."
"그러니까"
"..."
"네가 오는 방법 밖에 없어."
"..."
너가,
나한테.
-
그와의 마지막 대화가 자꾸만 아른거렸다. 내가 그에게 가려면, 나는 내 가족을 등 돌려야만 했다. 하지만 그들은 이미 내게 등을 돌린 것만 같았다. 겉모습은 전과 다를 것이 없었지만, 그들의 내면은 내가 눈치채지 못한 그 사이. 아니, 어쩌면.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나의 생각과 달랐다. 가족이라는 울타리로 그들을 품기에는, 내가 살아온 세상과 그들이 살아온 세상이 너무나도 멀었다. 뛰어도 뛰어도, 닿지 못할 곳에 있었다.
그래서
그 아이에게로 가고 싶었다. 내가 뛰지 않아도 되는 곳에 있는, 바로 내 앞에 있는 그에게.
내가 가진 상처가 어쩌면 그와 조금은 닮지 않았을까. 그래서 너랑 나, 우리는. 서로를 안아줄 수 있지 않을까.
그러면 우리는.
행복해 질 수 있지 않을까.
**
[호석시점]
"남준아."
남준이 소파에 기댔던 몸을 일으켜, 나를 바라봤다. 반듯한 눈빛이었다. 남준이의 눈빛은 언제나 반듯했다. 조금의 오차도 없이. 그래서 읽기 어려웠고, 그래서 나와 닮았다고 생각했다. 남준은 저를 부르고도 말이 없는 나를 가만히 바라보다, 내 손목에 팔찌가 없다는 사실을 눈치채고 물었다.
"팔찌는?"
"...줬어."
"누구를."
"..."
남준의 누구냐는 물음에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자 그는 제 미간을 잠시 찌푸렸다. 그리고는 이내 곧 그 대상이 누구인 줄 알았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왜 줬는데."
살면서 이렇게까지 막무가내로 행동한 적이 있었나. 나조차도 이해되지 않는 행동들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충동적인 행동들은 아니였다.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다. 그녀와 엮인 모든 행동들을 후회한 적이 없다. 다시 돌아가도 그렇게 할 게 분명했다.
나는 자세를 고쳐 앉아, 남준을 바라봤다. 나는 꽤 오랜 적막을 깨고 말했다.
"나한테 오라고 했어."
"..."
"혼자더라고. 걔도."
"..."
"...나도."
"..."
"누구보다 잘 알잖아. 나 지난 시간동안 어떻게 살아왔는지."
부모님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알게 된 순간부터, 단 하루도 악몽을 꾸지 않은 날이 없었다. 그들에게 복수하고 싶었고, 그들의 죽음으로 모든 걸 돌려놓고 싶었다. 그런데, 단 하루. 악몽을 꾸지 않은 날이 있었다.
그녀의 눈물을 어둠으로 덮어준 날.
그날,
얼핏 잠에 든 그 시간동안.
아무런 꿈도 꾸지 않았다.
수면제를 먹지도 않았는데, 잠이 왔고.
피가 쏟아지는 방 안에 갇히는 꿈도 꾸지 않았다.
계속 악몽을 꾸고 살았다면, 몰랐을 편안함이었다.
차라리 평생 몰랐으면 좋았을 텐데, 알아버렸다.
그래서 이제는, 계속 그러고 싶어졌다.
혼자가 된 그녀 곁에서. 같이.
남준은 내 말에 한동안 답이 없더니, 제가 쓰고 있던 안경을 벗었다. 그에게는 미안한 마음 뿐이었다. 남준의 부모님 역시 이번 불량식기세척제의 희생자들이었다. 그의 부모님은 8년 전, 발생한 초기 피해자였다. 변호사였던 남준은 제 부모의 죽음을 밝히기 위해, 나와 손을 잡았다. 그래서 그녀의 등장에 그렇게나 날을 세우고, 불안해 했고.
그런데 이제 와서 내가, 그 집안의 딸에게 마음을 기대고 있었다.
나는 차마 들지 못하는 고개를 더욱 깊이 떨궜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남준이 나를 불렀다. 호석아.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며, 답했다. 응.
"우리 그만할까?"
"..."
"담당 검사도 우리가 손 쓸 수 없는 라인이고."
"..."
"우리 스케일로 칠 수 있는 기업도 아니고."
"..."
"이제, 우리도."
"..."
"평범하게 살아볼까."
남준은 제 마지막 말을 끝으로, 희미하게 웃었다. ...평범하게 산다. 평범. 잊고 살아온 단어였다. 우리에게 어울리는 단어도 아니였고. 나는 나도 모르게 '평범'이라는 단어를 곱씹었다.
"평범... 평범하게..."
"응."
"그런데"
"..."
"...평범하게 사는 게 기억이 안 나면..."
"..."
"그러면 어떡하냐."
"..."
"평범하게 사는 게, 어떤거였지?"
남준은 내 물음에 제법 표나게 웃으며, 말했다.
"너가 요즘 사는 거."
"..."
"그게 평범한 거야."
"...뭐가."
"수면제 안 먹어도 잘 자고."
"...언제 봤어?"
"이박사님한테 약 안 받아갔다고 그래서."
"..."
"또, 매일 그 지옥같은 악몽 안 꾸고."
"..."
"아. 이건 내가 너 다이어리 좀 봤다."
"..."
"마지막으로."
"..."
"마음 둘 때 생긴거."
"..."
"그게 평범한 거야."
"...남준ㅇ"
"너 요즘에 보기 좋았어."
"..."
인정하기 싫었는데. 죽자고 두드림 비리 찾으려고 달려들고, 매일 아침 총에 총알 잘 들었나 확인할 때랑은 다르게.
혈색이 돌더라. 그래도.
사람같고.
며칠이나 됐다고, 분위기가 달랐어.
남준의 말이 낯설게 다가왔다. 내가 그랬나. 며칠사이 그녀와 두드림 관련해서 정신 없는 일만 가득했는데. 그게 좋아보였나. 나는 남준의 말에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그리고 동시에 남준과 내가 있던 방 문이 벌컥, 열렸다.
그녀였다.
나는 놀란 몸을 소파에서 일으켜, 그녀를 바라봤다. 그녀는 제 자리에서 숨을 몇 번 내쉬더니, 뭔가 결심한 듯 말을 뱉었다.
"갈래."
"..."
"너한테."
"..."
그녀의 말에 놀란 내가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못했다. 사실 그녀에게 내게 오라고 말했을 때도, 그녀가 과연 올까 싶었는데. 남준은 그녀의 등장에 놀라지도 않았는지, 소파에서 일어나 내 쪽으로 걸어왔다. 그리고는 내 어깨를 툭툭 치고는 말했다.
왔네.
정호석의 평범한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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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화 미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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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 함께 온 곳은 스페인의 작은 마을이었다. 한국에서는 더 이상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버티기 힘들 것 같아서. 어차피 나도 다시 내 일을 하기 위해 스페인 지사로 돌아가야했고, 그는 그 동안의 시간들을 보상받고 싶다며 여유로운 곳으로 떠나고 싶어했다. 그래서 우리는 함께했다.
나는 아직 제 짐정리를 마치지 못한 그를 향해, 물었다. 그것도 엄청나게 눈치보면서. 나는 괜히 먼지가 다 닦인 곳을 닦으며, 그에게로 조금씩 다가갔다.
"큼큼." "...뭐" "우리 동물원 갈래?"
그는 내 제안에 제 행동을 멈췄다. ...너무 성급했나. 그가 어릴 적 나온 성금방송에서 부모님과 동물원에 가지 못했다는 말을 한 게, 마음 쓰여서 한 말이었는데. 나는 황급히 말을 덧붙였다.
"아, 아니. 뭐. 여기까지 와서, 이렇게 방 정리만. 어?" "..." "계속 몇 달 동안 할 것도 아니고..." "..." "지리도 파악하고, 바깥 공기도 ㅆ"
그는 내 마지막 말을 끊으며, 나에게로 걸어왔다. 나는 혹여나 그에게 한 대 맞을까 싶어, 계속해서 뒷걸음질 쳤다. 하지만 더 이상 도망칠 때 없는 벽에 등이 닿았고, 나는 애꿎은 손만 만지작거리며 그의 시선을 피했다. 어느새 내 앞까지 다가온 그는, 내 시선을 집요하게 따르며 물었다.
"서로 아팠던 거, 치료해주는거야?" "...뭐... 그냥... 기분 나빴으면 미ㅇ" "그럼 나는."
그는 정말 조금만 어긋나면 닿을 거리에서 말을 이었다. '그럼 나는' 하며. 나는 지나치게 가까운 그 때문에 자리를 좀 벗어나볼까 해서, 옆으로 조금 걸음을 옮겼는데. 그는 장난스레 내가 향하는 쪽의 벽을 제 손으로 막으며, 묻는다. '벽치기 이런 건, 학생들 취향 아닌가.' 나는 그 때문에 붉어진 얼굴을 내 두 손으로 가리고 답했다. 벽치기고 뭐고, 좀... 비켜...주라... 그러자 그는 짖궃게 웃으며, 나와 다시 눈을 맞춘다. 아니. 원래 이렇게 잘 웃었어?
"서로 아팠던 거 치료해주는 거면." "..." "난 벽치기 말고." "...야." "네 가족이 되줄게." "..."
나는 그의 말에 얼굴을 가렸던, 두 손을 치웠다. 그러자 그는 한껏 유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엄마, 아빠, 동생. 이 중에 골라. 다 하기는 힘들 것 같아.
아.
너도 내 가족 해줘야 돼. 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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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겨울소녀입니다.
저는 오늘 시집하고 책을 꽤 많이 샀어요. 세상 그 누구보다 부자가 된 기분입니다 :)
오늘 이야기는 쓰면서도, 마음이 참 알 수 없는 감정으로 차올랐어요.
뭐랄까.
둘이라서 다행인데, 저 둘은 선택지가 서로 뿐이잖아요.
그래서 따뜻하게 슬펐어요.
아! 그리고 오늘 암호닉 관련해서 꼭!! 읽어주세요.
오늘 회차에 기본 암호닉 신청자 분들도, 다시 한 번! 댓글을 남겨주세요 :)
오늘 회차를 기점으로 암호닉을 다시! 정리 할 계획입니다.
오늘 남겨주시지 않으면, 다음 화 암호닉에 등록이 안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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