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화
"안녕하세요, 황자님."
"또 너냐?"
뭐 씹은 얼굴로 쳐다보는 민윤기를 무시하곤 치맛자락을 들며 사뿐사뿐 자리에 착석했다. 자연스러운 동선에 그가 어이없다는 얼굴을 한다.
그러면 난 당당하게 손에 든 조반을 내려놓으며 말한다.
"또라뇨. 제가 이렇게 황자님 드릴 조반을 가지고 왔는데."
"왜 네가 오는 건데, 매번?"
"으음...제가 믿음직스러워서?"
"어디서 황자를 능욕하려 들어."
말투는 틱틱거리면서도 그는 보던 책을 내려놓고 내게 다가왔다. 처음에 비하면 많이 발전한 거였다. 처음 아침 심부름을 왔을 땐 정말이지, 전쟁이었다.
내 말은 듣는 둥 마는 둥, 책 읽기 바쁜 황자를 밥상 앞에 앉히느라 어찌나 노력을 했는지. 큽. 이젠 습관이 되건지 내가 밥을 들고 오면 얌전히 먹으러 온다. 뭔가 식탁을 차릴 때 나를 부르던 우리 엄마가 떠오르면서, 재깍재깍 가지 않았던 나 자신을 반성하게 된다.
"네가 할 일이 없나보지."
"아닌데요. 저 엄청 바쁜 사람인데요."
민윤기는 뭐라 더 말하려다 마는 듯했다. 그리곤 조반으로 가져온 주먹밥을 왕 베어문다. 내가 멀뚱히 보고 있자 황자는 먹던 것을 멈추고 나를 쳐다본다.
"왜요."
"어디 황자가 먹는 걸 쳐다보느냐."
"아-그 놈의 황자, 황자 진짜...아, 안 볼게요! 전 이만 가보겠..."
"너도 하나 먹거라."
오늘은 글렀다는 생각으로 자리에서 일어서려는데 대뜸 밥덩이 하나를 받은 나는 다시 슬그머니 자리에 앉아야 했다.
결국, 나란히 마주앉아 가져온 식사를 몽땅 해치웠다. 겨우 주먹밥일뿐인데도 엄청 맛있다. 역시 황궁, 솜씨가 장난 아니구나. 뭐, 일류 셰프 이런 느낌인가.
그나저나 민윤기와는 제법 친밀해진 것 같다. 남준 황자와는 조금 다른 느낌으로. 진짜 친오빠 같은 느낌. 말로는 귀찮다 저리가라하지만 은근히 신경써주는 것이 그러했다.
그래서 유독 민윤기를 자주 찾아오는 것 같다. 그냥 친한 오빠에게 놀러오는 기분으로 말이다. 민윤기도 막 싫어하는 눈치는 아니고.
"오늘은 무슨 용건이더냐. 또 유채 꽃?"
"아니요. 황자님은 별을 읽을 줄 아시니까...궁금해서. 막 운명 같은 것도 볼 수 있다고 하던데요!"
"볼 수야 있지. 왜, 네 운명이 궁금한가?"
"어...네!"
윤기 황자는 잠시 고민하다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차후에 봐주도록 하마.
"아, 그리고 네가 말했던 유채 꽃 말인데, 내 호석에게 언질해두었다. 아무래도 그 쪽에서는 나보다 아는 게 많을 테니, 한 번 찾아가보도록 해."
"호석이면...3황자님?"
"그래. 아주 돌머리는 아닌 모양이다?"
"지금 저를 놀리십니까."
눈을 흘기니 윤기 황자는 능청스러운 얼굴로 어깨를 으쓱인다.
"설마, 내가 사돈 처녀를 놀릴 리가 있나."
그리고 또 알게 된 민윤기의 의외의 모습은,
굉장히....얄밉다는 거.
기웃기웃.
어느 정도 익숙해진 황궁이지만 규모는 여전히 컸기에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중이었다. 그러다 높으신 분들이 행차하는 것 같으면 은신술! 숨고 걷고를 반복하는 게 꼭 조직의 정예요원이라도 된 기분이었다. 민윤기에게 호석 황자의 거처를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헤매고 있다. 젠장, 길치 어디 안 간다!
분명히 나무를 끼고 모퉁이를 돌아서...
"아!"
"아!"
조심조심 모퉁이를 도는데 누군가와 부딪히는 참사가 일어나고 말았다. 아, 죄송합니다....아이고. 부딪힌 곳을 문지르며 고개를 드는데, 부딪힌 녀석이 굉장히 불쾌한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 뭐야, 저 재수없는 표정은?
"무엇하느냐? 귀한 몸에 부딪힌 주제에 무릎이라도 꿇지 않고!"
뭐야, 얘는...?
너무 어이가 없어 입만 뻐끔거리는데, 척 보기에도 어려보이는 남자는 입고 있는 옷을 보니 꽤나 높은 신분의 자제 같았다.
설마...
"...황자님?"
"어허. 알면서도 멀뚱히 고개를 쳐들고 있는 것이냐? 어서 용서를 구하래도!"
이 쪼끄만 게 못 하는 말이 없네? 섀-파랗게 어린 놈이, 어?!
내가 암만 찐따라도 위아래 예의범절에는 또 한 예민하거든!! 내가 비록 이 몸에 들어있다만 현대에 가면 인마, 누나 스물 여섯이라고!
이런 생각이 들자 자연스럽게 두 손은 허리 위에 얹어졌고 고개는 삐딱하게 틀어졌으며 눈빛은 흉흉해졌다.
"여봐요, 황자님. 뭔가 착각하고 계신데, 지금 쌍방과실이거든요. 그러니까 황자님이 저한테 일방적으로 뭐라하실 입장이 아니란 말이죠."
"뭐라고?"
"아, 솔직히 황자님도 저 못보고 나오다가 부딪힌 건데, 왜 저만 사과를 해야합니까? 할 거면 같이 해야죠?"
"나, 나는 황자다. 그러니 네가 내게 용서를 구하는 것은 당연한 거지."
"허 참, 황자면 뭐 잘못이 없는 게 된답니까? 아주 웃기고 있어."
"ㅁ, 뭐?! 네, 네 년이 지금-"
"뭐어-? 녀어언-? 나한테 혼날래, 진짜?"
(뭐, 뭐지 이 여자는;;;;;)
황자는 당황스러운 얼굴로 눈동자를 데룩데룩 굴리며 갈피를 못 잡는 듯했다. 어릴 때 버릇을 확 잡아놔야지 안 그러면 커서 인성이 바닥을 친다고.
나는 황자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황자님, 이름이 뭡니까."
"저, 전정국."
"그래요. 정국 황자님. 이렇게 서로 잘못이 있을 땐, 양쪽 다 용서를 구하고 갈 길 가는 겁니다. 알았어요?"
"...아, 알겠다."
잔뜩 풀죽은 정국 황자를 보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곤 아까와 딴 판인 사람처럼 상냥하게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황자님. 제가 못 보고 부딪혀버렸지 뭡니까."
사과하는 나를 멀뚱히 보고만 있길래, 강렬한 눈빛을 날려주었더니 어색한 듯 머리를 까닥이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한다.
"나, 나도 못 봤으니 뭐...."
썩 맘에 드는 사과는 아니었지만 이만 넘어가기로 했다. 일단은 호석 황자를 찾아가는 게 먼저니까....
나는 정국 황자를 지나치려다 말고 돌아왔다.
"아, 황자님. 호석 황자님의 궁은 어디입니까?"
"형님이라면 저 쪽 궁에 계시는..."
정국 황자가 가리키는 곳에 고개를 끄덕인 나는 그에게 고맙다 인사를 하곤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정국은 얼떨떨한 상태로 남겨져 고개를 갸웃했다. 자신은 평소처럼 행동한 것뿐인데, 생판 모르는 여인에게 혼이 나다니. 그리고 굉장히 무례한 언행을 몇 개나 들은 것 같은데, 의외의 박력에 아무 말도 못하고 벙쪄있었다. 그러나 수치심보다는 호기심이 더 컸다. 정국은 아미가 사라진 쪽으로 시선을 두며 생각했다.
차림새를 보면 궁녀는 아닌 것 같은데, 그렇다고 황족도 아니고. 호석 형님을 찾고 있었으니 형님네 사람인가?
묘령의 여인이 궁금해진 정국은 이름을 물어보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며 다음을 기약했다. 뭐, 또 볼 수 있겠지?
정국 황자가 가르쳐준 곳으로 가니 정말 고급져보이는 궁이 하나 있었다. 여기저기를 살피며 가까이 다가가자 몇몇 시녀들이 지나가고 있어 그것을 대뜸 붙잡았다. 그녀들은 조금 놀란 눈치였지만 내 행색을 보곤 금세 고개를 숙였다. 저기...황자님을 뵈러 왔는데요. 시녀들은 존대를 하는 내가 이상한지 나를 힐끔보곤 이내 어디로 안내해준다.
여긴 무슨 궁이 천지에 식물이 널려있다. 나무는 기본이고 조경이 굉장히 잘 되어 있는 것이...3황자는 자연을 좋아한다고 하더니 정말인가보다.
"황자님,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손님?"
그는 마루에 나와 풍경을 즐기고 있는 듯보였다. 바로 보이는 곳에는 잘 가꿔진 정원이 있었다. 나도 모르게 감탄하며 그것을 쳐다보는데 나를 향한 시선이 느껴져 아차했다.
서둘러 허리를 꾸벅 숙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김아미입니다. 김 혁의 사촌 동생이에요."
내 소개에 그는 깨달았다는 듯 반응을 보였다.
"혹시 기억을 잃었다던 그..."
"아, 네. 맞습니다."
"지금은 호전되었는가."
"네, 네! 염려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와, 말투에서부터 다정함이 뚝뚝 떨어져 작은 감동을 해버렸다. 다시 허리를 꾸벅 숙이니 얼굴 가득 은은하게 미소를 짓는데, 어쩜 저렇게 사람이 온화할 수 있을까?
가까이 오라는 말에 총총 다가갔다. 두 손을 공손히 모으고 있는데, 대뜸 황자가 제 옆에 앉으라 손짓했다. 헐, 그래도 되는 건가? 우물쭈물하고 있으니 그는 작게 웃었다.
"허락할 테니, 이리 와 앉거라."
와, 눈치도 센스도 좋다. 나도 살짝 웃으며 조심스럽게 앉는데 그가 윤기 황자 이야기를 꺼냈다.
"안 그래도 형님께서 네가 올 거라 기별하셨다. 유채 꽃에 관심이 많다면서?"
"네, 뭐...그렇습니다."
"아직 개화하기 이른 시기이긴 하지. 아마도 형님께선 네가 꽃을 좋아하시는 것 같아 내게 보내신 듯하다. 내 정원에는 겨울꽃들도 많이 있거든."
아...? 그런 거였나, 민윤기 황자. 괜히 고맙네.
호석 황자는 첫인상처럼 무척이나 다정하고 부드러운 사람이었다. 불쑥 찾아온 내게 이런저런 말도 걸어주고 불편하지 않게 대해주었다. 애써 인식하지 않았으면 이 사람이 황자라는 것도 잊을 뻔했다.
"아미, 널 이렇게 보는 것도 거의 처음인 듯한데,"
"...그런가요?"
"밝은 것 같아 좋구나."
"제가요?"
"너와 나누는 대화 내내 즐거웠다. 내가 밖에 오래 있지 못해서 말이야, 이야기 듣는 게 언제부턴가 좋아지더구나."
"어, 어째서 밖에 오래 있지 못하세요...?"
꽃잎으로 우려낸 찻잔을 잡은 호석의 손이 살짝 주춤거렸지만 이내 그는 차를 한모금 마셨다.
"날 때부터 몸이 약한 것이 연유다. 대부분은 이렇게 안에서 수목을 구경하곤 한단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딘지 모르게 유한 느낌이 있더라니, 선천적으로 약한 몸 탓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오늘 정말 실례많았습니다. 괜히 폐만 끼치고 가는 것이 아닌가 걱정되네요."
"아니다. 재미있었다. 어쩌면 윤기 형님이 너를 보낸 건, 날 위해서일지도 모르겠다."
익살맞게 구는 호석을 따라 웃었다. 참 성격 좋으신 황자님이네. 인기 많겠는데.
나도 기분이 좋아져 그러면 내가 더 영광이라 답해주니 그는 여전히 살포시 미소를 머금은 채 내게 꽃을 꺾어 건넸다. 시기를 착각해 먼저 개화한 꽃이 몇 송이 있다며, 괜찮으면 내게 가져가라 내미는데 거절할 이유가 없지. 받아든 나는 고개를 꾸벅였다. 오라버니 방의 화병에 놓아두면 되겠다.
"괜찮다면 종종 와주겠니?"
"네? 어...물론이죠!"
내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호석 황자는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어보였다.
또 보자, 아미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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