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하자면 꽤 하자가 많다할 수 있는 가정이라 할 수 있겠다. 처음부터 그러지는 않았을 것이 분명하기는 하지. 기억도 나지 않을만큼의 옛날 일이지만 그때라는게 있기는 했다. 하지만 그만큼이나 옛날 일이니 기억 날 리는 없었다.
아빠가 돈을 가지고 가족의 품을 벗어난 뒤부터 엄마는 싸구려 커피를 파는 다방에서 일했다. 커피 두스푼 프림 한스푼. 언제부턴가 입에 딱 달라붙어서 떨어지지 않던 말.
촌스런 꽃무늬가 수놓아진 긴치마를 입었었다. 코가 아플 정도로 짙은 향수를 뿌렸었다. 어울리지도 않는 진한 화장을 했었고, 줄곧 질끈 묶어올려왔던 머리는 부시시하게 풀어헤쳤었다. 아저씨들은 그런 엄마의 허리에 손을 올리기도 했고 얇은 옷가지 위로 더듬어대기도 했다.
엄마는 그렇게 커피도 팔고, 또 다른 무언가도 팔았다. 다방 옆으로 이어진 골목 안쪽 공터 뒤에 있는 작은 건물에서.
난 그게 뭔지는 모른다. 알아도 모르는 척 하기로 했다. 하지만 나는 몰라. 그러니 모르는 척도 아니지.
벽 너머로는 작게 앓는 소리가 들렸었다. 그럴때마다 나는 또 귀를 막는다.
모르기로 했으니까.
다방 옆 골목길엔 꽃이 곧 잘 피었다. 잡초 역시 그랬다. 나는 그걸 모두 밟아버린다. 피어날 때마다 말이다. 언제부터인가. 언제부턴가. 그리고 언제부턴가, 내 신발은 붉게 젖는다. 내가 죽인 것은 한 두개가 아니다.
그다지 달가운 일은 없었다.
그 건물에서 웃옷에 돈뭉치를 숨기며 남이 볼 세라 종종 걸음으로 뛰쳐 나오는 엄마가 싫었다. 앞집 아저씨에게 살살 웃어주는 엄마가 싫었다. 다방에서 싸구려 커피를 파는 엄마가 싫었다. 짙은 향수를 뿌린 엄마도, 짙은 화장을 한 엄마도 싫었다. 자기 전에 그 모든걸 다 지워버린채 조금 밋밋한, 하지만 깨끗한 얼굴로 내게 웃어주며 이불을 덮어주는 엄마는 좋았다.
난 엄마를 싫어하고 엄마를 좋아한다.
엄마는 아무것도 모른다. 아무것도 모르고 웃는다.
엄마는 매일 아침 잘 차려진 식탁 한상을 차리고 나갔다. 난 한번도 그것에 제대로 손댄 적 없다. 그곳에선 커피향이 났고, 향수 냄새도 났다. 한 수저라도 떴다가는 구역질을 할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작년에 맞춘 교복은 아직까지도 조금 컸다. 바지 밑단은 복사뼈부터 반 뼘이나 더 내려와있었고, 와이셔츠는 손등을 조금 덮었다. 마른 바닥으로 운동화 밑창이 부지런히 부딧혔다. 조금 커 발가락 끝에 공간이 남는 운동화였다. 입술 사이로 뿌연 김이 펄펄 나왔다. 이번 해 겨울은 작년의 겨울보다 조금 더 추웠다. 작년에는 눈이 오지않았는데, 이번에는 올까. 나는 그냥 눈이 내리지 않았으면했다. 두텁게 쌓여진 기억 너머로 스며들어 자취를 감춘 단 하나의 추억이 스물스물 피어 오를 것 같았다.
아침 여덟시에 발을 들인 학교는 해가 지고서도 많은 시간이 지나서야 나올 수 있었다. 집에서 학교로, 학교에서 집으로. 나도 모르는 새에 만들어진 견고한 체재는 내가 알아챈 후로도 계속됐다. 나는 그래도 불평할 생각은 하지않는다. 그러기로 했으니까.
나는 친구가 잘 없었다. 그게 딱히 싫지도 않았고 좋지도 않았다. 그냥, 쉬는시간마다 아이들이 크게 웃으며 떠드는 소리를 들으며 문제집만 풀었다. 점심시간에는 밥을 먹지않았다. 딱히 배가 고프지 않았다. 창을 통해 축구를 하겠다고 운동장으로 나간 아이들의 목소리를 어렴풋이 들으며 백현은 또 문제를 풀었다.
그렇게해서 해결된 문제는 하나도 없었다. 샤프 끝자락이 정답 위로 둥근 원을 끝없이 그려내었다. 점점 커진 원은 문제집을 모두 덮고, 백현의 자리까지 퍼져나가 이내 교실을 모두 어둡게 만들고서 운동장까지 손을 뻗었다. 운동장 하늘이 어두워지고 아이들은 하나 둘씩 고개를 들었다. 얇은 비 조각이 뺨 위로 떨어졌다. 교실도, 백현의 자리도, 문제집도 마찬가지였다. 백현이 제 눈을 가렸다. 입술 사이를 오가는 숨이 조금 가빠졌다. 입 안에서는 짠 맛이 났다.
백현과 그의 엄마 사이에서 대화는 점점 결여되어갔다. 사실은 백현의 일방적인 도피였다. 백현아, 조용하게 흘러오는 목소리를 비켜간건 백현이다. 그의 엄마는 한참을 백현의 이불가를 떠나지 못하다 백현이 조금 뒤척일때면 백현의 등을 토닥이다 뒤늦게 잠자리에 들었다. 백현은 그럴때다 잠이 들었던 적은 한번도 없다. 이불에 얼굴을 묻고 숨을 죽일뿐. 백현은 울지 않았다. 그냥 눈가를 엄지손가락으로 쓱쓱 비볐다.
엄마가 잠에 들었다. 규칙적이고 옅은 숨소리에 백현이 제 숨소리를 맞추었다. 점점 눈이 감겼다. 잠에 든다.
새벽의 소리가 멀어져갔다.
백현은 다음날에도 역시 학교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 날에도 역시 문제집을 붙들고있었다. 점심시간이 되자 아이들은 축구공을 들고 운동장으로 나갔다. 재잘재잘 즐거운 목소리가 점차 옅어졌다.
문제집을 다음장으로 넘기려하는데 그 위로 빵 한봉지와 우유가 툭 떨어졌다. 백현이 고개를 들자 그 앞에는 경수가 있었다. 경수가 백현의 앞자리 의자를 빼내 그 위에 앉았다. 고장난 듯한 의자가 삐걱대는 소리를 냈다.
"왜 밥 안 먹어?"
백현이 책상위에 얹어진 것들을 보다가 다시 경수를 바라봤다. 둘은 같은 반이기는 했지만 통 접점이 없는 사이였다. 사실 이야기를 나눈 것도 이번이 처음이다. 그도 그럴것이 경수 주위에는 언제나 사람이 넘쳐났기 때문이다. 쉬는시간마다의 웃음소리의 중심엔 항상 경수가 자리하고 있었고 백현은 그와 몇칸 떨어진 책상에서 문제집만 뚫어져라 보고있으니 당연하다해도 될 듯 하다.
허공에서 백현과 경수의 시선이 부딧혔다.
"넌 왜 안 나갔어?"
"너 배고플까봐."
경수가 가볍게 대답했다. 언제부터 그런걸 신경썼다고. 뻔뻔하기도 하지.
"그거 줬으니까 이제 됐어."
나 갈게. 백현의 어깨를 두어번 두드린 경수가 교실을 나갔다. 백현은 그 손길에서 제 등을 두드리는 어미의 손길을 떠올려냈다. 빵봉지 끝을 몇번 구기던 백현이 눈가를 비볐다. 울지는 않았다. 그냥, 눈이 좀 아려와서.
-
문은 벌써 열렸고, 백현은 제 엄마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의 눈 속이 경악으로 가득찼다. 붉은 립스틱이 칠해진 입술은 여과없이 신음을 뱉어내었다.
백현의 손이 덜덜 떨렸다. 주먹을 꽉 쥔 백현이 집 문을 닫을 생각도 못한 채 달아났다. 백현의 발걸음 끝에 닿은 곳은 다름아닌 학교 앞이였다. 모르는 새에, 견고한 체재는 버릇으로 바뀌어 발끝부터 서서히 백현을 물들여갔다. 페인트 칠이 여기저기 벗겨진 교문 앞에 주저앉은 백현이 눈물을 쏟아냈다. 회색 시멘트바닥이 눈물에 젖어 더욱 짙어졌다. 모르기로 했는데. 알아도 모른 척 하기로 했는데. 그럴 수가 없어졌다. 벌써 부정할 수도 없을 만큼의 모든 것을 봐버렸고, 모르는 척이란 제 혼자 알고 있을 때 비로소 지켜질 수 있는것이였다. 게다가 다른 이도 아닌 아무것도 몰라야할 제 엄마가 그것을 알아버렸으니 연극은 계속 될 수 없다. 백현이 제 얼굴을 쓸어내렸다. 머리카락 위로 가벼운 얼음조각이 내렸다. 백현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봤다.
눈이 내렸다. 타이밍 좋게도.
백현이 제 무릎에 얼굴을 파묻었다. 눈이 내리지 않았으면은 했는데. 머리 속에서 단 하나 남은 기억의 조각이 여실히 드러났다.
그다지 중요치도 않은 그 기억은 백현이 어린 날 자신의 아버지와 함께 눈밭을 뛰논 일이였다. 눈싸움을 하고, 눈사람을 만들고, 눈밭 위를 뒹굴고. 그저 그런 평범하고 흔한, 하지만 백현에게는 그럴 수 없는.
백현의 동그란 뒷통수 위로 그림자가 졌다. 머리카락 위로 쌓이던 눈이 멎었다. 백현이 고개를 들었다. 눈가가 벌겋게 달아올랐다. 코끝도 똑같았다.
"가자."
경수가 나지막히 말했다.
"우리집에."
겨울날, 추위에 떨고있는 강아지를 발견한 듯이.
경수가 백현을 일으켰다. 백현은 힘없이 경수에게 끌려갔다. 우산이 백현 쪽으로 기울었다. 경수의 오른쪽 어깨가 푹 젖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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