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信 5년, 국모가 죽었다.
계기는 병이었다. 오랫동안 아이를 낳지 못한 채 원인 모를 병으로 시름시름 앓던 왕비는 요양차 행궁으로 피접을 나간 지 석 달이 채 못 지나 환궁했다. 그 다음 날이었다. 왕비가 혼절했다. 태의를 불러도 병세에 차도가 없었다. 종래에는 숨이 끊어진 왕비의 마지막을 소년기를 갓 넘긴 젊은 왕은 멍하니 지켜보았다. 이미 망국과도 다름없게 된 연나라의 정국은 그야말로 엉망진창이었고 왕은 병세를 제대로 돌보지도 못한 채 그저 왕비의 마지막을 지켜보는 것으로도 급급해야 했다. 왕비의 마지막은 초라했고 시신은 왕의 당부로 이틀간 그대로 보존되어졌다.
저보다 다섯 살이 많던 왕비,
여자는 세훈의 아내였다.
고통을 이기지 못해 마약마저 삼켜야 했던 시신의 입술이 푸르스름했다. 왕비는 볼품없는 양반가의 여식이었다. 이미 그 잔재가 거의 지워져 족보만이 남은 상태인 그녀를 왕비로 삼은 것은 왕을 제 입맛대로 휘두르려 노력하던 자신의 숙부와 지금은 졸한 선왕의 계비였다. 몸이 약해 달거리도 불규칙한 그녀를 내칠 수도 있었지만 거둔 것은 순전히 세훈의 자의였다. 왕비는 좋은 사람이었다. 은애하지는 않았지만 세훈에게는 어느 정도의 버팀목이고 발판이었다. 향기 없는 꽃 같던 그녀가, 그렇게 갔다.
아아,
세훈은 모진 삶을 살다 그 끈을 놓은 가여운 여자의 볼가를 어루만졌다. 차가운 뺨이 꼭 시든 꽃 같았다.
자신은 그녀를 한 번도 제대로 안지 못했다.
- 전하.
- 곧 정무를 보실 시간이옵니다.
곧 시체가 부패할까 염려된 상궁이 세훈을 불렀다. 아직 그녀가 졸한 지는 이틀도 채 되지 않았는데, 세훈은 모든 것이 갑작스러웠다. 가뜩이나 흰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애써 등을 돌려 그들을 보는 시선이 묵묵하고 찼다. 느리게 뜨인 두 눈을 포함하여 왕은 여전히 왕비의 죽음을 실감하지 못하고 있었다. 자신에게 쓰여진 용상이란 굴레가 모두 괴롭기만 했다.
" 그러지요. "
중전을 맡아주세요, 내가 감당하지 못하여 떠난 사람이니.
걸음을 떼자 얌전히들 물러서는 모두가 세훈을 향해 고개를 조아렸다. 익숙해질 수 밖에 없는 신분임에도 세훈은 굳게 입을 닫았다. 이제는 비게 된 교태전을 빠져나왔다. 세훈은 후궁이 아무도 없었다. 숙부의 입김이 없는 한, 앞으로 새 왕비를 들일 일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시세는 혼란에 빠져 있고, 왕인 나는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
내관들의 안내를 받아 사정전으로 들어서던 세훈이 한숨을 쉬었다.
모든 것이 그저 버겁기만 했다.
미몽迷夢
루한 x 세훈
록함鹿晗 4년, 제국에는 피바람이 불었다.
아름다운 황제는 폭군이었다. 본래 선황인 융경제의 명으로 공주로 키워졌던 그가 급작스레 스스로의 정체를 밝히면서 현賢의 정세는 순식간에 뒤바뀌었다. 황실의 보배로 알려졌던 그가 사내였다는 사실은 크나큰 충격이었다. 눈 깜짝할 새 제국은 반으로 갈리고, 남은 반쪽 나라는 대大국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황제는 둘이 되었다. 현을 황제가 가졌던 이유는 간단했다. 쌍둥이인 우판이 아닌 그가 형이었으니까. 급작스레 새로 생긴 황자 논란과 태자 책봉, 그리고 대관식. 대사건 이후 황제는 의외로 조용한 것처럼 보였다. 제국 최고의 세도가인 기씨문, 그중에서도 나라의 군사를 모두 장악하고 있는 대장군의 여식은 황제의 아내가 되었다. 황후는 책봉된 지 한 해가 채 못 되어 팔삭둥이 황자 쌍둥이를 낳았으며 그는 곧 황제의 적장자가 되었다. 그 다음 해에 황후는 황자를 낳았지만 얼마 못 가 일찍 죽었다. 상심한 황후를 황제는 살뜰하게 달래며 위로했고 그 소문은 널리 널리 퍼졌다. 더욱이, 황제는 다섯 명의 후궁을 두었다. 황제치고는 적은 숫자였다. 모든 백성들이 금슬이 좋은 황제 부부를 찬미했다. 비록 황자들의 용태가 전혀 황제를 닮지 않았음에도 말이다. 그러나 정작 그 순간 황제는 제 장인의 수족들을 하나 하나 잘라가고 있었다.
제국 4년, 황후의 사통 소식이 알려졌다. 황후가 사통했던 자는 다름아닌 제 오라비였다. 요직을 차지하고 있던 그와 황자들은 쌍둥이처럼 꼭 닮아 있었다. 사실이 불거지자 황후는 충격에 뱃속의 아이를 유산했다. 그쯤 되자 대장군은 항거하기 위해 군사를 일으켰다. 황제가 되도 않은 오해를 하고 있다며 끌어내리겠다는 맹세를 한 그는 그대로 황궁까지 쳐들어갔다. 수적으로도, 관록으로도 황제가 열세였다. 오랜 관록을 자랑하던 대장군이었던 만큼, 백성들은 모두 새로운 황제가 끌어내려질 거라는 생각을 저버리지 않았다.
그러나 예상은 그대로 빗나갔다. 황제는 괴물이었다. 수적으로 열세라고 여겼던 것은 큰 착각이었다. 황제는 일부러 장인의 사람들을 남겨놓았다. 무능하고 쓸모없는 존재들만 남겨 장인을 안심하게 만들었다. 단칼에 장인과 처남을 베어넘긴 그는 피범벅이 되어 창 너머로 혼절하다시피 한 황후를 보고 비릿하게 웃었다. 달려나와 죽은 오라비를 끌어안고 사랑한다 속삭이는 황후는 스스로 제 무덤을 팠다. 그렇게 황자들은 폐위되었고 황제는 제 아내마저 폐위시켜 죽였다. 사약이 아닌 목을 베었고 황자들은 폐위되어 사사당했다. 그것으로 모자라 기씨문의 씨를 말렸다. 현을 다스리다시피 했던 세도문 하나가 맥없이 스러졌다. 모든 것을 도륙하고 황제는 본격적으로 제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신경에 거슬리던 나라들을 모조리 집어삼켜버린 황제의 능력에 많은 이들이 탄복하고 공포에 질렸다.
장인의 목을 베고 비릿하게 웃던 그를, 백성들은 광록제狂鹿帝라 불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평성대는 계속되고 있었다.
" 경들은 형편이 없군. "
- 그저 망극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폐하.
빌기만 하면 해결안이 나오나? 수년 동안 그렇게 녹을 먹고도 할 줄 아는 것이 사과밖에 없는가? 생각보다 더 엉망이군. 아주 엉망이야. 상소들을 대놓고 화로에 던져버린 루한이 타들어가는 상소를 보다 불타는 화로를 보며 화가 누그러졌는지 몇 마디를 보탰다. 불쏘시개만도 못한 상소문을 들고 옥새를 받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나? 빛나는 두 눈은 아름다웠다. 그러나 그 안에는 맹독이 있었다. 황제는 고개를 조아리고 있는 중년의 신하들을 비웃었다. 암초¹가 끼어 있었으니 아무 짝에도 힘을 못 썼겠지. 그러나 나는 달라.
" 조만간 군사를 재정비할 생각이야. "
- 허면, 이번에도 정벌을 하실 생각이신지..
" 아니. "
애매한 미소를 짓던 황제가 제 몫의 장검을 편전에 그대로 박아넣었다. 아주 가볍게 이루어진 솜씨였다. 신하들의 바로 앞에 떨어지자 순식간에 덜덜 떨며 뒷걸음질치는 모습이 아주 봐줄 만 했다. 루한은 작게 이죽대다 신료들을 향해 눈길을 주었다. 금방 다시 고개를 조아리는 모양새가 꼴사나웠다. 말을 잇는 표정은 꽤나 흥미어린 얼굴이었다.
" 곤녕의 새 주인²을 맞아들일 테니, 알아서들 준비하시게. "
" 기쁘지들 않나? "
아니 그렇다면 말해보라. 대답하지 않는다면 목을 내놓는 것으로 간주하지. 아름다운 황제가 미소짓자 찬복하는 대답이 쏟아졌다. 루한은 속으로 폭소를 터트렸다. 이제는 좀 더 큰 칼날을 내릴 차례다. 유유히 칼을 뽑아든 황제가 다시 칼집에 그것을 집어넣으면서 별 생각 없이 말을 이어갔다.
" 연국에서. "
그러나, 그 네 단어에서 시퍼런 독니가 뚝뚝 묻어나왔다. 루한의 두 눈빛은 전과는 달리 빛나고 있었다.
말을 마친 루한이 그대로 편전을 나섰다. 곧 신료들은 얼굴빛이 새파래진 채 황제의 저의를 토론하기 시작했다.
루한은 편전을 나와 빈 곤녕을 바라보았다. 옆자리가 될 이의 자리이다. 후궁전은 모두 다 권세가의 여식들이었고 욕구를 해소하는 방책일 뿐이었다. 루한은 항상 무언가를 갈구했다. 그리고 지금 그 갈구하는 정체를 좇으러 움직이는 참이었다. 빈 곤녕에는 누군가가 필요했다. 루한은 세상에서 가장 사악한 인물이었지만 동시에 순수성도 어느 정도는 가지고 있었다. 이내 루한은 새파란 하늘에 손을 뻗었다. 그 모습이 더 없이 아름다웠지만 동시에 웃음짓는 얼굴은 몹시도 사악했다.
" 흰둥아. "
그게 너야.
세훈은 자신을 만난 것을 원망해야만 한다. 이미 루한은 그 인생을 통째로 망가뜨릴 준비가 충분히 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까만 두 눈은 이내 무시무시하게 빛이 난다. 그러면서, 세훈의 얼굴을 상상해 본다.
루한은 웃었다. 뻗는가 싶던 손이 구름을 손에 쥐었다.
그러나, 숨통을 조일 듯이 옥죄어 온다.
¹ 대장군
² 황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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