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나를 매혹시켰노라고. 내 육신과 영혼마저도.
-오만과 편견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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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파에 비스듬히 기대어 앉아 연신 손가락으로 팔걸이를 톡, 톡 치는 태용의 모습을 몰래 올려다보며 오늘 밤은 고단하겠구나, 하는 생각에 다시 고개를 내렸다. 그렇게 가만히 땅만을 응시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목덜미쪽에 느껴지는 손길에 놀라 뒤를 돌아보려 하면, 어느새 나의 뒷편에 선 태용이 고개가 돌아갈 틈도 없이 빠르게 내 목덜미를 잡아 채 앞으로 데려와선 모두가 볼수 있게끔 팔을 뻗게 한 뒤 소매를 걷어올렸다. 소매 아래로 감춰져있던 팔 위의 붉은 상처가 드러나고, 깊게 숨을 들이마신 태용이 입을 열었다.
"설명해."
굳이 누구에게 설명하라고 말할 필요도 없이, 태용의 눈은 정재현을 향해 있었다. 제 주변의 다른 조직원들과 똑같이 바닥에 시선을 고정한 채 무릎을 꿇고 있던 재현의 고개가 얕게 떨리며 천천히 들어올려졌다. "ㅈ....죄송합니다, 보스." 여전히 태용에게 눈을 맞추지 못한 채, 그의 주변을 맴돌고 있는 재현의 시야가 불안스레 움직였다. 재현의 대답에 태용의 입가에 삐딱한 미소가 걸쳐졌다. "설명." 재현은 태용의 눈길이 닿는 곳을 자잘하게 떨리는 눈빛으로 좇았다. 앞에서 내려다본 녀석의 모습은, 평소의 활기찬 모습이 비참히도 뭉그러질 정도로 생기없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흔들림 없이 살기어린 표정 그대로 재현을 응시하던 태용의 손이 내 팔을 더 거세게 잡아오는 것이 느껴졌다. 그런 태용의 모습을 빤히 알고 있을 텐데도, 재현은 뭐라 대답하지 못한 채 애꿎은 주먹만 더 깊게 쥐었다.
다 내 고집 때문에 생긴 일이었다. 큰 신발바닥 밑에서 제 죽음을 기다리는 개미새끼마냥 바들거리는 재현의 모습을 더이상은 보고만 있을 순 없었다. 금방이라도 옆으로 픽 쓰러질 것만 같은 재현에게 안쓰러운 눈빛을 내비친 뒤 입을 열었다. "내가 잘못해서 생긴 일이야." 내 첫마디에 재현의 억센 주먹이 풀어지며 하얗게 질려있던 그 손마디가 천천히 제 빛을 찾아갔다. 내 말에 태용은 실소를 터트리며 다시 소파에 앉아선 제 검지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천천히 지분거렸다. "여주 네 잘못?" 유쾌한 일이라도 생긴 양, 웃음을 터트리며 되묻는 태용 앞으로 심드렁한 표정을 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와중에도, 속으로는 태용의 환한 낯 이면에 어떠한 칼날이 숨겨져있을지 두려워 미칠 지경이었다. "정재현이 분명 체육시간에 운동장에 나가지 말라고 했는데, 굳이 나가겠다고 우긴 내잘못이야. 나도 다칠 줄은 몰랐으니까," 그러니까 걔한테 너무 뭐라 하지마. 자신감을 갖고 시작한 첫마디는 말이 이어지는 동안 점점 굳어지는 태용의 표정 탓에 맥을 추리지도 못한 채 위태로운 꼴로 끝마쳐졌다. 태용은 여전히 눈을 감고 소파 팔걸이에 제 머리를 기댄 채였다. 감고있던 눈을 천천히 뜬 태용이 한참을 말없이 내 상처를 응시하다, 이내 입가에 유한 미소를 띄우며 입을 열었다. "다들 돌아가." 하나 둘씩 일어나 태용에게 인사한 뒤 문을 열고 나가는 조직원들 사이로, 재현이 가까스로 일어서 태용에게 제 허리를 굽혔다. "오늘 일은, 정말 죄송합니다 보스." 긴장감 탓인지 갈라져 흉한 목소리의 재현에게, 태용은 무슨 일이냐는 듯 웃으며 되물었다. 정재현 네가 나에게 사과하는 이유는? 쌩뚱맞은 질문에 재현이 머리를 한대 맞은 듯, 멍한 표정을 지으며 제 자리에 우뚝 섰다. 보스, 무슨 말이신지... 말 끝을 흐리며 대답하는 재현에게 태용은 입에 걸려있던 미소를 더 깊게 아로새기며 대답했다.
"오늘 일은, 여주가 잘못한 거 아니었나?"
"그러니 잘못의 대가를 받는 것도, 네가 아니라 우리 여주가 될거야."
그 말과 함께 순식간에 굳어진 눈동자로 태용은 내 옷깃을 잡아챈 채 온갖 악들이 응집해있는 제 방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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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여주...."
"여주야...."
"여주 님...?"
성가시게 자꾸만 내 호칭을 바꾸어 부르는 재현에게 손짓으로 떨어지라는 신호를 보내고선 다시 자리에 엎드려 누웠다. 엎드리는 순간 허리에 가해지는 고통에 온몸을 움찔해야 했지만. 역시 내 움찔거림을 눈치챈건지, 걱정스러운 표정을 띈 정재현의 얼굴이 내 팔 사이로 비집고 들어왔다. 우스꽝스러운 모양새로 구겨지는 녀석의 얼굴에 웃음을 터트리려다, 블현듯 녀석에게 화가 나 있다는 사실이 다시금 떠올라 인상을 쓴 채 의자에 삐딱하게 걸터앉았다. "왜 계속 말걸고 지랄이야, 귀찮게." 어제 너 때문에 개패듯이 맞았으면 됐지. 짜증섞인 말 뒤에 이어지는 내 작은 말소리에 재현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어졌다.
"야, 그러니까 나만 벌 받으면 될걸 왜 네가 나서서..."
억울해 죽겠다는 투로 울분을 토하던 재현이 이내 나의 처절한 모습을 상상한건지, 미안한 듯 말끝을 흐렸다. 상처들이 자꾸만 욱신거려 하루종일 재현에게 화풀이를 하려다, 옆에서 의기소침한 꼴로 손톱 거스러미 따위를 뜯는 녀석의 모습을 계속 보고만 있기 머쓱해져 뻔뻔한 표정을 짓고 재현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찔렀다. "야, 안 죽었으면 된거지. 그냥 밴드나 붙여줘, 아파 죽겠으니까." 내 말에 시무룩한 표정이던 재현이 언제 그랬냐는 듯 얼굴을 밝히며 대답했다.
"진짜? 밴드 붙여주면 너 기분 풀리는거 맞는거지?"
산책을 나가는 강아지 마냥 발발대는 재현의 모습이 성가시면서 또 보기 나쁘진 않아, 작은 미소를 터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 끄덕임을 보던 재현은 이내 아, 살았다. 하고 제 가슴을 한번 쓸어내리는 시늉을 하더니 신이 나 체육창고로 향했다.
체육창고는, 재현과 나만의 보건실 같은 곳이었다. 타인의 이목을 끌지 않고도 상처를 치료할 수 있는, 우리만의 보건실. "마침 아무도 없네." 먼지가 꽤나 쌓여 뽀얗게 올라온 모양새의 매트 더미를 제 손으로 툭툭 털더니, 폴싹 올라앉은 재현이 제 옆의 자리를 손으로 쳐보였다. "어디가 제일 아파?" 등 돌려 앉은 내게 재현은 퍽 안쓰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말 없이 허리춤을 가리키는 내 모습에, 익숙하되 조심스러운 손길로 내 와이셔츠를 걷어낸 재현이 헙, 하며 숨을 들이마셨다. 뭐 때문에 그리 놀랐냐고 물어볼 것도 없었다. 내 허리를 타고 올라온 울긋불긋한 멍자국과 어설프게 엉겨있는 피딱지들에 놀랐을게 뻔하니까. "이런게 뭐 한두번인가. 그냥 치료나 해." 혹시나 재현이 저 때문에 상처가 생겼다 여겨 미안해할까, 재현에게 괜한 짜증을 내며 녀석을 채근했다. 떨리는 손길로 상처를 하나하나 만지며 수습하던 녀석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도 이건, 너무 심하잖아."
여전히 재현에게서 등을 돌린 채로 별거 아니라는 듯 대답했다. "이정도에서 멈춘 걸 다행으로 생각해야지. 별로 아프지도 않았어." 내 대답을 끝으로, 치료를 마친 듯 재현이 나에게서 조금 떨어져 제 주머니에서 담배곽을 꺼내 담배 한개피를 꺼내 물었다. 하나 줄까? 담배에 불을 붙이느라 뭉그러진 발음으로 묻는 재현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얗게 퍼져나가는 담배연기를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다, 옆에서 나와 다를 바 없이 멍한 표정으로 담배연기를 뻐끔거리는 재현에게 말했다. "앞으로는, 네 잘못 아니면 아니라 말해." 갑작스런 발언에 놀란 듯, 제 담배연기에 목을 콜록대는 재현의 등을 팡팡 쳐주면서 말을 이었다. "나 때문에 죄없는 너만 죽어나는거, 싫으니까 그렇게 하라고." 내 말에 재현은 대답없이 짧게 타들어간 담배를 벽에 튕겼다.
힘없이 불씨를 토해내며 저만의 작은 불꽃놀이를 하던 담배가 눅눅한 체육창고의 바닥과 만나며 짙게 물기를 머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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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쟤, 아까부터 계속 너 쳐다보네." 흥미없이 현미경 렌즈 위로 지문찍기 삼매경이던 재현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분명 별 의미없는 이야기라는 식으로 흐르듯 넘기려는 것처럼 보였지만, 재현은 내게 은근한 신호를 주고 있었다.
쟤랑 엮이면 피곤해지겠다.
그런 재현의 옆에서 멍하니 턱을 괴다, 문득 재현의 말이 맞나 궁금해져 고개를 치켜들었다.
재현의 말이 맞았다.
나와 시선이 마주한 그 아이는 놀란 토끼마냥 눈을 동그랗게 뜨곤 다시 제 학습지에 열중한 척, 등을 돌렸다. 내 시야에 걸린 그의 등짝이 당황한 걸 여실없이 드러내고 있는 것만 같아 속으로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게, 내가 너무 예쁜가봐." 머리를 배배 꼬며 대답하는 내 모습이 아니꼬운지, 재현이 눈을 얕게 뜨며 헛웃음을 쳤다.
"말도 안되는 소리하고 앉았네."
왜? 도무지 이해가 안된다는 표정을 하며 녀석 앞으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웃기시네. 너도 예전에 나보고..." 그런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등 뒤에서 느껴지는 촉감에 뒤를 돌아보면 곤란한 표정을 한 반장이 서있었다. 시력이 좋지 않은지, 눈을 팽글팽글하게 보이게 만드는 무테 안경을 쓴 반장이 자꾸만 손을 가만두지 못한 채 내게 말했다. "저.. 여주 너 수행평가 안할거면..." 연신 망설이고 버벅이느라 이해하는데 몇 분이나 걸린 반장의 말을 요약하자면, 학구열에 불타는 제 자리에 놓인 현미경이 제작동을 하지 않는 관계로 학업에 열중할 수 없으니, 학업에 일체 흥미가 없는 내가 저를 위해 자리를 비켜달라, 이 말이었다. 꽤나 빈정을 상하게 하는 말이었지만, 어디 틀린 구석을 꼬집어낼 수 없는 탓에 고개를 끄덕이며 순순히 자리에서 비켜섰다. 호의적인 내 태도에 다행이라는 듯 안도의 한숨을 쉬어보인 반장이 앉으라며 가리킨 자리는, 일전에 눈이 마주친 토끼의 바로 옆자리였다.
오호.
꽤나 재미나게 돌아가는 상황에 감탄사를 내뱉으며 토끼의 옆자리에 앉았다. 내 모습을 분명 시야에 넌지시 담고있을게 분명한 토끼가 옆에 자리한 사람만이 간신히 느낄만큼 미세하게 움찔거렸다. 정말 이거 영락없는 토끼잖아. 토끼 중에서도 제일 기운 없는 놈. 속으로 녀석을 은근 깔보며 시선을 돌렸다. 토끼는 여전히 그 소심한 짓을 반복하고 있었다. 쳐다볼거면 들켜도 가만히나 있지.
사람이 너무 소심하면 답답해 보일 때가 있다.
"너 왜 자꾸 쳐다보니, 동...영, 아." 말을 함과 동시에 녀석의 학습지 위에 저와 꼭 닮은 동글동글한 글씨로 씌어진 이름을 읽는 일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내 말에 놀란 듯, 동영이란 이름을 한 토끼는 한참동안이나 앞을 응시하다 이내 제 시선을 내려 내 허릿춤을 응시했다. 그런 동영의 행동에 대체 내 허리에 뭐가 있길래... 하고 덩달아 시선을 돌리면, 흰 와이셔츠 위에 붉은 선혈이 붓으로 물감을 떨어트린 듯 퍼져 있었다. 그래서 자꾸만 쳐다본건가. 애써 당황한 표정을 감추며 한손으로 허릿춤을 가리곤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책상 위에 반장이 두고 간 펜을 빙글빙글 돌렸다. "별거 아닌거 갖고... 그냥 상처난거야" 그러니까 자꾸만 힐끔대지마. 내 말에 무언의 동의를 하듯 내게서 시선을 돌린 동영이 여전히 시선을 반대편에 둔 채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아, 그런거구나.
그 후로 한참을 조용히 있던 동영이 별안간 시선을 똑바로 맞춰왔다
"신기하다, 상처가 되게 심하게 났나보네."
어린 아이의 호기심 가득한 얼굴을 한 그애의 목소리는 꼭 속이 비추어 보이는 투명한 물줄기와 같았다.
아니면, 투명한 척 제 자신을 연신 지워내는 흙탕물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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