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루] 스케치북
written by perse
하늘색 스케치북을 책장에서 꺼내들고는 한쪽 귀퉁이에 네임펜으로 이름을 꾹꾹 눌러쓰는 손길이 분주했다.
"스케치북 챙겼고, 맞다 물감"
약간을 두리번대던 남자는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다 아- 하며 책상 위의 물감을 발견하고는 가방에 집어넣었다.
이윽고 방을 나가며 스케치북을 손에 잡았고, 스케치북에 쓰인 오세훈이라는 이름이 마르지 않아 살짝 옆으로 번졌다.
세훈은 화가였다.날씨가 좋은 날이면 사람들의 초상화를 하나둘씩 그려주는.
그림그리기가 특별한 취미이느냐 하면 그것은 아니었다. 돈이 궁했었던것도 아니었다. 사실 세훈은 괜찮은 대학의 경영학과를 전공하고있는 대학생이었다. 경제적으로 넉넉했고, 딱히 그림을 그리고 돈을 받는다거나 하지도 않았다.
그런 세훈이 그림을 그릴 때의 특징으로는 딱 한가지를 꼽을 수 있었다. 세훈은 색채를 단 한 가지 밖에 쓰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은 색이 많아봤자 얼마나 많다고 사람을 표현할수 있느냐 하겠지만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색이 적지는 않았다. 오히려 무궁무진했지.
사람들은 24색 크레파스 안에서만 살아왔지만, 하다못해 흔한 분홍색을 쓸 때도 흰색을 섞은 비율에 따라 코스모스색과 장미색이 따로 나왔고, 같은 색채를 쓰더라도 그것을 붓으로 칠한 것, 펜으로 그린 것, 스펀지로 두드린 것의 차이도 분명했다. 그래서 세훈은 밖에 나가서 그림을 그려주는 것을 좋아했다.
사람들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색을 찾으면, 그 사람의 성격과 마음까지 어느정도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림을 휙휙 그려주고 나서 색과 사람을 마주 대 보면 누가 사람이고 그림인지 그림 안으로 섞여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세훈은 여느 때처럼 사람들도 그려 주고, 지금은 꼬마아이를 앉혀놓고 밝은 남색으로 개구진 남자아이를 그려내고 있는 중이었다..
"자, 선물. 형이 줄게"
"정말? 원장님한테 보여줘야지! 형아 빠빠이!"
저 멀리로 손을 흔들며 아이가 사라져가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세훈의 등을 톡톡 두드리는 무언가가 있었다.
"저기, 저도 그려주실 수 있나요?"
사람이었다. 염색을 한 건지 가을 하늘의 빛을 받으면 그것과 구분이 되지 않는 푸슬푸슬한 머리카락, 하얀 피부. 분명 남자였지만 어딘가 부드러운 분위기가 있었다.
"아, 네 일단 앉으세요"
남자가 살짝 고개를 숙이고는 앞에 의자에 앉았다.
세훈도 캔버스 앞에 앉아 남자의 얼굴을 뜯어보기 시작했다.
"아, 저, 화가님?"
모르겠다. 무슨 색을 써야 제일 잘 그려낼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사람이 색 안으로 섞여들어갈 수 있을까.
세훈은 일단 손을 대 보기로 했다.
"네 그냥 편하게 앉아있으면 돼요."
캔버스 앞에 앉아 파레트에 물감을 섞고, 첫째로 옅은 금색으로 칠해보기로 했다.
얼굴부터, 머리카락까지.
세훈의 미간이 약간 찡그려졌다.
다른 사람들이 본다면 감탄했을법한 그림이지만 세훈이 스케치북을 한 장 넘겼다.
사람의 모든 게 색 안에서 표현이 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그 색이 보이지를 않았다.
세훈은 이번에는 부드러운 적갈색 계열을 써보기로 했다. 파레트에서 물감이 서로 섞이고, 세훈은 무감각한 얼굴로 그것을 쳐다보다가 이내 붓으로 색채를 뭉개어 버렸다.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인지 물통에 붓을 한번 담가 휘휘 저어내고는 다시 파레트로 붓을 가져갔다.
그렇게 시간이 지날수록 파레트에는 색채가 덧대어져만 가고, 넘겨져가는 스케치북의 장도 늘어가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이 지나고, 세훈은 잠시 생각하다가 캔버스 앞에서 일어나 자신의 모델이 된 남자를 불렀다.
"저기요"
.....대답이 없자 세훈은 앞으로 다가가 무릎을 굽혔다.
남자는 고개를 그대로 한 채로 눈을 감고 있었다.
세훈이 그 모습에 의아해하며 제 손목의 손목시계를 보고는,
"아..."
벌써 두 시간 반이 지나 있었다. 그림을 그리고 색을 섞고 남자의 얼굴을 뜯어살펴보는 새에 벌써 석양이 지고 있었던 것이다. 선잠이 든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사실은 눈을 감은 모습도 그리고 싶었지만 세훈은 앞의 인영을 살살 흔들어 깨웠다.
"일어나요"
남자는 눈을 뜨고 제가 눈을 감고 있던 곳이 공원 한복판이라는 사실을 깨닫고는 얼굴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세훈은 그것을 애써 모른척 해 주며 다시 입을 떼었다.
"이름이 뭐예요?"
남자가 아직은 잠에서 덜 깬 채 붉은 얼굴로 대답했다.
"....루한이요"
"루한? 이름 예쁘네요"
"아.......네?"
루한이 이게 무슨말이냐는 듯이 되물었지만 세훈은 들리지 않는듯 말을 이었다.
"루한, 다음주 이 시간에 여기 나와 있어요. 내가 그림그려서 가지고 올게요. 지금은 못그리겠다."
"아..아니 꼭 안그러셔도"
"그럼 다음주에 여기 나와 있어야 해요. 진짜로. 딱 이 시간에"
그럼 조심히 들어가요.
그러고는 세훈이 화구들을 쓸어담다시피 가방에 넣고는 발길을 재촉했다.
시간이 지나 석양이 지고 빛이 비추는 공원 한복판에는 미처 가져가지 못한 빈 캔버스 하나가 남아 있을 뿐이었다.
집에 도착하자 세훈은 제가 무슨 생각으로 다음주에 보자는 약속을 잡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맞는 색채를 찾아내지 못한 아쉬움일까? 그림을 완성시키겠다는 도전일까.
그럴 수도 있었지만 그렇다기에는 행동의 결과가 너무 컸다. 세훈은 한참 머리를 싸매다가 결국 포기하고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맞는 색을 찾아 그 사람을 알고 싶은 마음, 다시 보고 싶은 아쉬움.
올지 오지 않을지도 확실하지 않았지만 세훈의 가슴은 약간 간지러운 기대감에 들떠 있었다.
그렇게 하늘색 스케치북 위에서는 풋사랑이 그려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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