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 파찌 [16 오수정] [오전 11:36] ○○! [16 오수정] [오전 11:36] 나 기억나지? 미디어의 이해 같이 들은 [16 오수정] [오전 11:36] 아까 너 학술관에서 봤는뎅 [16 오수정] [오전 11:37] 옆에 있던 남자 누구양?? [16 오수정] [오전 11:41] 핵존잘 ㅠㅠ 나 소개 안 될까??? 또 시작이다. 오전 강의 때문에 지친 몸을 이끌고 공강 시간을 채우기 위해 친구가 지내는 자취방으로 피신했더니, 잠깐 잠든 사이 친구는 학교 간다는 쪽지 하나만을 남긴 채 사라진 상태였으며 핸드폰에는 얼굴도 기억 안 나는 같은 과 동기가 톡을 쌓아 놨다. 구태여 묻지 않아도 상대는 김민규 아니면 이석민일 확률이 각각 50%에 해당했다.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흐릿한 정신을 깨우기 위해 몸을 비트니 여기저기서 뼈 긁히는 소리가 들렸다. 19살 때는 자고 일어나도 금세 돌아다녔는데 앞자리 바뀐 티 내는 몸이 야속하기만 하다. 오수정, 오수정. 앞머리가 있고 단발이며 키가 작았던 것 같은데. 내 기억속 오수정은 얼굴만 뿌옇게 블러 처리된 지 오래였다. [나] [오후 1:12] 아 걔 여소 안 받는다고 했어 [나] [오후 1:16] 미안 나는 사실을 조작하고서 뿌듯하게 데이터를 차단했다. 둘에게 오수정의 용건을 묻는 것쯤은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마냥 쉽지만도 않았다. 첫째, 나는 오수정이랑 친하지 않다. 둘째, 오수정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다. 셋째, 귀찮다. 남의 연애사에 끼어드는 행위가 얼마나 복잡한지 잘 알고 있다. 여기에 사족을 붙이자면, 연애 경험 없는 애들은 상담을 잘해 준다. 내 경험에서 나온 자신감이다. 나는 고등학생 때부터 주변 친구들의 연애 상담을 해 왔다. 연애 상담이란 "얘기 들어 줘서 고마워." 로 시작해 끝은 말 그대로 상담만 하게 되는 자타공인 '상담 호구'로 전락해 버린다. 보통은 "네 말이 맞는 것 같아." 하고 동조해 주지만 뒤에서는 내가 일러준 대로 하지 않았다가 시간이 흐른 뒤 또 같은 내용으로 날 '상담 호구'로 만들고는 했다. 부러우리만큼 연애에 성공하는 애들은 주변에 몇 없었다. 나는 이 패턴이 굉장히 지루했다. 대학까지 와서 좌 김민규, 우 이석민을 향한 친구들의 징검다리가 되어 주고 싶지 않았다. 김칫국은 내가 더 마시고 있는 판국이었지만, 미리 예방하는 것도 나쁘지만은 않은 셈이었다. 나는 괜스레 끄덕여 보이며 오수정과의 대화 내용을 머리에서 지워 버렸다. 가만 생각해 보니 억울하기도 했다. 나는 언제까지 남 연애사나 구경할 처지인 걸까. 물론 드라마 남자 주인공과 남자 친구를 두고 보라면 난 경건히 남자 주인공을 선택할 위인이었다. 시작도 중간도 끝도 어려운 애인을 두느니 내 사리사욕이나 채워 줄 브라운관의 오빠가 나았다. 친구들은 내 얘기를 들을 때마다 짠내가 나서 못봐주겠다고 비난했지만, 상관없다. 내 인생은 내 것이고 난 연애 여부도 스스로 결정할 것이다. 지금의 난 유학 간 홍지수가 돌아와 번호를 묻더라도 슬슬 피할 인간이니까. 나는 가방 안에서 쿠션 팩트를 꺼냈다. 오전 강의 때 친한 사람 마주칠 일 없다고 대충 옷만 갖춰 입고 나온 터라 얼굴이 엉망이었다. 급하게 뭐라도 바르고 나니 그제야 생기가 돌았다. 네 시에 있을 강의 전에 팀플 약속이 잡혔다. 나는 친구가 잠깐 빌리겠다며 책상에 꺼내 놓은 검은 노트북을 챙겼다. 정문 근처인 친구네 집에서 약속 장소인 약학대 쪽문 뒤 카페는 단 십 분 거리였다. 왜 하필 그곳인지는 잘 모르겠다. 아마 후문이나 정문의 카페에 비해 인적이 드물기 때문인 것 같았다. 눈을 뜬 건지, 감은 건지 모를 실눈으로 걸어 장소에 도착하니 조원들이 없었다. 시간은 한 시 삼십 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정확한 시간에 도착했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다가도 곁에 빈 자리들을 보자면 마냥 기쁘진 않았다. 나는 도착한 것을 알리려고 오늘자 날짜의 첫 톡을 보냈다. [나] [오후 1:32] 다들 어디세요? [나] [오후 1:32] 저 도착했는데 보낸 지 얼마 되지 않아 선배들로부터 답장이 왔다. [14 연태수(어쩌조장)] [오후 1:33] 지금 가는 중입니다~ [14 연태수(어쩌조장)] [오후 1:33] 얼른 갈게요~ [15 김현민(어쩌조)] [오후 1:33] 저 좀 늦을 듯요 나는 허탈하게 웃으며 키패드를 눌렀다. [천천히 오세요 ^^] 이모티콘과 달리 실제 표정은 굳어 있는 상태였다. 함축된 의미는 "빨리 오지 않으면 열받아서 자폭할지도 모른다." 였다. 핸드폰을 잠시 내려놓고 자느라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모아 묶으려 하니 화면이 반짝인다. 얼핏 봐도 조원의 것인 듯했다. 단숨에 확인 버튼을 눌렀다. [15 권순영(어쩌조)] [오후 1:34] 어디예요 [15 권순영(어쩌조)] [오후 1:34] 나도 카페에 있는데 내용에 화색이 돌다가도 이름을 보고 죽상된 내 얼굴은 가관이었다. 왜 하필 이 사람이람. 숫자가 줄어든 탓에 읽은 걸 알 게 뻔했다. 이런 전개는 예상해 본 적이 없어서 난감했다. 조별 과제의 사회적 특성을 탓하며 톡을 보냈다. [나] [오후 1:35] 2층 올라오자마자 오른쪽 자리에 있어요 보내자마자 숫자가 빠르게 줄어들었다. 좆됐다. 내 입이 아닌 뇌의 판단에 의해 다소 저급한 단어가 튀어나왔다. 나는 허둥지둥 대기 시작했다. 계단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공포 영화 효과음보다 더 떨렸다. 나는 가방을 끌어안고 고개를 숙인 채 시선만 빼꼼 올려 계단 쪽을 바라봤다. 검은 후드 집업을 뒤집어 쓴 권순영이 고개를 두리번 대더니 나를 발견했다. 나는 어색하게 일어나 바짝 고개 숙였다. 권순영도 살짝 끄덕이며 의자 하나를 빼 내 앞자리에 착석했다. "언제 오셨어요?" 경직된 얼굴은 잊은 채 목소리를 상냥하게 가꾸며 물었더니 권순영이 백팩을 바닥에 내리며 대답했다. "십 분 전이요." "아, 일찍 오셨네요." "그다지요." "저보다는 일찍 오셔서..." 나는 기가 죽고 있었다. 젠장. 남자랑 단 둘이 얘기 나눈 적이 있어야 말이지. 여기서 이석민과 김민규는 제외다. 그 둘은 나한테 언니와 여동생 같은 이미지였다. 물론 어색해질 때가 아직도 종종 있어 의식하지 않으려 노력하는 중이지만. 아무쪼록 성별만 망각하고 있으면 그런대로 같이 있을만 했다. 그런 나에게 권순영과 단 둘만의 대화는 울렁거림을 느낄만큼이나 부담이었다. 권순영은 핸드폰을 주머니에서 꺼내고는 테이블 위를 바라보며 말했다. "주문 할까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이따 다른 분들 오시면 같이 주문하면 돼요." "아." 권순영이 끄덕였다. 분명 나처럼 어색함을 감지한 게 분명했다. 나는 테이블 아래로 손을 놀렸다. [야 김민규 ㅅㅏㄹ려 줘] 지금쯤 집에 있을 김민규에게 톡을 여러 개 보내고 나니 부산스러웠던 심장이 가라앉았다. 역시 이럴 땐 관심을 분산시키는 게 최고였다. "점심은요." "네?" 뜬금없는 권순영의 화법에 핸드폰을 테이블 위로 올리던 나는 눈을 찡그렸다. 의도한 건 아니었다. "점심 먹고 왔냐고요." "점심이요? 오늘은 시간이 애매해서 못 먹었어요." 조심스레 대답하자 권순영이 "아..." 하고 좀 전과 같은 반응을 보이더니 살짝 웃는다. 왜 웃는 거지. "답장 왔어요." "네? 아, 도착하셨나 보다." "말고, 친구." 나는 권순영의 말에 사고회로가 정지된 것마냥 몸을 굳혔다. 무슨 친구? 자기 친구한테서 연락 왔다는 소리인가. 권순영이 턱을 괴고서 자꾸만 웃길래 무의식적으로 그 시선을 따라 눈을 움직였다. 끝에 내 핸드폰이 있었다. 화면이 자꾸만 반짝였다. 언제부터였는지 김민규가 연속으로 난리를 치며 답장을 보내고 있었던 것이었다. 나는 미리보기로 뜨는 톡 내용에 아연실색했다. 얼마 전, 이석민이 핸드폰을 구경하다 말고 "무슨 폰트 크기가 이렇게 작아? 하나도 안 보이잖아. 오빠가 이런 것까지 간섭해야겠어?" 하며 크기를 거의 할머니, 할아버지들께서 사용하시는 돋보기 수준으로 키워 놓은 것을 잊고 있었다. 내가 그걸 원상복귀시키기 귀찮다는 이유로 가만히 내버려 둔 것도. 폰트가 커서 권순영이 저 거리에서도 가볍게 읽을 수 있다는 것까지도. "......" 죽고 싶었다. "화장실 다녀올게요..." 나는 권순영의 대답은 듣지도 않고 핸드폰을 쥔 채 화장실로 달렸다. 슬쩍 본 거울 안 내 얼굴이 쪽팔림으로 물든 것쯤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저 핸드폰 잠금을 풀고 김민규의 톡을 속독할 뿐이었다. [16 김민규] [오후 1:43] 오ㅑ [16 김민규] [오후 1:43] 왜!???? [16 김민규] [오후 1:43] 권순영이 그때 말한 어쩌조 선배임? [16 김민규] [오후 1:44] 연영과ㅏ랬던?? [16 김민규] [오후 1:44] 헐 대박임 [16 김민규] [오후 1:44] ㅋㅋㅋㅋㅋㅋㅌㅌㅌ [16 김민규] [오후 1:45] 잘생겼다고 하지 않음? ㅋㅋㅋㅋㅋㅋ [16 김민규] [오후 1:45] 권순영! 권순영! 권스ㄴ영! [16 김민규] [오후 1:45] ○○○ 안 그래도 눈 높아서 [16 김민규] [오후 1:46] 달이 그린 구름빛 남주밖에 모루는 [16 김민규] [오후 1:46] 바보인데... [16 김민규] [오후 1:47] 이렇게 된 거 권 씨로 갈아타는 게 어떰 [16 김민규] [오후 1:47] 번호 따 ㄱㄱㄱ 내용을 확인하자마자 김민규를 향한 내 화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꼭 현기증이 나는 것만 같았다. 김민규 죽인다. 여섯 글자만이 오롯이 내 마음을 대변할 수 있었다. 나는 짤막한 톡 하나를 보냈다. [어 네 멱 딸게 ㅇㅇ] 핸드폰을 바지 주머니에 쑤셔 넣은 채 찬물에 손을 씻었다.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다. 진짜 이 새끼 어쩌면 좋지. 김민규의 남은 여생을 걱정하며 내가 허튼 짓이라도 하게 될까 봐 복식호흡을 연달아 했다. 여덟 시 저녁 뉴스에 나오기에는 내 나이가 너무 꽃다웠다. "아, 뭐. 자세히는 못 봤을 거야. 그냥 대충 훑은 거겠지." 여자 화장실에서 혼잣말을 하는 나는 꽤 처량했다. 손에 남은 물기를 냅킨으로 낚고서야 겨우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그새 도착한 건지 나머지 두 명의 조원들이 자리에 앉아 있었다. '진작 오지...' 나는 허탈한 한숨을 토하며 너털한 걸음으로 걸어갔다. 두 선배들과 인사하고 반기는 틈에서도 권순영은 분명 나를 보고 있었다. 주문 먼저 하자는 선배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카운터로 내려갈 준비를 하니 권순영이 카드를 챙기곤 선배들을 만류했다. "제가 살게요." 선배들이 서로 쳐다보다가 "그래요. 돌아가면서 사는 게 낫겠네. 다음에는 내가 살게요." 하며 그 말을 반겼다. 지갑을 든 나의 손이 무색해져 천천히 손을 모아 무릎 위로 내렸다. 권순영이 자리에서 일어나 메뉴를 물었다. 나는 영혼 없이 "카페 모카요." 하고 대답했다. 별 반응이 없는 걸 보니 역시 전체 내용은 모르는 게 틀림 없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에 안도감이 들었다. 나는 핸드폰을 들어 김민규에게 다시 연락하기 위해 키패드를 눌렀다. 정신을 잠깐 판 사이 권순영이 의자를 뒤로 끌었다. 의자 소리에 자연스레 시선을 드니 서로 눈이 맞았다. 나를 본 권순영이 내 손에 들린 핸드폰을 바라봤다. 그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는 내내 시선을 떼지 않았다. 내가 멍청히 입을 벌리고 있는 동안 권순영은 빠르게 계단 아래로 사라졌다. 못 보긴 뭘 못 봐, 다 봤겠지. 씨발, 망할! 나는 참을 수 없는 수치심과 부끄러움에 지금 당장 이 자리에 폭탄이 떨어져도 괜찮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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