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겨울바람은 유난히 매섭다. 코트 안에 카디건을 덧입고, 그 안에 또 옷을 덧입은 채 옷깃을 단단히 여미어도 칼바람은 뼛속까지 파고든다. 걸은지 얼마나 됐을까. 버스로 통학을 해야 할 거리라 다른 사람들은 혀를 차겠지만 삼년 내내 꿋꿋하게 두 다리로 버텼다. 버스비가 인상됐고 또 지하철비도 인상됐으니 교통비로 지출할 돈을 생각한다면 아깝기만 할 뿐이다. 다른 아이들과 달리 야자를 하지 않은 채 학교를 벗어난 발걸음은 점점 무거워져간다. 멀리서 불빛이 아른거렸다. 재개발 열풍을 다행스럽게도 비껴간 달동네가 손을 흔든다. 점점 다가오는 빛을 애써 무시했다. 이어폰을 타고 흐르는 뉴에이지의 볼륨을 높였다.
볼륨을 높였다 생각했는데 공사장의 소음을 막을 순 없었나 보다. 빌딩을 짓는다고 하던데, 공사가 한창이다. 완공일이 내년 여름이니 내년 여름까지는 이곳을 지나칠 때마다 먼지를 들이마시고 귀를 파고드는 소음을 견뎌야 했다. 하지만 완공된 후의 건물을 상상하는 건 즐겁다. 이런 후진 곳에 빌딩이라…. 일층엔 분명 프랜차이즈 커피숍이 생길 거다. 카페베네나 스타벅스 같은. 사 먹을 일은 없지만 말이다.
“남우현!”
“호원이냐?”
노가다 뛰었어? 아직 양손에 낀 목장갑이 흙먼지로 뒤덮여있었다. 멋쩍게 웃으며 장갑을 벗어던진 호원이 그대로 낡은 점퍼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할 줄 아는 게 힘쓰는 거 밖에 없다. 호탕한 웃음소리에 저 역시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아, 이거나 줄까. 제 주머니 속에서 열을 내던 핫팩을 꺼내 호원의 주머니 안에 넣었다.
“좀 전에 뜯은 거라서 되게 뜨거워.”
“마, 내 이런 거 안 줘도 된다. 지금까지 장갑 끼고 있어서 손 하나도 안 시려.”
남자는 사투리 떼기가 어렵다는 말을 들었는데 호원을 보면 제대로 와 닿았다. 마산 토박이던 그가 어색한 표준어를 구사할 때마다 늘 웃음이 나왔다. 너는 표투리야, 표투리. 어? 호원이 씩 웃으며 이어폰 한쪽을 빼냈다. 언젠가 고쳐지겠지. 그나저나, 늘 듣던 걸로 아가씨. 능글맞은 어투와 어깨를 감싸오는 팔에 큰소리로 웃었다. 그 탓에 남아있던 이어폰까지 빠졌지만 개의치 않았다. 내가 술집 년이냐, 새끼야. 다시 이어폰을 귀에 꼽고 노래 목록을 뒤지며 톡 쏘듯 내뱉었다. 어깨를 감싼 손에 힘이 들어온다. 호원은 흑인음악을 좋아했는데 호원을 마주칠 때마다 들었기에 자주 듣는 노래, 뉴에이지 속에 섞여 들어왔다. 이런 노래는 제목도 외우기 어렵다.
“이 새끼 이거 또 시작이네.”
“그럼 좀 받아주라. 알면서 튕기기는.”
“으응, 사장님 왜 이렇게 안 왔어? 기다렸잖아, 사장님 좋아하는 노래 틀고 계속 기다렸는데?”
“와 역시 남우현이다. 존나 잘 하네, 인정한다.”
“이딴 걸로 칭찬하지 마 인마. 수치스러워.”
입술을 삐죽이며 빈정대자 호원이 제 입술을 때린다. 정확히는 입가를 때린 거지만, 약하게 친다고 한 것 같은데 꽤나 아프다. 정말 할 줄 아는 게 힘쓰는 거 밖에 없어서 그런가. 얼얼한 입가를 문지르며 고개를 들자 입꼬리가 귀에 걸릴 만큼 실실 웃고 있다. 괘씸해 음악의 볼륨을 최대치로 높였다. 꽤나 놀랐는지 몸을 부르르 떠는 게 꼭 고양이 새끼 같아 아픔도 잊고 샐쭉 웃음이 나온다.
걷다 보니 어느새 호원의 집 앞에 다다랐다. 동네 입구에 위치한 호원의 집과 달리 제 집은 한참을 더 올라가야 하기에 바래다주겠다는 호원을 들여보내곤 뭐라고 하는지도 모를 음악을 꺼버렸다. 아침잠이 없는 사람들이라 북적북적한 오전과 달리 깊은 밤도 아닌 지금, 쥐 죽은 듯 조용한 동네는 이중적인 느낌이 든다.
“진짜 아무도 없네.”
바람 소리만 들리는 귀가 허전해 다시 음악을 재생했다. 밴드 음악이 나오자 드럼비트에 맞춰 발걸음을 옮겼다. 드문드문 놓인 가로등은 언제나 적응이 되지 않았다. 다른 거에 돈 쓰지 말고 가로등이나 좀 놔주지. 입 밖으로 내뱉으며 투덜대지만 대답해 오는 이는 아무도 없다. 주위를 둘러보면 미화를 한답시고 그려놓은 벽화들이 가로등 불빛을 받아 기괴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해가 유난히도 일찍 지는 겨울이, 이래서 싫다.
“우현.”
오늘따라 제 이름이 많이 불리는 것 같다. 잘못 들었나? 천천히 소리가 난 쪽으로 돌아보다 급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고개도 푹 숙인 채 무작정 앞으로 걸으며 뒤에서 불러오는 소리를 무시한다. 우현아! 공주야! 헤어진 옛 애인을 부르듯 애타게 외치는 모습에 온 정이 떨어진다. 달동네에 유일한 슈퍼를 등진 채 담배를 물고 뻑뻑 피워대는 폼이 어느 조폭 못지않다. 혹시 따라오고 있나 싶어 뒤를 돌자 아니나 다를까 연기를 내뿜으며 이죽이죽 웃고 있다.
“왜 따라와.”
“난 내 갈 길 가는 건데?”
길게 찢어진 눈이 휘어짐과 동시에 입술을 짓이겼다. 이렇게 저 새끼의 페이스에 말리면 안 되는데. 가방끈을 꼭 붙잡고 다시 발걸음을 옮긴다. 현아, 그러고 있으니까 유치원생 같아. 나는 어린애엔 취미 없는데. 도저히 상종을 못 할 인간이다. 우현은 그를 인간 말종이라 치부하고 골목 안 쪽으로 들어갔다. 여기까지 따라오는 건 아니겠지. 한숨을 푹 쉬고 음악을 껐다. 괜히 여기로 들어왔네. 왼쪽으로 고개를 돌려도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려도 벽화 투성이다. 할머니의 웃고 있는 얼굴이었는데 두 분 다 최근에 돌아가셨으니 우현은 앞만 보고 걸을 수밖에 없었다.
경사가 워낙 높은지라 오를 때마다 숨이 가쁘다. 입김이 뭉근히 피어 오는 게 완연한 겨울이구나, 싶다. 이번 겨울은 제발 짧았으면 좋겠다. 아무런 소리도 나오지 않은 이어폰을 뽑은 채 주머니 속에 넣었다. 동전 두어 개와 이어폰이 엉킬 것 같지만 별 신경 쓰지 않는다. 그리 비싼 것도 아니고 기본적으로 주는 것이니. 계단을 하나하나 오를수록 숨소리가 크게 들린다. 크게?
“야 이 씨발놈아.”
“굿 이브닝.”
“뭘 쪼개, 야 꺼져 얼른. 너 갈 길 가는 거면 다른 길로 돌아서 가.”
“내가 왜 그래야 해, 우현아. 여긴 이 동네에 사는 사람들이라면 모두 밟고 가는 길이야, 나도 이곳 주민이고 그런데 우현. 네가 날 간섭할 권리는 없다고 생각하는데? 응?”
또 이런 식이다. 빌어먹게도 꽤 배운 놈인지 말하는 실력이 좋아질 수밖에 없었다. 말만, 말만 잘 해. 괜히 분해져 얼굴이 붉어진다. 우현아 흥분했어?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웃는 놈을 발로 차 밀어버리고 싶지만 합의금이 두려워 아무 말없이 바라보기만 했다. 우현아 그렇게 내려다보니까 섹시하다. 가로등 탓에 주황빛으로 물든 놈의 얼굴에 눈을 질끈 감았다. 조금만 더 가면 집인데, 얼른 집에 가서 쉬고 싶다. 내일은 꼭 호원이랑 같이 와야지. 별의별 생각을 다 하는 동안 크게 부스럭대는 소리가 들렸다.
“뭐, 우현이가 그렇게 날 보기 싫어한다면….”
“제발 좀 꺼져….”
“눈물을 머금고 사라져 줄게. 흑흑, 우현아 다음부턴 꼭 성규라고 불러줘. 아 난 자기야란 말도 좋아해. 여보도 좋아하고.”
김성규는 그냥 미친놈이 틀림없다. 미련 없이 뒤를 돌아 계단을 내려가는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 그를 향해 중지를 들어 올렸다. 엿이나 먹어, 내려가다 굴러떨어지면 좋겠네.
언제부터였는지는 모르겠다. 겨울이 시작되면서였다. 재수 없게도 싫어하는 계절과 함께 찾아왔다. 집으로 돌아갈 때마다 같은 자리에서 담배를 피워대길래 얼굴은 알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고 그가 웃어 보이면 무시하고, 반복되는 일상이 지겨웠는지 말을 걸기 시작했다. 이름이 뭐야? 우현이? 첫 대화는 무난했다만 가면 갈수록 그 새끼의 미친놈 본성이 보였다. 씨발놈!
그놈은 분명 저 멀리로 내려갔을 테고 하늘을 올려보자 별이 반짝였다. 아니 반짝인다고 할 수도 없을 만큼 탁했지만 듬성듬성 박혀있는 게 약하게 빛을 냈다. 금세 흥미가 떨어져 다리를 움직이는데 추운 날씨 탓인지 다리가 저리다. 몸뚱이도 말을 안 듣네, 낮게 중얼이며 집을 향해 걸었다. 내일은 김성규를 안 보게 해주세요. 제발.
집 안에서도 입김은 계속됐다. 주말엔 마트에 가서 에어캡을 사 와야겠다. 연희 감기라도 걸리면 큰일이니, 창문에 붙이고 또 먹을 건 있나. 냉장고를 열어보는 순간 하나밖에 없는 방의 불이 켜졌다. 우혀니 왔어? 오빠라고 해야지 인마. 우혀니 오빠야. 곱게 양 갈래를 한 채 기어 오는 연희를 감싸 안았다. 유치원 끝나고 집에만 있었지? 등을 가볍게 토닥이며 쓸자 어깨를 문다. 테레비 봤다, 테레비. 그랬어? 오구 잘 했어, 우리 연희. 내년에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아이기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나이차가 많이 나기도 하고 의지할 곳이라곤 저 하나밖에 없으니 아버지가 보내는 생활비로 연희가 초등학생이 됐을 때 버틸 수 있을까. 한숨을 푹 쉬자 볼을 만져온다. 오빠야, 왜 왜 그래? 저를 꼭 닮은 얼굴이 화사하게 웃어 보인다. 때 묻지 않은 순수함이 부럽기도 하며 괜히 코 끝이 찡해진다. 부성애라도 생겼나.
“아니다, 우리 연희 코오 해야지.”
“응! 오빠야 언느 와, 연희 장판 따뜻해.”
“알았어, 알았어, 오빠 얼른 갈게. 연희 얼른 가서 누워있어.”
품에서 내려주고 엉덩이를 톡톡 치자 쪼르르 안으로 달려간다. 가방을 아무렇게나 던져두고 행거에 코트를 걸친 채 욕실로 들어갔다. 냉기에 몸을 움츠렸다. 이렇게 추운데 연희는 어떻게 씻었나. 앞으론 옆집 아주머니에게 연희를 부탁해야겠다 결심한 채 물을 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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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 오빠는 멋있습니다 전 오빠를 사랑하며 또 애정하고 오빠에겐 애정 폭격기입니다 오빠의 멋짐에 늘 감탄합니다 오빠를 또라이로 만들고 싶었던 건 아,아냐!
저희 우현이는 사랑스럽습니다 전 우현이를 사랑하며 또 애정하고 우현이에겐 한없이 (부)드러워집니다... 저,절대 우현이를 츤데레로 만들고 싶었던 건 아,아냐!
끙… 필명을 바꾸었습니다 새사람으로 태어난 기분 개명을 하면 이런 느낌일까요^,^ 제가 없어도 성우는 여전했습니다 어휴 땀나네;; 다한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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