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븐틴/권순영] 연애 못하는 여자 03 | 인스티즈](http://file2.instiz.net/data/cached_img/upload/2016/10/19/20/7b72e985924f93681150063d81f49264.jpg)
W. 파찌 주말의 이른 낮. 나는 할 일 없이 침대에 누워 한 시간 넘게 눈만 깜빡였다. 먹은 것 없는 속은 금방이라도 토기를 불러일으킬 듯 부대꼈다. 콩나물국이라도 끓일까, 했지만 집에 남은 사람이라고는 나 하나뿐이라 보통 귀찮은 게 아니었다. 들여다 본 핸드폰에는 연락이 한 통도 없었다. 인생을 헛 살았나 보다. 주말은 잠이 최고였지만 부른다면 투덜대며 기꺼이 나갈 1%의 생각 정도는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모두 부질 없는 바람인 것 같아서 포기했다. 그래도 사람이라고 슬슬 배가 고팠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씻지도 않은 몸으로 냉장고를 열었다. 어떻게 된 게 먹을만 한 음식이 없었다. 나는 핸드폰을 어깨에 올려 귀에 바짝 대고 고정한 채 전화를 걸었다. "엄마. 냉장고가 왜 비었지. 집에 먹을 거 하나도 없나?" [야, 이 가시나야. 니 지금 인났나. 지금이 몇 시고?] "아, 내 아까 일어났다." [미친갱이가. 밥을 여직 안 처묵어쌌노. 그러다 디지면 우얄라고 이러는데.] "장난하나! 무신 엄마가 딸한테 그런 말을 해 쌌는데? 내 알아서 잘 먹거든?" [허이고, 퍽이나 잘 챙겨 먹겠다. 마이 컸네. 따박따박 대들고!] "아, 알았다, 알았어! 내 이따 나가서 맛있는 거 먹을 기다." [뭐라카노. 누구랑?] "있다!" [가시나 드릅게 싸나워가. 쯧. 뭐 또 가시나들이랑 만나나.] "......" [그라믄 그렇제... 니 인생에 무신 머시마가 있다고...] "진짜 이럴 기가? 밥 한 번 안 먹었다고 내한테, 어? 그라고. 내 오늘 남자랑 밥 먹을 거거든. 걔 울 학교서 므쨍이라고 소문 났거든!" [니 잘 났다. 니 집에 갔는데 방에 있음 디질 줄 알아라! 알겠나?] 나는 씩씩대며 울분을 토했다. 뜨겁게 열오른 핸드폰을 내려놓다가 괜히 냉장고 문을 세게 닫았다. 에라이, 썅. 찬물을 들이킨 나는 의자에 앉았다. 주말에 늦게 일어나 아침 못 먹었다고 남자 문제까지 거들먹 대야 한다니. 이보다 더 마음 아플 수는 없었다. 그보다 홧김에 또 사투리를 쓰다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였다. 나는 마음을 평온하게 다스려야만 했다. 상경하신 부모님과 달리 서울에서 나고 자란 나는 표준어가 익숙했다. 하지만 워낙 두분이 집에서 사투리를 쓰시다 보니 마찬가지로 자연스럽게 입에 익었다. "아, 안 되는데. 애들이 보면 또 엄청 놀릴 텐데." 어릴 때부터 유독 내 사투리를 들으려고 혈안이 된 주변 탓에 웬만해선 자제하고 있었다. 나는 아나운서처럼 몇 마디를 내뱉다가 다시 핸드폰을 줏어들었다. 큰일이었다. 안 나가고 집에 있으면 또 "니가 그럼 그렇제." 하며 쯧쯧 혀를 차올 엄마가 생각났다. 괜한 승부욕이 들끓었다. 골똘히 생각하던 나는 김민규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금은 전화를 받을 수 없어......" 제기랄.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평소 잘만 연락됐던 김민규가 오늘은 대꾸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이석민의 번호를 눌렀다. 신호음이 몇 번 가지 않아 이석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다급하게 외쳤다. "야, 이석민 너 오늘 뭐 해. 저녁이나 같이 먹을래?" 사소한 잡음이 통화를 방해했다. 이석민의 목소리가 띄엄띄엄 들렸다. "나...... 원우 형...... 여기 창원......." 씨팔... 뭐라는 거야. 대충 들리는 말로 조합해 보면 평소 친하다고 했던 형을 만나기 위해 지방까지 내려간 것 같았다. "알았으니까 끊자. 올 때 조심해서 와." 나는 통화를 종료하고 나서 식탁 위로 머리를 내리박았다. 인생에 도움되는 것은 하나도 없구나. 여자 친구들을 만난다면 두루두루 알고 있는 엄마가 눈치 챌 게 뻔했다. 그런 더 없이 쪽팔릴 상황은 연출하고 싶지 않았다. 마지막 기회다 싶어 핸드폰 전화번호부를 살폈다. 없는 게 생기진 않는다고 죄다 여자 이름 아니면 고등학교 때 담임 선생님들의 성함뿐이었다. 그래도 혹시 모른다고 스크롤 당기기를 반복하며 하나하나 곱씹었다. 어떻게 된 게 하나조차도 없었다. 내가 아무리 남자를 어려워 했다고 해도 연락처에 몇몇 정도는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나도 모르게 차단하고 있었는지 죄다 연 끊기고 남은 건 가끔 게임 메시지나 보내는 애들이었다. 이대로 엄마의 비웃음거리로 전락할 것인가. 진지하게 성찰할 때쯤 내 눈에 권순영의 이름이 보였다. 아무리 그래도 권순영은 아니었다. 도저히 좋게 엮일만 한 인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과감하게 권순영의 이름을 지나쳤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대화 버튼을 눌렀다. 인생은 본디 엮이고 싶지 않은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게 아니던가. 나는 권순영에게 구구절절 인사를 보냈다. 내가 누군지부터 시작해 "오늘 시간 있으세요?" 하는 꽤 상냥한 말투까지. 전송 버튼을 누르고 나서 후회했지만 금방 숫자 1이 없어지는 탓에 그럴 틈도 없이 혼란을 겪어야 했다. "뭐야, 무슨 톡을 이렇게 빨리 읽어?" 프사 하나 없는 권순영의 답장이 곧바로 왔다. 나는 신중하게 심장을 부여잡았다. 그리고는 실눈을 뜬 채로 그것을 확인했다. [15 권순영(어쩌조)] [오후 12:26] 있어 [15 권순영(어쩌조)] [오후 12:26] 왜 내 눈에 비친 권순영의 답장은 살갑지 못했다. 술집에서 말 놓자고 하더니 몸소 실천하고 있었다. 이런 이미지일 줄이야. 진심이었을 줄은 몰랐다. 하긴. 거기다 대고 불평 한번 못한 내 탓이 컸다. 역시 괜한 짓을 한걸까, 고민하는 찰나에 두 개가 더 왔다. [15 권순영(어쩌조)] [오후 12:26] 지금 안양이라 [15 권순영(어쩌조)] [오후 12:26] 학교까지 두 시간은 걸릴 텐데 뭐라는 거야. 안 물어 봤는데. 나는 입을 삐죽이며 답장했다. [나] [오후 12:27] 아무 말도 안 했는데요 보내고서 통쾌한 마음이 들어 비실비실 웃었다. 권순영이 빠르게 답을 해 왔다. [15 권순영(어쩌조)] [오후 12:27] 만나자는 말투였잖아 권순영은 눈치가 빠른 사람이었다. 그게 아니라 나와 다르게 좀 더 돌직구 날릴 줄 아는 사람이라든가. 나는 한참을 망설였다. 평소보다 차근차근 키패드를 눌렀다. 혹시나 오타가 있는 건 아닐지, 문장이 어색하지는 않는지 여러 번 훑은 후에야 전송시켰다. [나] [오후 12:29] 꼭 그런 건 아니지만요 [나] [오후 12:29] 저도 그 정도 걸려요 [나] [오후 12:29] 같이 밥 먹을 사람이 없어서 그래요 그리고선 한참이나 답장이 없었다. 오 분이 지나서야 '알았어.' 하고 단 두 글자를 보내는 게 전부였다. 남자와 함께 하는 생애 첫 식사인 터라 떨려죽겠는데 저쪽은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나도 권순영 때문에 떨리는 건 아니니까. 단지 할아버지와 아빠 그리고 이석민, 김민규로 이루어졌던 내 좁은 세계가 드디어 한 걸음 더 나아가는 것만 같아 뿌듯했을 뿐이다. 동시에 이 미친 행동이, 시간 지나면 이불을 뻥 찰 나의 과오가 엄마와의 신경전에 의해 시작됐다는 사실이 통탄스러웠다. 내가 괜찮다는데 왜 자꾸 나만 보면 남자 얘기를 꺼내시는지 모르겠다. 중학교 때 재미로 본 사주 보는 아주머니가 워낙 남자 보는 눈이 까다로워 시집 가긴 글러먹었다고 한 할을 아직까지도 염두에 두는 듯했다. 그래 봤자 오천 원짜리 싸구려 사주풀이였는데 말이다. 나는 시계를 본 후 급하게 움직였다. 준비하고 나가려면 시간이 빠듯했다. 당장 샤워부터 하고 머리카락에서는 물기가 뚝뚝 떨어지는 상태로 얼굴에 스킨을 발라댔다. 메이크업 도중에 자꾸만 마스카라가 번져 욕설이 튀어나오려는 걸 막느라 죽는 줄 알았다. 나는 옷장 안 '신경 쓰지 않은 듯 신경 쓴' 스타일을 찾기 위해 애썼다. 죽어도 권순영 만나러 가는 길에 이렇게까지 공들였단 티를 내고 싶지는 않았다. 무난하게 하얀색 맨투맨과 디스트로이드진을 입었다. 잔머리가 자꾸 붕 뜨길래 스냅백까지 썼는데 막상 거울을 보니까 평소와 다를 게 없었다. 다른 여자들은 어떻게 꾸미는 걸까. 이게 내 나름 최선의 꾸밈이었다. 쓸데없는 생각은 미뤄두고, 서둘러 집 밖으로 나와 지하철에 올라탔다. 권순영에게 어디쯤이냐고 연락을 하려다 말았다. 대신 이어폰을 꽂고 요즘 잘 나간다는 그룹 십칠의 노래를 들었다. 제목은 [이놈의 인기] 였다. 몇 마디 듣지 않아 기분이 상했다. 외로운 건 똑같은데 인기가 많다는 건 나랑 달랐다. 노래보다도 못한 인생이었다. 한 시간을 거쳐 먼저 도착한 나는 권순영에게 연락했다. 2번 출구에서 가만히 기다리고 있자니 현타가 왔지만 엄마와의 통화 내용을 상기시키다 보면 그런대로 넘어갈만 했다. 십 분을 기다렸을까, 멀리서부터 권순영으로 추정되는 사람이 보였다. 오는 길에 바람이 심하게 불었나 보다. 권순영은 머리가 잔뜩 헝클어진 상태였다. 본인도 신경 쓰였는지 머리카락 사이로 손가락을 넣어 대충 정돈하고는 내게 말을 걸었다. "금방 왔네요." "네, 지하철 배차 간격 맞춰 나왔거든요." 나는 가방을 고쳐 매고서 자연스레 에스컬레이터 쪽으로 올라섰다. 권순영이 내 옆에 섰다. 우리 사이에는 여전히 장벽이 남아있었다. 굳이 이 상태를 이어나갔다간 숨 막힐 것 같았다. 하지만 딱히 할 말도 없었다. 겨우 쥐어짜내 생각한 것을 시선을 마주하지 않은 채로 물었다. "아까까지 반말하시더니 이제는 존댓말 하시네요." 원래 그렇게 좆대로 하는 성격이신가요? 웃는 낯으로 속으로 욕하는 내 모습은 가식적이었다. 내 속사정도 모르고 권순영은 별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혼자 말 놔서 뭐 해요. 자꾸 안 놓잖아." 방금까지만 해도 웃던 나는 당황했다. "뜬금없이 놓기에는 무리가 있으니 그렇죠." 내 말에 역으로 권순영이 웃었다. 저 웃음은 비웃음일까 동조의 웃음일까. 뭐 아무래도 나와는 상관없었다. 나는 핸드폰으로 미리 검색해 온 음식점 사진을 권순영 앞으로 내밀었다. "여기 어때요? 냉채 족발 대박 맛있대요. 저번에 친구가 추천해 줬어요." 사진을 확대하며 보여 주자 권순영이 고개 돌려 나를 빤히 쳐다봤다. "첫 데이트부터 이건 좀 아니지 않나." "예?" 에스컬레이터는 달달 소리를 내며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었고 나는 권순영의 말을 들은 직후 고장난 기계마냥 삐걱였다. 뭐라 하셨어요. 민망하지도 않나 보다. 저런 낯 부끄러운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다니. 어쩌면 선수일지도 몰랐다. 왜 그런 거 있지 않은가. 텐미닛, 단 십 분만 대화 나눠도 빠져든다는. 약간 돈 조반니 같은 사람. 김민규와 이석민 덕에 나아졌던 남자 알레르기가 도졌다. 입 밖으로 꺼내는 말 대신 속으로 중얼대는 말이 늘어났다. 나는 분위기를 바꾸어 보겠다고 이상한 웃음 소리를 냈다. 씨발. 방금 약간 이석민스러웠다. 언제 또 이런 버릇까지 옮은 건지. 에스컬레이터에서 내려 자연스럽게 아무런 길로 빠져나와 걸으면서 말했다. "그런 건 사귀는 사람들이나 하는 거잖아요." 권순영이 코웃음을 쳤다. "사귀는 사람들만 데이트 하는 거 아닌데." 웃어? 나는 얼굴이 빨개진 채로 무작정 발걸음을 속도 냈다. 권순영이 주위를 두리번 살피다 말고 내 팔을 붙잡아 막 켜진 신호등 횡단보도를 건너기 시작했다. 주말이라 그런가 유난히 사람이 많았다. 부담스럽게 신경을 자극하는 권순영의 손에 정신 팔려 길을 걷는 내내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다 건너고 나서야 손을 놓을 수 있었다. 권순영은 전단지를 내게 내밀었다. 언제 받아서 챙긴 건지 모를 일이었다. 별것도 아닌 거에 순발력이 참 좋았다. 권순영이 다시 한번 내 팔을 잡아 붙들며 여유롭게 말했다. "파스타나 먹으러 가죠. 원래 그게 제일 무난하니까." 하필 무를 수도 없게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었다. * 암호닉 [문] [느림의 미학] [프리지아] [꽃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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