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생을 꾹)
설렌다? 설렌다. 기분 좋은 두근거림을 떠올리게 만드는 마법같은 단어는 물론 이 외에도 수만개, 아니 수천가지나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 종현의 마음을 표현할 단어는 '설렌다.' 이 단어 하나 뿐이었으니. 그 이유 또한 연인들의 두근거림이 온전히 남아있는 작은 카페 안의 달큰하게 퍼져있는 기류덕인 지도 몰랐다.
“오늘은 꼭 고백하고 말 거야.”
주먹을 불끈 쥐는 모습은 꽤나 다부진 사내의 모습이지만, 이내 푹 고개를 숙인 채 한숨을 내쉬고 만다. 고백이라면 하루에도 수십번, 카페에 갈 때마다 수백번, 진기가 생각날 때마다 수천번 마음을 먹었으나 막상 앞에 닥치면 말이 헛나오는 것이다. 좋아해요. 저랑 사귈래요? 그 쪽이 마음에 듭니다. 저 혹시 전화번호 좀. 아오, 이게 아니잖아! 속으로 읊어보는 멘트 또한 먹혀들리 만무했다. 누가 이런 구닥다리 같은 멘트에 넘어올까.
처음에는 두근거리는 마음의 기류가 차를 타면 울렁거리는 그런 것과 같은 종류일 것 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단정하게 앞치마를 매고 커피를 내리다가도 딸랑 하고 가게 문이 열리면 고개를 들어 저를 바라보고 환하게 웃으며 나머지 한 손을 들어 인사하는 진기의 모습을 보지 않는 날을 꼽는 게 더 쉬울 정도로 집을 나서면 제일 먼저 향하게 되는 행동을 인지한 그 순간부터, 아니 그 마음을 인정한 순간부터 종현의 마음 속 달콤한 기류는 물이 가득 든 풍선을 터뜨리듯 빠르게 퍼져나갔다.
후아, 후아. 해보는 거야. 아자! 김종현 화이팅.
사랑은 은하수 다방에서(for. 개돌 누나)
w. 후배
작은 카페. 어릴 적부터 그런 아기자기한 자신만의 가게를 꿈꾸던 진기를 꽤나 많이 닮은 모양새를 지닌 카페는 그 특유의 단정함과 분위기에 연인들의 주된 데이트 장소가 되곤 했다. 물론 그 모든 연인이 이곳에서 행복을 찾아 나간 것은 아니지만 좋지 않은 감정을 남기고 떠나가는 커플 또한 없었으니, 분위기라는 것은 사람 관계에서 퍽 많은 영향을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금방이라도 유리잔을 남자의 얼굴에 쏟아버릴 것처럼 부들부들 작은 몸에 화를 감당하지 못해 떨던 여자가 걱정스런 눈길을 보내는 진기의 얼굴을 한 번 보자마자 후우 하고 깊게 쉼호흡을 한 뒤 차분한 대화를 이어나갔다는 것은 아주 사소한 에피소드에 불과할만큼. 또한 그 커플이 결국 결혼에까지 골인했다는 것은 아주 사소한 일이었다.
연인들의 소소한 대화. 툴툴 거리는 귀여운 투정과 유쾌하게 웃어넘기는 썰렁한 유머까지. 방금 주문한 음료를 모두 마치고 뻐근한 어깨에 한 쪽 손을 얹고 휙휙 돌린 진기는 그런 달착지근한 분위기를 좋아했다. 그리 나이를 먹은 것도 아니건만 그런 투닥거림이 그저 귀엽게 느껴져 이렇게 시간이 남을 때면 계산대 옆에 둔 의자에 앉아 축 늘어져 그 모습을 가만가만 눈에 담곤 했다. 사실 그 안에 담긴 마음이야 대부분 부러움이라는 것이 차지하곤 하였으니, 그렇다고 심성 착한 진기의 눈에 그런 사랑스런 애정 행각이 밉보일리는 없었다. 나도 저럴 수 있을까? 미래의 연인을 떠올리며 기분 좋게 웃어버리는 것이 진기의 일상이었다.
딸랑.
“어서오세요.”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고 인사하는 진기의 눈에 비친 것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쭈뼛쭈뼛 들어서는 종현이다. 진기의 인사에 어색하게 손을 들어 웃어보이는 종현의 모습이 낯설지 않은 흔한 카페의 한 풍경이 된 것은 삼개월 정도 되었을 것이다. 매일 같은 시간에 가게에 들러 시간을 보내고 가는 종현이 처음에는 커피를 굉장히 좋아하는구나 했더랬다.
“핫초코. 맞죠?”
큼큼.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끄덕이다 이내 푹 숙이는 모습이 못내 귀엽기만하다. 종현은 쓴 것이라면 혀를 내두를 정도로 싫어한다. 본디 커피콩을 볶아 분쇄기에 갈아 원액을 내는 커피는 총 다섯가지 맛이 모두 난다고 알려져 있다. 단맛, 쓴맛, 신맛, 짠맛, 떫은 맛. 그러나 그것은 혀가 예민한 사람들의 이야기고, 종현은 그런 특별한 혀를 가진 사람이 아닌 그저 평범한 사람이었다. 아니, 특히 더 둔감한 혀를 가진 사람이라 부를 수도 있겠다.
첫날, 그러니까 종현이 이 카페에 첫 발을 내디뎠을 때. 올려다 봐야하는 메뉴판에 적힌 가지각색의 음료에 질려 앞 사람이 주문하면 그것과 같은 것으로 시킬 요량으로 슬쩍 계산대 옆으로 비켜서 있었더랬다. 그리하야 커피 전문점에서 가장 보편적인 아메리카노를 커다란 잔에 한가득 받은 종현은 한적한 구석 자리에 과제물을 펴고 겁도 없이 컵 귀퉁이에 입을 대고 홀짝인 순간 터져나온 소리는 ‘앗 뜨거워!’가 아닌 ‘앗 쓰다!’도 아닌 ‘으아아악!’하는 고함 소리였다. 마음 속으로야 뜨거워, 맛없어, 써! 하는 말들이 메아리 쳤겠지만 터져나온 건 그저 단말마의 비명일 뿐이었다. 물론 그 고함 소리에 놀란 토끼눈이 된 건 진기뿐만이 아니었으나, 폴짝폴짝 잽싸게 종현에게 달려와 이미 젖어버린 과제물을 구해 준 것은 다른 그 어떤 누구도 아닌 진기요, 마른 수건으로 종현의 옷에 남겨진 커피자국을 싹싹 닦아준 것 또한 진기였다.
이미 커피색으로 젖어 방향제마냥 진한 커피 냄새를 풍기는 과제물과, 지워지지 않는 커피의 데미지에 결국 그날 이후 입을 수 없게 되어버린 셔츠보다 제 일이라도 되는 양 어쩌지, 어쩌지 걱정해주는 진기가 해프닝과 함께 종현의 마음 속에 콕 들어와 박힌 것이다.
그러한 이유로 종현은 집보다 자주 카페를 찾았고, 또한 호감을 넘어서 잔에 담겨 금방이라도 쏟아질듯 찰랑 거리는 제 마음을 표현하지 못해 끙끙 앓고 있는 중이다. 그러한 연유로 당신을 좋아하게 됐어요. 하기엔 종현의 간 사이즈는 보통 사람들 것과 같은 사이즈였다. 평소 잘 까불고 선배들에게도 애교만점인 종현이지만 오히려 이런 면에서 소심한 부분이 있었다. 그런 대담한 고백을 할 정도는 아니란 말이야. 그저 컵을 데워 핫초코를 평소보다 달게 타는 진기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다 보는 종현의 얼굴을 보아하니, 오늘도 고백은 마음속에서 종이 접기에 실패한 색종이처럼 구겨져 버려진 것이 분명했다.
“오빠, 틀렸잖아. 이게 아니지. 아니지. 우리는 오늘 조오기 갈 건데!”
“아유. 무슨 여자애가 그런 걸 일일이 다 따지냐.”
“그래서 뭐 불만이야?”
“아니.”
“그럼?”
더 반할 것 같다고. 실 없는 소리에도 꺄르륵 웃음 소리가 넘치는 연인이 지금 제 뒷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카페의 작은 규모상 커플들은 거의 공개연애를 하는 것이나 다름 없다. 한참 달그락 거리던 진기가 멍하게 제 뒤에 있는 커플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종현을 보더니 베시시 장난스런 웃음을 지어보인다. 요거, 요거. 얼이 빠졌네? 일부러 탁 소리를 내며 내려놓은 하얀 잔에도 반응이 없는 것을 보니 아주 정신이 팔렸구나 싶어 장난이라도 한 번 걸어 볼 요량으로 “종현씨.”하고 이미 제 쪽을 향하고 있는 귓가에 속삭이듯 이름을 부른다.
“네.. 에?”
제가 여자였으면 오히려 그 고백이란 것이 참 쉽게 진행 되었을 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고민은 고민을 낳고 그 고민은 한숨과 함께 제 자신을 한심하게 만들곤 한다. 다시 한 번 크게 한숨을 내쉰 종현이 그 와중에 불려진 제 이름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자 코와 코가 맞닿을 정도로 가까운 진기의 얼굴과 제 볼에 콕 찔린 통통한 손가락 하나.
“오늘은 소리 안 지르네?”
“그, 그 때 그건요!”
분명 제 옷을 닦아주던 손이 분명하다. 늘씬한 몸과 대조되게 통통한 손가락은 분명 남들보다 단 걸 좋아하는 종현의 잔을 더 달게 만들어주던 바로 그 손이 분명하다! 진기가 제 잔을 달그락 거리는 모습을 세달이 되도록 보았으니 자신이 그걸 기억하지 못할리 없었다. 그러나 막상 친근하게 이런 장난을 걸어오니 다시 말이 꼬이는 종현이다. 그게 아닌데. 그 때 그건 진짜 실순데. 한 가지 예를 들어보자면, 강아지를 키워 본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아무리 단호한 주인이라도 강아지가 끼잉끼잉 애처로운 소리를 내고 꼬리를 늘어뜨리면 그 어떠한 것이라도 들어주고 싶은 마음. 바로 그 모습이 종현의 모습뒤에 살풋 비친다면 이해가 될까? 에이, 장난 실패. 슬쩍 종현 뒤 쪽에 자리한 커플에 눈길을 준 진기가 이번엔 화제를 바꿔 말을 건넨다. 저기요, 종현씨.
“종현씨도 애인 있어요?”
살짝 곤란한 표정을 지어보이면서도 입을 꾹 다문채 고개짓조차 않는 종현의 모습을 본 진기가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잇는다. 종현씨는 잘 생겼으니까 분명 있을 거야. 단 걸 이렇게 좋아하니까, 여자친구도 달콤하게 생겼을 것 같아요. 왜, 그 만지면 말랑말랑 할 것 같고 그런 거 있잖아. 어? 이런 말 한다고 나 나쁜 사람 아니에요. 알죠, 종현씨? 한 동안은 바빠서 자주 말을 걸지 못 했는데, 오늘처럼 한가한 날은 볕 잘 드는 창가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처럼 진기도 이야기 상대가 절실했다. 날씨가 좋다고 가게를 비우고 달랑달랑 친구를 만나러 다닌다면 가게는 누가 볼 것이며 가게세는 어떻게 감당할 지 막막했으니까. 현실적인 문제도 있었다. 그런 점에서 종현은 진기에게 좋은 대화상대임에 분명했다. 자신의 말을 진지하게 들어줄뿐더러 가끔이지만 종현이 귀엽다는 생각이 들게 할 정도로 종현은 꽤나 매력있는 말상대였다. 정말 애인이 있는 걸까? 사실 말을 뱉고 보니 조금 씁쓸한 뒷끝이 남는다.
“나는요. 종현씨. 이 카페가 너무너무 좋아요.”
그래서 나중에 이 카페랑 같이 늙어가면서 그렇게 지낼 거에요. 눈꼬리를 달착 접어 예쁘게 웃어보이는 진기의 모습에 가슴이 이렇게나 쿵쿵 빠르게 뛰는데 종현의 입은 떨어질 생각을 않는다. 좋아해요. 이 네 글자 입을 떼는 것이 이리 어려운 일인 줄 어찌 알았을까. 좋, 아, 해, 요. 입모양을 벙긋거려 보아도 소리가 되어 흘러나오진 않는다. 꼭 자신이 벙어리가 된 것만 같았다.
“그런데 그런 걸 좋아해 줄 사람이 있을까 모르겠어요. 종현씨가 생각하기에도 좀 노인네 같죠? 그래도 난 그랬으면 좋겠어요.”
저요, 저요! 전 그럴 수 있어요! 속으로 그렇게 외친 종현이 하얀잔에 담긴 핫초코에 입을 댄다. 달다. 첫맛은 달달하고 끝맛은 조금은 씁쓸한 것이 입 안 가득 퍼져나간다. 좋아해요. 정말로 좋아해요. 종현은 컵을 든 것을 후회하면서도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턱 밑까지 차오른 그 말이 나올 수도 있을 것 같았는데 덜컥 겁을 먹어버린 탓이었다. 내가 별로면 어떡해. 날 싫어하면 어떡해. 내 고백 거절하면 어떡해. 빠르게 뜀박질하며 뛰는 심박수는 한계치를 초과해 아릿한 아픔마저 묻어나온다.
결국 오늘도 마음 전하기에 실패한 종현이 가방을 챙겨 일어선다. 내일 봐요. 손을 흔들며 웃는 진기의 모습은 제 심장을 쿵쿵 뛰게 만드는데, 정작 장본인은 제게 단골손님 그 이상으로는 비치지 않는 것이 분명했고 사실 그것이 옳은 것임에 분명했다. 얼굴 좀 자주 본다고 같은 사내에게 그런 감정을 가진다는 것 또한 현실적으로 생각하면 징그럽고 소름이 돋았다. 물론 그것이 진기라면 끌어안고 진하게 입맞춤까지도 할 수 있겠지만. 그럴 리가 없지. 괜한 기대 걸어봤자 결국 상처 받고, 실망하는 건 자신이라는 걸 진즉에 깨달은 후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어 잔상을 깨끗하게 털어버린 종현은 전화기를 꺼내 기범에게 전화를 건다. 오리무중 스스로 갈피를 못 잡는 종현에겐 조언이 필요했다. 아주 따끔하면서도 단호하게 제 마음의 방향을 잡아 줄 그런 사람의 조언이.
한편 종현이 가게를 나선 뒤 얼마 안가 종현의 뒤쪽으로 자리하고 있던 커플도 사이좋게 손을 잡고 가게를 나섰다. “다음에 또 들러주세요.” 하는 진기의 인사에 “네~. 다음에 꼭 다시 올게요.”하고 유쾌한 답변까지 남기고서. 잔잔한 음악과 어우러진 재잘 거리던 소리가 딸랑 하는 문소리와 함께 사라지고나니 텅 비어버린 가게가 넓게만 보였다. 분명 테이블도 몇 개 되지 않는 아주 아담한 곳임에 분명한데. 진기는 가끔 이렇게 텅 빈 가게를 지키는 일이 종종 있었다. 처음에는 그 갭에 적응을 못하고 우왕자왕 뭘 해야하지? 너무 조용한가? 테이블을 닦아야 하나? 하고 혼잣말을 하며 그 갭을 채우려 노력하던 때도 있었지만 지금은 그 여유로운 시간을 즐기고, 또 가끔 반기기까지 한다. 오늘은 깨끗한 것 같은데 청소를 하루 쉴까? 아니야. 벌써부터 그런 나태한 사장님이 될 순 없지. 배가 불룩 튀어나온 아저씨도 그런대로 인자한 느낌은 있지만, 역시 안 좋은 이미지가 더 강하니까! 마음 먹은 일은 모두 해치우고서야 한 시름 놓는 진기는 곧바로 물에 적신 행주를 챙겨들고 테이블을 치운 뒤 그 위를 반질반질 윤이나게 닦는다. 반짝 반짝 테이블 아름답게 빛나네. 제멋대로 개사한 동요를 흥얼거리며 종현이 앉아있던 자리까지 온 진기의 발에 무언가 툭하고 걸린다. 어?
“뭐지?”
곱게 접힌 종이는 연한 하늘색의 편지지처럼 보였다. 편진가? 왜 여기 이런 게 있지. 펼쳐봐도 될까? 너무 궁금한데. 근데, 주인이 애타게 찾고 있을 지도 모르잖아. 그렇지만 이렇게 떨어뜨리고 다니는 걸 보니 그다지 중요한 편지는 아닐지도 몰라. 어쩌면 쓰레기일지도 모르지. 그런 모든 걱정을 슬쩍 옆으로 치워버릴 정도로 진기는 호기심이 많았다. 이게 뭔지 모르면 오늘 밤엔 잠을 못 잘 거야. 하는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 차올라 걱정반 호기심반으로 주워든 편지는 이미 제 속을 공개한 후였다. 접힌 자국이 앞 뒤로 볼록하게 튀어나와 있을 정도로 이 편지에는 수 없이 고민한 흔적이 고스란히 담긴 것 같았다. 어디보자. 좋아해요. 좋아합니다. 좋아하는데. 정말로 좋아해요. 진짜 좋아하는 것 같은데. 내용은 첫줄부터 끝까지 이게 다였다. 처음 첫줄은 손에 힘을 주어 반듯하게 쓰인 글자체. 그리고 끝으로 갈수록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엉망이 되어갔다. 수신인이 누군지, 발신인이 누군지조차 적혀있지 않은 편지라기엔 많이 부족해보이는 모양새에 진기가 다시 곱게 편지를 접었다. 그리고 펜을 가져와 그 위에 볼펜을 살살 눌러 작은 글귀를 남겼다.
Dreams come true.
*
“야, 김종현. 이게 미칬나. 그만 마셔, 야. 야.”
기범은 종현의 부름에 쏜살같이 달려나온 가슴 깊이 후회하고 있는 중이다. 그깟 술 사준다는 말에 유쾌한 상대와의 대화를 기대한 제 잘못이 컸다. 아. 진짜 내가 몬산다. 물론, 사실 핸드폰을 타고 흘러온 종현의 목소리가 평소와 달리 힘이 없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음에도 이런 사태가 벌어질까봐 나왔다는 기범의 변명은 그럴듯 했다. 확실히 종현은 평소와 달랐다. 반짝반짝 빛이나던 눈동자는 맹한 동태눈과도 같았으며 자신을 보자마자 ‘기범아..’하고 말꼬리를 늘이는 것 또한 평소와는 전혀 다른 것이라 사실 적응이 안 됐다. 평소 자신의 주량을 아는 종현은 딱 알딸딸하게 기분좋게 취기가 오를 정도로만 술을 마셨다. 남에게 폐가 되면 안 되니까. 매너남의 기본 아니냐며 호탕하게 웃어보이던 종현은 지금 이 자리에 없는 듯 했다. 이미 기범이 도착했을 때 종현의 테이블에는 소주 두 병이 빈병인 채 기범을 반겼으니 말이다.
“기범아. 나 어떡하지? 그 사람이 너무너무 좋은데. 지인짜 너무 좋은데.”
“응, 그래. 그래. 좋은데, 그 사람 앞에만 서면 입이 안 떨어지고.”
“어? 어떻게 알았어? 역시 우리 기버미는 내 마음을 너어무 잘 알아..”
벌써 몇 번이나 반복된 종현의 술주정에 이제는 그냥 대충대충 대꾸만 해주는 기범이다. 처음에는 진지하게 들어주려 했으나 들으면 들을 수록 종현이 한심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좋아하면 고백을 해야지. 너 혼자 좋아하는데 말도 안 하고, 근데 그걸 그 사람한테 알아달라는 건 너무 억지잖아. 이 새끼야. 바보 새끼. 이미 정신을 못 차리는 종현의 머리통을 한 대 갈긴 기범은 종현을 집에 데려다 줄 채비를 한다. 혼자서 소주를 몇 병이나 마신 거야. 미련퉁이. 제가 해결해 줄 수 있는 문제가 아닌지라 끙끙 거리며 마음 아파하는 제 친구가 조금 가엽기도 했으나 결국 종현이 아닌 제 주머니에서 나가는 만원짜리 세장을 보고나서 종현의 머리통을 한 대 더 갈기는 기범이다.
“기버마.. 나 마음이 너무 아파. 내 마음을 좀 알아주면 좋겠어. 응?”
“그럼 가서 말하면 되는 거잖아. 저기요, 당신을 좋아해요! 하고 남자답게.”
“싫다고 하면 어떡해. 나 싫다고 멀리멀리 도망가 버리면 어떡해. 나랑 눈도 마주치기 싫어하면 어떡해? 그렇다면 더 힘들거야, 기버마.. 게이새끼라고 더럽다고, 싫다고 거부하면 나 더 힘들거야.”
“아, 씨. 너 진짜 사내새끼 맞아? 김종현 일단 부딧쳐 보는 거야. 그까짓거 해봐야 결과가 나올 거 아냐! 아우, 진짜.. 내가 이래가 몬산.. 야, 근데 뭐라고? 게이새..”
“맞아! 일단 부딧쳐 볼래. 진기씨한테 고백할 거야. 나 나 고백한다!”
기범의 부축 없이는 제대로 걷지도 못하던 종현이 번뜩 눈을 뜨고 앞으로 우다다 달려갔다. 진기씨를 만나야 돼. 내 마음을 전해야 돼. 나 고백 할 거야! 좋아한다고 말 할 거야! 종현의 머리속은 온통 좋아해로 가득 차있었다.
*
저녁 시간대에 갑작스레 밀려든 주문에 평소보다 늦은 시간에 카페 도어를 닫는 진기의 모습에선 약간의 피곤함이 엿보이지만 어서 집에가서 쉬어야지 하는 기대감이 피곤함을 넘어서 여전히 샐샐 웃는 얼굴이다. 이러니 어느 누가 진기의 카페에서 단골이 되지 않으랴. 어깨를 통통 두드리며 테라스겸 계단을 내려가던 진기의 눈에 들어온 것은 헉, 헉 숨을 몰아쉬며 겨울철 땀까지 뻘뻘 흘리며 무릎을 짚고 아슬아슬하게 서있는 인영이었다. 희미하게 들리는 목소리는 분명 제 이름을 부르고 있는 것 같은데.
“이진기. 하아. 진기씨. 이진기..”
단숨에 진기의 앞으로 확 가다온 인영에 채 놀라기도 전에 진기의 허리에 팔을 두른 뒤 진기의 어깨에 고개를 푹 파묻는다. 목소리가 어딘지 익숙한데. 상대방이 자신을 꼭 껴안을 때 확 끼치는 체향이 옅을 정도로 술냄새가 강했다.
“종현씨?”
으. 얼마나 마신 거에요. 거기다 이건 또 뭐고. 한편 종현은 제 품에 꼬옥 붙들려 있는 진기가 자신이 만들어낸 환각따위가 아닌 진짜라는 것을 알자마자 울컥 눈물이 차올라 끄윽, 끄윽 진기의 점퍼를 말간 액체로 물들이고 있었다. 종현씨, 울어요? 안긴 것도, 안은 것도 아닌 어정쩡한 포즈로 서있던 진기가 손을 올려 종현의 등허리를 꼬옥 감싸 안아 어깨를 토닥토닥 두드려 준다. 아까까진 훅 끼치는 술냄새에 거부감이 들었는데, 그 존재가 종현이라는 것을 알자마자 어째서인지 감싸안아주고 싶다는 생각이 먼저 들더랬다. 무슨 이유에선 지는 몰라도 종현이 지금 굉장히 심란한 상황이라는 것은 알 것 같았기에. 무슨 이윤지는 몰라도 울지 말아요.
“종현씨 이러고 있으니까 꼭 애기 같네. 훌쩍훌쩍. 그렇게 많이 울면 못난이 되는데.”
농담식으로 말을 던졌으나 사실 어떤 이유던 간에 종현이 우는 모습을 보니 진기의 마음도 어딘가 어긋나 삐걱거리는 것만 같았다. 불쌍하다 라는 감정과는 조금 거리가 멀고, 안쓰럽다 하고 생각해 버리기엔 그것 또한 맞지 않는 표현 같았다. 종현씨. 종현씨가 우니까, 꼭 마음에 뜨거운 물을 끼얹은 것 같아요.
“이진기.”
한참을 훌쩍 거리며 말을 잇지 못하던 종현이 연달아 진기의 이름을 부른다. 진기야아. 이진기. 진기씨. 호칭은 다양했으나 그 중 멀쩡한 발음은 열 번 중에 한 번일만큼 발음이 부정확했다. 우리 종현씨 정말로 애기가 되버린 것 같네. 술에 취해 꼬인 발음으로 내뱉는 진기의 이름은 평소 종현의 수줍던 모습과는 퍽 거리가 있었으나 그게 그렇게 기분 나쁜 것은 아니었다. 끊임없이 아련하게 제 이름을 부르는 종현에게 진기가 해줄 수 있는 건 곁에 있다고 등을 토닥여주는 것 뿐이었다. 어디 안 가요. 여기 있어요.
좋아해요. 스치듯 흘러간 종현의 말에 “네?”하고 저도 모르게 반문했다. 제 이름만 연신 부르던 종현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고 생각하기엔 뜬금없었고, 또 발음조차 정확하지 않아서 제가 잘못들은 것이리라 생각하는 진기였다.
“좋아해요. 진짜. 내가 너무너무너무 좋아하는데. 왜 내 맘을 몰라줘.. 응?”
나 여기가 너무 아파요. 이진기씨만 보면 여기가 쿵쿵 빠르게 뛰어서 아프고, 아린데 막 또 기분은 좋고 그래요. 그래서, 매일 매일 진기씨 보려고 카페 가고. 또 매일 매일 말 하려고 하는데 입이 안 떨어지는 거야. 그래서 포기하려고도 했는데. 아무리 그래도 너무 좋은데요. 좋아해요. 흐느낌으로 변해버린 종현의 고백에 적잖이 당황한 진기지만 제게 매달려 어깨에 고개를 묻고 “왜 몰라줘요. 왜.” 하는 종현의 투정에 가슴 한 구석이 아릿하다. 제가 잘못 들은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쉴새없이 쏟아내는 종현의 고백은 끝날 줄을 몰랐다. 보통 이런 고백을 받으면 기분이 나빠야 하나? 이상하다 싶을 정도로 진기는 종현의 그런 고백에 담담했다. 아니, 실제로 담담한 건 겉모습뿐이었지만. 속으로는 퍽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일렁이는 마음의 파도에 비하면 그 충격은 백만년전 바다속 깊이 가라앉은 보물과도 같은 것이었기에 있는 지 없는 지도 모르게 조용히 가라 앉았다. 종현의 고백이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이걸 좋다고 표현하기에 혼란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분명 가슴이 일렁이는 것이 느껴진다. 종현이 우는 모습에는 가슴이 아팠다. 펄펄 끓는 물이 제 심장에 확 끼얹어진 것처럼 뜨겁고 아릿했다.
“종현씨. 내가 좋아요?”
“좋아한다고.. 정말로 좋아해요. 장난 아니에요. 나 이런 걸로 장난 칠 사람 아니란 말이야. 진기씨는 몰라요. 내 마음 하나도 몰라줘. 근데 그건 당연한 거잖아요. 내가 말을 안 했는 걸. 저절로 알았으면 했어요. 바보 김종현.. 바보, 바보.”
바보 소리에 임팩트를 준 종현이 이내 다시 엉엉 눈물을 쏟아내고 만다. 내가아, 진기씨를 얼마만큼 좋아하냐면요. 엉엉. 전하지도 못할 마음 종이에라도 다 써보자 하고서 편지지를 샀어요. 흐어엉. 근데 그거 하나 못 전해줬어. 사실 그 안에 담긴 말은 좋아해 한마디 밖에 없어요. 근데 그게 내 마음이란 말야. 그것말곤 표현할 다른 말이 없어요. 아이 라이크 유? 아니에요. 아이 러브 유란 말야. 흐윽, 흐윽. 한마디 한마디 울음이 섞여 제대로 된 의미를 전달하지는 못했지만 진기는 다시 가만가만 종현의 어깨를 토닥인다. 아까 종현의 자리에서 주운 편지는 분명 종현이 말하고 있는 의미불명의 말 속에 섞여 들리는 그것이 분명했다. 좋아해. 좋아합니다. 하는 짤막한 글이 적혀있던 옅은 하늘색의 편지지. 그 편지를 떠올리자마자 종현의 떨림이 진기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져 오는 것 같았다. 콩닥콩닥. 아니 그것보다 다 좋은 표현이 없을까? 두근두근? 아니. 조금 더 강렬한 표현이 필요했다. 아마도, 아니 분명히 종현의 심장박동수와 제 심장박동수는 같은 빠르기로. 그것도 꽤나 빠르게 뛰고 있었다.
“종현씨. 나는 이 카페가 너무 좋아요.”
그리고 이내 종현과 같은 모양새로 종현을 꼬옥 껴안는다. 그런데 말예요.
“종현씨랑 함께라면 더 좋아질 것 같아요.”
잠시 울음을 멈추었던 종현이 다시 엉엉 눈물을 터뜨린 것은 진기가 살며시 뒷말을 얹었을 때였다.
카페가 아니라 종현씨가요.
| ps. |
으어어엄ㄹ햐먿갸덜봳ㅈㄱㅎ미펌 이게 뭐지 ㅠㅠ 묵힌 듯한 이 팬픽의 퀄리티는?! 종현이 왜 자꾸 질질짜? 불만을 가질 수 있지만 전 우는 종현이가 참 예뻐요
개돌누나.. 사실 누나가 원한 건 현유탬의 투닥투닥이지만 제가 듣고 있던 노래가 은하수 다방이었다는 게 함정 이래놓고 리퀘 완수!! 하고 도망가버리지는 않을게요 현유탬의 투닥투닥도 언젠가 쓰고 말겠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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