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짜증나고 졸립기만 했던 등굣길은 오늘따라 좋았다.
요즘은 알바때문에 바빠서 김태형 얼굴도 많이 못 보다 보니 이렇게 마음 놓고 얘기할 수 있는 시간이 적었다.
태형이 학교를 다닐땐 늘 이렇게 같이 갔었다.
자퇴를 하고 나서는 같이 안다니긴 했지만 여유가 있는 날은 이렇게 학교까지 같이 걸어간다.
교문 앞에서 헤어지긴 하지만.
" 아 그래서 할머니는 잘 계시대?"
"응. 잘 계셔. 너 언제 오냐고 계속 물어보시더라."
"아아 할머니 보고싶다. 안본지 너무 오래됬어... 가서 같이 김태형 뒷담까야 되는데ㅋㅋㅋ"
"뭐, 임마?"
김태형이 장난스레 눈을 흘겼다.
"ㅋㅋㅋㅋ농담이야 바보야. 너희 할머니가 해주신 떡볶이 먹고싶다."
"헤 나도. 다음에 꼭 와."
"다음 언제? 너 맨날 그렇게 말해놓고 바빠서 안불렀잖아."
".....'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쳐다보자 김태형은 멋쩍게 웃으며 눈을 피했다.
대답대신 김태형은 어느새 도착한 우리 학교의 텅 빈 운동장을 잠시 응시했다.
그리곤 내 머리를 헝클고 간다라는 짧은 말과 함께 살짝 웃고는 길을 되돌아갔다.
아 또 말 안해주고 갔어. 저 자식.
그래도 따질 순 없었다. 태형이가 얼마나 바쁜지 알고 있기 때문에.
멀어져가는 김태형에게 조심히가! 라고 소리쳐 주었다. 들린건지 아닌건지 다시 뒤를 돌아 크게 손을 흔들고는 사라진다.
Primrose 2
w. 슙크림
앵초(Primula sieboldii, Primrose): 젊은 시절과 고뇌, 돌보지 않은 아름다움, 젊은날의 슬픔, 첫사랑, 소녀 시절의 희망
석진은 이사장실에서 왔다갔다거리며 초조하게 핸드폰만 쳐다보았다.
전무님 무슨 걱정거리라도 있으십니까, 아니요 괜찮아요 신경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괜찮다고 말하는 그의 얼굴엔 알 수 없는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몇분 째 폰을 껐다 켰다 해도 원하는 연락은 안오고,
읽지않은 지루한 비즈니스적 안부 메세지만 잔뜩 쌓여있었다.
'진짜 안오는 거냐 민윤기..'
창문 앞에서 핸드폰을 붙잡고 안절부절못하는 석진의 뒤엔
소파에 앉아 세상 편한 자세로 뽕뿅대며 폰을 두들기는 정국이 있었다.
처음엔 형이 뭘하든 신경도 안쓰는 모습이었으나
계속되는 움직임이 신경쓰였는지 보다못해 짜증을 냈다.
겉은 정장 멀끔하게 차려입은 부잣집 도련님이지만 영락없는 예민한 사춘기 소년일 뿐이다.
"아 형 좀 가만히 있을 수 없어요? 왔다갔다 뭐하는거에요. 게임 집중을 못하겠다고요."
그렇게 귀찮다는듯 인상과 함께 쏘아붙히고는 다시 모바일 게임 속으로 빠져드는 시크한 막내 도련님이었다.
*
지금 없는거 맞지? 이때가 기회다! 빨리 나가야...ㅈ...
"이탄소 너 오늘 잠깐 시간 있냐?"
아.....시발........걸렸다.
"어.. 있긴 있는데?"
종례가 끝난 후 친구가 나가려는 나를 붙잡고 부리나케 물어본다.
"아 잘됐다! 나랑 같이 기념식 보러가자. 강당에서 하고 있다는데,
그 그룹 자제들 벌써 왔나봐! 밖에 기자들 완전 많던데."
Aㅏ...
쒯...
역시 하늘이 도와주지 않는 나년.... 오늘 야자 없어서 집가서 오랜만에 맘편히 덕질하려고 했는데....^ㅁT
나는 그 그룹 왕자님들인가 도련님들인가 뭔가 1도 관심 없다고옹오ㅗㅅ!!!! 1도 안궁금하다공오오ㅗㅗㅇㅎㅎ!!!!!!!!!!
시발!!!!!!!!!!!!!!!!!!!!!!!!!!!!!!!!!!!!!!!!!!!!!!!
이라고 소리치고 싶었으나
대답도 안했는데 어느새 나는 강당으로 질질 끌려가고 있었다.
강당엔 엄청난 수의 기자들이 자리를 꿰차고 있었다. 소식을 듣고 올라온 학생들도 많았다.
다 그 도련님들을 보러 온거겠지.
유명한 그룹 후계자들의 얼굴 최초 공개이니 그럴만도 했다.
우리는 쭈구리처럼 남은 자리를 찾았으나 없는 걸 확인하곤 옆 쪽 벽에 붙어 힘들게 자리를 잡았다.
몇분 뒤 기념식이 시작되고 사장의 뒤로 자제들이 드디어 얼굴을 드러냈다.
플레시 세례와 카메라가 찍히는 소리, 여학생들이 소리 지르는 소리가 들려온다.
워매 레드카펫인줄;
멜뮤 시상식인줄 알았다.
웅성대며 앞쪽으로 점점 몰려드는 사람들 때문에 시야가 점점 차단되고 있다.
열심히 까치발하기도 하고 뛰어보기도 하지만 턱도 없다.
아니 뭔가 형체가 보긴 하는데 얼굴이 안보인다고!!!!!
인터뷰를
시바....... 나년 왜 키는 난쟁이 똥자루 만할까.....^ㅁT 우럭...
힘들게 뛰어도 안보이는 시야에 슬슬 빡이 올랐다.
나년 이럴려고 우유먹었나. 자괴감들고 괴로워..
오기가 생긴 나는 방법을 생각해 내다 마지막 방법인 뚫기를 선택했다.
스탠딩으로 다져진 몸뚱아리..아무도 못 막을지어다..
그렇게 심호흡을 하고 타이밍 좋게 사람들 틈새를 비집고...
들어갔다..!
헐
성공했다
그리고 마주했다.................
내 앞의 남신들을.........................................
미친 저긴 무슨 얼굴도 그사세네...
왜 애들이 환장하는지 알 것 같았다.
나도 그 흔하디 흔한 잘생긴 남자에 열광하는 소녀였을 뿐이고......
저 마이크를 잡고 뭐라뭐라 말하는 남자가 첫째 같다. 진짜 딱 정석으로 잘생긴 얼굴. 이야 저 친구 이야~
몸매는 진짜 딱 역삼각형이다.
정장을 입으니 더 도드라지는
어깨!!!!!!!!!!!!!!!! 뭬친 겁나 잘생겼다. 얼굴도 브이라인에...
목소리도 조곤조곤 다정열매 몇억개 먹으신거 같고....... 입술은 체리 같....응?
(이하생략)
그리고 그옆은...
!!!!!!!!!!!!!!!!!!!!!!
쉬바 여기도 잘생김...;
아니 세상 ㄹㅇ 불공평하다 진짜...
돈도 많은데 얼굴까지 잘생겼어....벤츠... 그사세...
어라? 근데...얘는 좀 어린티가 난다. 아까 옆 남자는 어른 남자 아우라 존나 뿜뿜! 이었다면
여긴 뭔가 우리 또래 같기도 하고. 정장을 입었지만 얼굴은 아카아카 한것이.... 나이가 궁금하구먼...자네..허허
하지만 몸은 절대 아카아카하지 않았다. 이야 여기도 대박이로구나.. 덩실덩실
당장 저 둘을 끌어내려 우리 집으로 끌고가 전시해두고 싶었다. 매일 아침에 일어나 보면 매우 힐링 될거야, 암.
하지만 저기 올라가는 순간 난 철컹철컹 하게 되겠지....쿸....
역시 나는 잘생긴 것에 환장하는 어쩔수 없는 사춘기 소녀인가 보다.
어느새 다른 여자애들과 한마음으로 소리를 지르며 사진을 찍고 있었으니.
그런데, 어느새 나는 점점 정줄을 놓고 있었다.
친구가 걱정스러운 눈길로 나를 흘끗 쳐다보는 눈길도 모른채.
난 결국 일을 저질렀다...
기자들이 보는 앞에서 대그룹 자제들이 보는 앞에서 우리학교 학생들, 교장, 교감, 이사장과 선생님들이 보는 앞에서.....
"오빠!악!!!!!!!!!!!!!!!!!!여기좀 봐줘여!!!!!!!!!!!!!여기좀 잘생겼다아아아아아ㅏㅏㅏㄱ"
?????????????
정적.
우주의 모든 시간이 멈췄다.
나년.....
무슨짓을 한것이냐.....??? 지금?????????
순간 모든 것이 나를 주목했다.
안 보이는 먼지도 미생물도 귀신, 영혼들도 나를 내 몸이 뚫어져라 쳐다보는 것 같은 기분 뭔지 아는가 자네?
소오름.
눈이 마주쳤다.
그 둘과.
한쪽은 매우 당황한듯하고 한쪽은....음..
비웃음???
화악-얼굴이 터질것 같음을 느꼈다.
재빨리 모든것을 뿌리치고 강당을 빠져나왔다.
어머니 아버지 안녕히 계세요 뒤지러 갑니다. 소녀를 용서해주소서.
제발. 시발. 제발. 시발.
시발!!!!!!!!!!!!!!!!!!!!!!!!!!!!!!!!!!!!!
당장 학교를 빠져나가야 돼. 이 생각 밖에 없었다. 1층까지 숨도 안쉬고 내려왔다.
아직도 심장이 뛴다. 내가 드디어 미쳤나 보다. 고3되더니. 또라이년아 진짜...
덕질 제대로 못했더니 한맺혔냐??????
아마 나는 내일 온갖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존나 못생기게 무개념년으로 찍혀서 나가게 될거야
시발... 마ㅠㅠㅠㅠㅠㅠㅠ 뉴스에도 나가게 될거야ㅠㅠㅠㅠㅠ
어머니ㅠㅠㅠㅠ 용서하세요ㅠㅠㅠㅠㅠㅠ
온갖 수치스러운 망상을 하며 내 머리 끄덩이를 잡아뜯으며 괴로워 하며 어떻게 조용히 죽을지 생각하고 있던 찰나,
누군가 내 앞을 가로막는다.
"안녕, 또 본다 우리?"
또
익숙한 목소리.
고개를 드니
미친 하필 여기서 만나는 거냐 왜.
옆집 아저씨. 그 남자다.
...분명 안녕이라고 인사했지만 '아니! 여기서 너를 또 보니 정말 기분이 개같은걸? 하하 내앞에서 빨리 꺼져. 하하'
라고 말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특유의 냉정한, 술취한 것 같은 말투와 함께.
아 예 또 보는군요 어쩌라고요. 전 지금 존나 멘붕이라 인사 받아줄 힘도 없습니다. 아재^ㅁ^.
라고 내 마음이 있는 힘껏 소리치고 있었다.
하지만 최소 지금은 그런 말 못하는 쭈구리였으므로 그냥 조용히 집에 가고 싶었다.
".....안녕하세요...제가 지금 너무 피곤해서. 먼저 가볼게요. 저희 학교엔 웬일이신지... 하핳"
슬슬 말끝을 흐리며 조심조심 지나가려는데..?
팔목이 잡혔다.
쒯.
"어디가, 고딩. 여기 학교 뻔히 다니면서 나한테 다른 곳 알려주고 통쾌해한 죗값은 치르고 가야지?"
능글 맞은 웃음기 있는 말투가 내뒤에서 들려온다.
온 몸에 소름이 돋는다.
아....미친... 왜 하필 오늘일까..
하느님...왜 저를 맘대로 못 죽게 만드시옵니까...
"아.... 아 잠깐만요. 오늘은 좀.. 다음에! 다음에 제가 뭐라도 꼭! 사드릴게요! 죄송했어요, 그땐."
꼭을 엄청 강조했다. 눈을 최대한으로 치켜뜨며 내가 하는 말이 진실되어 보이게 애썼다.
내가 쭈글대며 말하자 남자가 피식 웃고는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물어본다.
"다음 언제? 뭐 사줄건데?"
아니? 언젠가 사준다고! 뭐이래 말이 많담. 이 아저씨 유치한 구석이 있네.
나 약속한 건 지키는 사람입니다만! 자네! 우물쭈물 대다 아무말이나 뱉엇다.
"어..어.... 떡볶이?? "
"그럼 지금 갈래. 가자."
"? 예??"
"맛있는데 좀 데려가봐"
생각을 정리할 겨를도 없이 끌려간다. 난 분명 다음에 사준다고 했는데..^^
어머니 그럼 소녀는 강제(?) 마지막 만찬을 하러 다녀오겠습니다.
예쁜 예감이 들었다
우리는 언제나 손을 잡고 있게 될 것이다.
< 인연 > -이이채
**
오랜만에 오네요. 빨리 온다는 말은 못드릴 것 같지만 길게 봐요.
♥♥암호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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