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집에 들어왔더니 분필가루처럼 텁텁한 공기가 집을 에워싸고 있었다. 베란다에서 들어오는 옅은 노란 햇빛은 거실 바닥을 내리쬐고 있었고, 바닥은 그런 햇빛을 차분히 흡수하며 우리가 없는 사이 때로 버거울때조차 묵묵히 타들어가는 고통을 감내하고 있었다. 바닥의 열이 우리 집을 데워주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나흘동안 사람이 없던 집은 어쩐일인지 동굴같이 어둡고 차가웠다. 사람이 없다는 게 이렇게 커다란 공허함을 주는걸까. OO도 낯설은 우리 집을 느꼈는지 피곤할텐데도 지친 몸을 이끌고 청소하겠다며 팔을 걷어붙였다. 이불을 걷어 베란다에 걸치곤 긴 막대기를 가져와 탈탈 먼지를 털어낸다. 내가 하겠다고 막대를 빼앗아 들었더니 아니 내가 할게, 하고는 막대를 빼앗아들곤 다시 이불을 턴다. 탁탁탁. 이불을 터는 소리만이 이 집안을 울린다. 탁탁탁, 탁탁탁.
이제 더이상 털지 않아도 될 것 같은 이불을 OO(이)는 계속털고 있었다.
아무 생각없이 털고있는 것일까 아님, 다른 무언가를 털어내기위해 저러는 걸까.
OO(은)는 이번엔 걸레를 빨아와 집안 구석구석을 닦는다. 세번 정도 접어서 직사각형으로 만든 촌스러운 색깔의 걸레를 잡고 무릎으로 엉금엉금 기어서 주방 싱크대 밑도 닦고 식탁 다리도 닦고 거실로 나와 쇼파밑도 닦았다. 엉킨 실처럼 뭉친 먼지가 동서남북 할 것 없이 사방에서 스멸 스멸 기어나왔다. 또 한 번 걸레를 빨아와서 이번엔 텔레비전과 어항까지 닦는다. 나는 그런 OO(이)를 도와줄 생각도 하지 못하고 멀뚱히 쳐다만보고 있다.
"OO(아)야."
며칠 동안 부르지 못한 이름을 입 밖으로 꺼내보았다. 낯설었다. 많이. 겨우 나흘이였을 뿐인데.
"어?"
시선은 여전히 움직이지 않고 내 말에 대답한다. 이번엔 뽀드득,뽀드득 하는 소리가 이 집안을 울린다. 왜?
"그만하고 좀 쉬어."
보다못해 말을 꺼냈다. 그제서야 OO(이)의 손길이 멈췄다. 얼마나 급히 움직였는지 이마에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혀있다. 헥헥 대며 거친 숨을 내쉬더니 바닥에 철푸덕 하고 대자로 뻗고선 내게 물 좀 갖다달라고 말했다.
유리잔에 시원한 물을 받아와 건네주니 급하게 상체를 일으키며 벌컥벌컥 물을 들이켰다. 그렇게 열심히 청소만 했으니,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우리, 이사 갈래?"
OO의 유리잔에 물이 깔끔하게 비워졌다.
"응? 우리 이사 가자."
바닥에 놓여진 유리잔을 바라보다 고개를 들어 OO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나를 올려다보는 눈에는 땀방울처럼 송글송글 눈물이 맺혀있었다.
"아니면 그냥 이민갈까?"
OO의 옆에 앉아 그녀의 볼을 찬찬히 쓰다듬었을 때에는 이미 땀인지 눈물인지 모를 물기로 그녀의 얼굴이 적셔진 때였다.
그녀는 지금 영민하지 못하다. 왜냐면 슬픈자는, 영민하지 못하니까.
상실의 시대
Written by 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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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을 짓자고 했는데도, OO(은)는 아이를 '아가'라고 불렀다. 예쁜 이름이 생각날때까지만 아가라고 부르기로 한 OO(이)는 어느새 입에 붙어버렸는지 늘상 아가라고 불렀다. 나 또한 아가라는 어감이 좋아서 자꾸자꾸 입에 담았다. 아가야, 라고 부르는 그 순간에 가끔씩 몸서리치도록 황홀해서, 눈물이 차올랐던 기억이 난다.
아이는 손에 무언가가 들어오면 꽉 쥐는 것이 본능이라고 했다. 그 조그맣고 보드란 손에 손가락을 갖다대면, 자신이 낼 수 있는 가장 큰 악력으로 손가락을 꽉 쥐었다. 세상의 때가 묻지 않은 그 작은 손이 세상의 때가 덕지덕지 묻은 내 손을 쥐어주는게 좋아서, 이렇게라도 면죄부를 받고 당당히 아버지가 될 수 있을 것 같아서, 나는 항상 아이를 보면 손가락부터 갖다 대었다. 그럴때마다 항상 OO(은)는 으이구 진짜, 또 더러운 손으로 아가 만지지? 웃음기 가득 머금은 채로 잔소리를 했다.
아이란 원래 그런건지, 아님 우리 아이가 예민했던건지, 낮잠을 잘 때면 한 시간에 한 번씩 꼭 깨어났다. 그럴때마다 OO(이)는 아가를 안아들곤 우리 아가 깼어? 그래, 엄마 여기 있어. 더 자도 돼. 알아들을리 만무한 아이에게 말을 건네며 등을 토닥였다. 그렇게 OO(이)가 아이의 등을 토닥이고 끊임없이 말을 하면 아이는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그런 모습을 보고 못말린다는 듯이 표정을 지으면, OO(이)는 나에게 얘기했다. 우리 아가가 그래도 효자야. 밤엔 보채지 않고 잘 자잖아. 우리 잠 편안히 자라고 그러는 거야 아가가. 그럼 나는 이번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OO(아)야, 아가가 어떻게 그런 걸 이해해. 라고 말했다.
우리 아가, 다른 얘들처럼 조기교육 시키지 말고 밖에 나가서 신나게 뛰어 놀게 해주자. 요즘 아이들은 너무 공부에 치여 사는 것 같아. 하루 일과가 학교, 학원, 집 항상 이런 식이잖아. 날이 갈수록 OO의 꿈은 점점 커져갔다. 모든 초점을 아이에게 맞추고 있는 걸 보면서, 나는 점점 현실적인 사람이 되어갔다. 우리 아가, 아직 걷지도 못해. 거기다가 엄마 아빠도 할 줄 모르는데. 미래를 위해 살아가는 OO(이)와는 대조적이었다. 그리고 항상, 나는 그런 미래로 이어진, 꽃으로 만들어졌을 것 같은 아름다운 미래의 그 길을 즈려밟았다.
조금만. 조금만 더 미래에서 살게 해 줄걸. OO(이)를 미래에서 더 오래 놀도록 놔 둘걸, 이토록 후회할 줄 알았으면. 어째서 이토록 나는 현실적이였을까.
오랜만에 일찍 시합을 끝내고 온 토요일 오후였다. 나는 들뜬마음을 안고 잠깐 비디오방에 들려 OO(이)와 함께 보고 싶었던 비디오를 빌려 집으로 들어갔다. OO(이)는 일찍 퇴근한 나를 반기며 손에 쥐어진 비디오를 보곤 우리 얼마만에 보는 영화야? 라며 환하게 미소지었다. 그리고는 방에 들어가 우유를 먹고 잠든 아이를 확인하고는 다시 나와 비디오를 틀었다. 쇼파에 같이 나란히 앉게되자 나는 OO(이)를 바라보며 얼굴 이곳저곳에 뽀뽀도 하고, 배를 꼬집으며 장난을 쳤다. OO(은)는 눈을 흘기며 한번만 더 해봐 라고 엄포를 놓았지만 실상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 그저 그런 OO(이)가 내 눈엔 너무 귀여웠다.
한 시간 반짜리의 영화를 다 보곤 나는 하나 더 빌려온 비디오를 꺼내들었다. 하나만 봤으면 되지 뭘 또 보냐는 OO(이)의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비디오를 틀었다. 영화광인 나는 오늘을 영화로 빽빽이 다 채울 작정이었다. 혀를 내두르는 OO(이)에게 계속 장난을 치다가, 다시 영화를 보고, 집에 있던 과자를 먹으면서 문득 오늘따라 아이가 참 조용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OO도 그러는 동안에도 계속 아이를 걱정했다. 이럴리가 없는데. 자리에서 일어나 아이에게 가려고하자 손목을 붙잡곤 다시 앉혔다. 오늘만큼은, 좀 쉬자. 나는 이런 주말이 너무나도 간절했다. 쉴 수 있을 때 쉬어야지. 오랜만의 휴식인데 이렇게 '걱정'이란 안 어울리는 감정으로 휴식을 날려버리려 하는 OO(이)가 안쓰러웠다.
영화의 엔딩크레딧이 올라가자마자 OO(은)는 한달음에 아이가 자고있는 방으로 갔다. 가는 동안에도 OO(은)는 갸우뚱했다. 이렇게 곤히 잘리가 없는데, 이상하다 내가 너무 우유를 많이 먹였나. 그리고 방에 들어간 OO(이)의 숨이 멈추는 소리가 들렸고, 잠시간의 정적끝에,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본 듯한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방에서 나왔다.
석영아.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이다.
OO(이)가 온전치 못한 정신으로 겨우 땅에 발을 디디고 있는 모습을 보고서도, 나는 그런 OO(이)를 우선 제쳐두고 방으로 들어갔다. 아이를 만져보니 보송보송한 피부위로 미열이 느껴졌다. 하지만 온기만 남아있을 뿐, 가슴의 오르락 내리락은 정지되있었다. 입술새로 나오는 숨소리도 느껴지지 않았다. 아이의 손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봤지만, 어떤 것이든 꽉 쥐던 아이의 처절한 본능은, 더 이상 남아있지 않았다. 나를 정화시켜주던 아이의 조그맣고 보드라운 손은, 더 이상, 없었다. 건전지가 다 된 장난감처럼. 그렇게.
사인은 질식사였다. 낮잠을 자면 한 시간마다 깨던 아이가, 그날따라 왜 울지 않았던 것인지. 어째서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었던 것인지. 누구의 품이, 그토록 그리웠던 것인지. 평소처럼 울었더라면 나든 OO(이)든 얼른 달려가 꼭 안아주었을 텐데. 아이가 그리워 했던 품을, 내주었을텐데. 아이는 효자행세를 하고 싶었던 것인지, 아니면 정말 효자였던건지 우리의 주말을 위해 사람의 품 대신 베개를 찾았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런 것까진, 이해하려 하지 않아도 되는데. 안해도.. 되는데 우리 아가.
태어나 우리처럼 숨을 쉬고 있다는게 너무 신기했던, 살아 움직였던 아이는, 우리 아이를 한 번도 보지 못한 하얀 가운을 입은 사람에게 죽음을 선사받았다. 아이를 키운 우리보다 더 많은 걸 알고있듯이 그 사람은 그렇게 아이가 죽었다, 그리 말했다. 아이는 걸어보지도 못하고, 엄마 아빠 한번 내뱉어 보지 못하고, 죽었다. 그런데 나는 오히려 OO에게 정신 차리라는 듯이 저렇게 작은 아가한테 칼을 대지 않아서 다행이야. 봐봐 저기에 있는 인큐베이터 아이처럼 죽을지 살지 모르는 그 고비를 지켜보고 있지 않아도 되잖아. 차라리 다행이야. 아직도 새하얗게 질린 OO(이)를 보며, 움직이지 않는 아이를 보며 나는 현실적인 말을 건넸다. 미래를 살고 싶어하던 OO(이)와 아이에게. 지극히 현실적인 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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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라붙을 새도 없이 계속 눈물 범벅으로 젖은 종이장 같은 얼굴을 바라보았다. 예전부터 누구에게도 슬픔을 보여주지 않으려 했던 너. 이쁜 모습만 보여주겠다던 너는 또다시 슬픔으로 얼룩진 얼굴을 내보인다. 나 또한 슬픔이 차올라 꾹꾹 눈 밖으로 새나가지 못하게 밀어넣은 후 OO(이)의 입술에 입술을 맞대었다. 입술을 떼고 다시 입술을 맞대려 하자 OO(이)는 그런 나를 뿌리치곤 등을 돌려 무릎에 고개를 묻었다. 무언가를 등에 짊어지지도 않았는데, OO의 등은 한가득 짊어진 것 같다. 굽어진, OO(이)의 마른 등.
"석영아."
나무껍질같이 갈라지고 마른 목소리가 내 이름을 부른다. 처절한 나무의 외침이다.
"..응."
"나 있잖아 방금 청소할 때 깜빡하고 아가 젖병이랑 젖꼭지 삶고 있었어."
"......"
"젖병이랑 젖꼭지랑 모빌이랑 침대랑.. 아가 물건.. 갖다가 다.. 버릴까?"
"너 하고싶은 대로 해. 난 괜찮아."
"그렇게 버리면, 다 잊혀져?"
"......."
"아가가 잊혀지나? 응? 석영아."
"......."
"그럼, 안 버린다고 안 잊혀질까?"
OO(이)가 허탈한 숨을 내쉬었다. OO의 슬픔이 흐르는 처연한 등을 더이상 보고 있기 힘들었다.
"예쁜 이름 얼른 생각해서 지어줄 걸. 괜히 이름 안부르고 아가라고 불러줬다. 그치?"
"......"
"얼마나 속상했을까. 자기가 이름이 뭔지도 모르고 떠났어. 우리... 아가."
OO의 허리를 감싸안고 OO의 어깨에 얼굴을 묻곤 숨을 내뱉었다. 심장의 어두운 밑바닥까지 끌어올린 내 숨은 방바닥에 깔리면서 짙은 안개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그 안개는 OO(이)를 더 슬프게 만들었다. 울지마, OO(아)야. OO(이)를 내 쪽으로 돌려 바라보게하자 예상대로, 소리가 새어나가지 않게 아랫입술을 깨물고 가슴을 주먹으로 내리치고 있다. 가슴에 멍들겠다 OO(아)야. 주먹을 두손으로 꼭 움켜쥐자 OO(이)는 결국, 울음을 터트린다. 아가 효자라서 우리 원망 안할꺼야. 내가 할 수있는 말은 고작 이런거였다.꺽꺽 거리며 숨이 넘어갈듯한 OO(을)를 보고도 해줄 수 있는 말은, 이런 진부한 말이 전부였다.
"사실 예쁜 이름... 지어논 거 몇개 있었는데.... 아가라는 말이 좋아서... 매일 아가라고만...."
꾸역 꾸역 슬픔을 삼키며 내뱉는 말에 결국 나도 울 것 같아 손을 뻗어 OO(이)를 안아주었다. OO(이)도 손을 뻗어 내 허리를 감쌌다. 가슴에 닿는 OO(이)의 얼굴. 까맣고 동그란, 아가를 닮은 뒷통수. 너무나 닮은 뒷통수를 나는 찬찬히 쓰다듬었다.
상실감은, 상실보다 훨씬 늦게 찾아오는 것일까. 가루가 된 아이를 납골당의 차가운 유리 함 안에 넣을 때에도 좀 허망하네. 하고 눈꺼풀을 내려앉히기만 하던 OO(이)가, 정말로 크게 소리내며 목놓아 운다. 석영아 어떡해, 어떡해. 목놓아 우는 소리 안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드문드문 들리운다. 상실감을 깨달은 목소리란건 이런것일까. 우리는 어째서, 이렇게 한 발짝 늦게서야 깨닫는 걸까.
OO(아)야. 너는, 우리는, 아가는. 언제 어디서나 행복해야해.
OO(을)를 으스러지도록 끌어안았다. OO(이)도 나를 따라 나를 더욱 힘껏 끌어 안는다.
아가처럼, 본능적으로, 마치 서로가 서로의 생명줄인 양, 그렇게.
――――
결국 여기로 옮겼네요.. 망상 익스에서 안된다길래 옮겼습니다. 약간 수정했는데 음.. 호박에 줄긋는다고 수박이 되지 않는 것처럼 내 글도 수정한다고 해서 뭔가 나아진 건 없는듯.
이렇게 되면 강제 신분노출이 되는건가요. 끙.
참고로 제 글은 너무 겆이같아서... 오른쪽 마우스 차단해놨어요. 나중에 따로 텍스트를 만들어서 메일링 할지도 모르겠지만.. 우선은 저 자신이 제 글에 대해 용기가 없는지라.. 흡... 미안합니다. 소심소심열매 주워먹은 작가를 용서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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