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아, 예쁘니까.
09
"헐, 정희원. 너 염색했냐?"
"염색한 지 일주일이나 지났거든? 제발 동기한테 관심 좀;"
…음.
"선배님! 왜 계속 내 말 무시해요!"
"말 좀 걸지 말라고!"
"와, 진짜!!"
어….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이냐면….
막상 그들을 찾긴 했지만 소심한 성격 탓에 이지훈과 석민이라는 아이가 있는 곳으로 차마 다가가지 못하고 쭈뼛대고 있을 때쯤, 그런 나를 알아챈 건지 이지훈이 나를 보며 물었었다.
'너, 우리 조야?'
'어? 어….'
'뭐 해. 이리로 안 오고.'
응, 가야지! 그럼, 그럼. 나는 알겠다고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쪽으로 걸어갔다. 그곳으로 가자 쩌렁쩌렁하게 '안녕하세요, 선배님!' 하는 석민이에 놀라 바보같이 말을 더듬으면서 어색하게 인사를 받아친 나는, 지금 구석에서 완전 몸을 사리고 있었다. 사실 아무한테도 얘기 안한 건데… 나는 이지훈이 무섭거든. 그것도 매우, 엄청, 많-이. 일단 생긴 거와 다르게 한 까칠하는 성격도 있지만, 까칠하기만 하면 모를까. 작년에 어떤 남자 동기랑 싸우는 걸 봤었는데 진짜 그때를 생각하노라면 나는 아직도 등골이 서늘해지곤 한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진짜 화가 나면 눈이 돌아간다는 게 무엇인지 확실하게 보여주는 듯, 그때의 이지훈은… 어우. 오죽하면 그 남자 애가 종강을 하자마자 바로 군대로 떴을까.
'선배님, 우린 진짜 인연인가 보다. 그쵸?'
그런 이지훈을 아는지 모르는지 옆에서 계속 치근덕대고 있는 이 후배를 나는 과연 구제를 해줘야 될까, 아니면 그냥 가만히 내버려 둬야 할까 잠시 고민에 빠졌었다. 하지만 이내 접었지. 내가 뭐라고 저 애를 챙겨줘. 일단 나는 오지랖 떨 성격도 되지 못했고, 그리고 아까도 말했다시피 나는 이지훈이 너무 무섭다. 괜히 엮여서 피 보면 어떡해….
'닥쳐, 좀. 너랑 인연 같은 거 하기 싫으니까.'
'우리의 지난 추억들은 어쩌고요…!'
'추억 같은 소리하고 앉아있네. 너 왜 그렇게 나한테 친한 척하는 건데?'
으…. 쟤는 진짜 눈치가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없겠지. 없으니까 계속 저러고 있는 거겠지. 둘이 어떻게 아는 지는 몰라도 저러다 이지훈이 펑, 터져버리는 건 아닐까 싶은 마음에 나는 몰래 그들에게서 한 발자국 멀리 떨어져 섰다. 다른 사람들은 언제 와. 제발 누구라도 와 줘라. 이 둘이랑 같이 못 있겠으니까…! 나의 간절한 염원이 통하기라도 한 듯 머지않아 우리 조 선배들이 차례대로 오기 시작했다. 그 중 태형 선배는 지훈이의 어깨를 툭- 치더니 말했다.
'지훈이. 오랜만이네?'
'안녕하세요. 선배.'
'지난 학기도 과탑했다며. 그것도 4.5점이라면서?'
……?! 믿기지 않던 말에 나는 그쪽으로 고개를 훽 돌렸다. 이지훈이 공부를 잘하는 건 알고 있었지만 저 정도일 줄은 몰랐지. 4.5가 존재하는 점수이기는 해…? 입이 떡 벌어져서 그들을 바라보는데 이지훈은 그런 것 쯤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누가 보면 재수 없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뭔가 이지훈이라서 이해가 되는 표정이라고 해야 되나…. 와, 진짜 대단하다. 나는 열심히 해도 4점 대가 나올까 말까 하던데…. 선배들의 말을 듣고 있던 석민이는 또 옆에서 '이야, 역시 선배님 대단한 사람이었네!' 이러면서 엄지를 척 들고 있었다.
'다들 모였으면 내일 요리 대회에서 할 메뉴들을 정해주세요. 다른 조랑 겹치면 안 됩니다!'
어느 정도 조원이 모이기도 했고, 앞에서 들려오는 승철 선배의 말에 다들 자리에 앉긴 앉았는데… 내가 아까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이냐며 운을 뗐었지? 그래.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이냐면, 팀원들 간의 조화라고는 전혀 찾아 볼 수 없는… 그런 상황이라고나 할까. 선배들은 선배들끼리 말을 하고 있었고, 석민이는 이지훈한테 계-속 칭얼대고 있었고. 아무래도 다들 잘 아는 사이가 아니니까 어색해서 그러는 거겠지만, 그래도 지금은 얼른 뭐라도 말을 해서 정해야 될 거 같은데…. 다른 조들은 아주 열띤 토론을 하고 있는 게 보였으니까. 하지만 태생이 답답한 나는 아무런 말도 못하고 혼자서만 애가 타 막 안절부절못하고 있는데,
"늦어서 죄송합니다!"
"너 왜 이렇게 늦게 와!"
"미안. 과사에서 잠깐 뭐 할 게 있어가지고."
드디어 우리 조의 마지막 조원, 혜지가 왔다. 오늘도 여전히 예쁜 그 아이의 등장에 선배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 아이에게로 쏠렸다. 그리고 자연스레 입에 미소가 걸리던 선배들. 석민이와 아무렇지도 않게 장난을 치면서 말하던 혜지는 지금 뭘 해야 되냐며 물어왔고, 희원 선배가 내일 요리 대회에서 할 메뉴를 정해야 된다고 얘기하니 그 아이는 가방에서 종이와 볼펜을 꺼내들기 시작했다. 그것을 시작으로 거짓말 같게도 하나로 합쳐지던 조원들.
"뭘 하는 게 좋을까요?"
"음… 글쎄. 일단 하면 안 되는 걸로는 카레. 강 교수님이 카레 진짜 싫어해."
"아, 교수님들이 평가 위원이에요? 그럼 그건 빼고…."
와… 아까 무지하게 단합 안 되던 우리 조 맞냐. 여기서 나이가 제일 어림에도 불구하고 중심에서 이끌어가고 있는 혜지의 리더십에 새삼스레 감탄을 하고 있을 때였다.
"선배님! 저희 뭐가 좋을까요?"
"…어, 어?"
"선배님이 2학년 부과대시잖아요!"
혜지의 말에 나한테 쏠리던 수십 개의 눈동자들. 한순간에 주목을 받아버린 나는 머릿속이 새하얘져 방금 혜지의 질문이 뭐였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어, 그게…. 말끝을 흐리며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나로 인해서 갑자기 찾아온 침묵. 어떡해. 나 지금 이거 어떻게 해야 돼? 아까 혜지가 뭐라 그랬지? 아, 멍청아. 방금 들어놓고 그걸 왜 까먹어…!!! 시간이 지날수록 얼굴은 화끈 달아오르고, 나를 바라보는 이 시선들은 부담스러워 죽겠고. 그냥 방금 질문이 뭐였냐고 물어보면 될 것을 나는 왜 그것조차 하지 못하고 있는 걸까.
'쟤가 2학년 부과대야?'
'쟤 이름은 뭔데?'
순간 옆에서 내 얘기를 하고 있는 선배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분명 작게 말하고는 있었지만, 전에도 말했듯이 나는 빌어먹게도 누가 내 얘기를 하면 너무나도 잘 알아듣는 그런 능력 아닌 능력이 있어서…. 선배들의 말은 나를 더 주눅 들게 만들기에 충분했고, 책상 아래에서 손톱만 뜯고 있던 나는 이내 고개를 푹 숙일 수밖에 없었다. 아… 진짜 한심하다. 이런 거 하나 제대로 하지 못하다니.
"그냥 김치찌개로 해. 교수님들 대부분이 얼큰한 거 좋아하시니까."
그때 들려오던 이지훈의 목소리. 그의 말에 다행스럽게도 분위기는 살아났고, 차라리 무난한 게 나을지도 모른다며 분위기는 김치찌개를 하는 쪽으로 흘러갔다. 바보 같은 나는 그제야 깨달았지. 아까 질문이 뭐였는지를. 멍청이, 저거 하나 대답 못하고…. 펜과 종이를 달라며 손짓하는 이지훈에 혜지는 그것을 건네주었고, 펜을 집어 든 이지훈은 조원 이름을 하나하나 적기 시작했다.
"야."
"어?"
"너 이름이 뭐였지?"
…김여주. 선배들의 이름을 차례대로 적던 이지훈은 내게 이름이 뭐냐고 물었고, 나는 기어가는 목소리로 대답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일이 한두 번도 아니고, 어느 정도 무뎌졌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겪어보니 또 아니었나 보다. 더군다나 방금 한심하던 내 모습이 자꾸 떠올라서 그런지 지금 느껴지는 이 비참함을 막을 방법도 더더욱 없었고. 내가 그렇게 존재감이 없는 걸까. 정말 나는 이 정도밖에 되지 않는 사람이라서 사람들이 매번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 걸까…. 괜히 울컥해져와 입술을 꾸욱 깨물었다.
"넌 뭐야."
"네?"
"이름."
"아, 선배님. 알면서 왜 모른 척해요!"
"? 진짜 몰라."
……? 이건 뭔 상황이야.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숙이고 있을 때 들려오던 그 둘의 목소리.
"아, 장난치지 마요! 선배 공부도 잘한다면서 왜 내 이름은 기억 못해요!"
"나 원래 사람 이름 잘 기억 못해. 빨리 니 이름 안 말해?"
"안 알려줄 거예요. 흥!"
"그래, 그럼."
넌 이름이 뭐라고? 고개를 들어 그들을 바라보는데 정말로 석민이를 건너뛰고 혜지에게 이름을 물어보고 있는 이지훈. 그에 석민이는 옆에서 어떻게 진짜 넘어갈 수가 있냐면서 '제 이름 석민이요, 이석민!!!' 하고 다급하게 외쳐왔다. 아… 맞아. 이지훈은 원래 저런 사람이었지. 원래 이름을 잘 기억하지 못하는 애였어. 내 이름만 생각하지 못한다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자 마음 한구석에서 들던 작은 위안. 김여주, 바보같이 이런 걸로 위안 삼지 말라고.
"우리 지원금이 얼마랬지?"
"한 조당 10만 원이요."
"그럼 그걸로 재료 사고 일회용품도 좀 사면 되겠다. 사실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게 있는데."
휴대용 버너랑, 부탄가스, 그리고 냄비. 이건 누가 가져올래요? 이지훈의 말에 선배들은 마치 짜기라도 한 듯 모두 고개를 돌리기 시작했다. 정말 내가 다 무안해질 정도로. …우와, 어떡하지. 그냥 내가 가져온다고 할까? 주위를 한 번 둘러보던 이지훈은 약간 심기가 불편하다는 듯이 책상을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냄비는 제가 가져올게요. 집에 좀 적당한 게 있어서. 그런데 버너랑 부탄가스 이런 거는 자취하는 사람들 중에서 가져왔으면 좋겠는데. 아무래도 통학하는 사람이 가져오기는 힘들 테니까요."
"후배님."
"ㄴ, 네?!"
이지훈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갑자기 내게 말을 거는 현석 선배. 정말 뜬금없는 상황이라 소스라치게 놀라며 대답을 하는데, 나를 위아래로 한 번 쭈욱 훑어보던 선배가 말했다.
"후배님이 가져오는 걸로 하지."
"…네?"
"우리 중에서 제일 잘 들고 오게 생겼는데."
…아. 희원 선배는 현석 선배의 어깨를 퍽, 퍽 내리치며 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냐고 말해왔지만, 현석 선배는 내가 뭘 잘못했냐며 오히려 희원 선배를 타박해댔다. 그리고 나는 수치심에 정말 눈물이 나올 뻔한 걸 겨우 참아냈고. 아, 쪽팔려. 쪽팔려 죽을 거 같아. 선배의 말을 너무나도 잘 이해했기에 나는 부끄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얼른 이 상황을 마무리 시키기에는 그냥 내가 들고 오겠다고 말하는 게 나을 거 같아 그러겠다고 대답하려는 찰나,
"제가 가져올게요! 저 자취하거든요. 완전 괜찮은 거 있으니까 저한테 맡겨주세요."
석민이 손을 번쩍 들고선 헤헤 웃으며 말했다. 그래? 그럼 그러던가. 그 말을 한 후 현석 선배는 옆에 태형 선배에게 웃으면서 속삭였다. 귀찮은 일 하나 떨궈냈다고. 그걸 듣는데 왜 이렇게 울화통이 터지던지.
"그러면 버너랑 부탄가스는 이석민이…."
이름 밑에 각자가 맡은 것들을 정리하고 있는 이지훈을 보다가 그에게서 눈을 떼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건너편 바로에서 보이던 한솔이네 조. 너무나도 화목해 보이는 그 조에 나는 괜히 슬퍼졌다. 나도 저기에 속해 있었으면 그나마 나았겠지. 여기보다는 나았을 거야. 입이 찢어져라 웃으면서 한솔이에게 말을 거는 여자 동기들을 보는데 어찌나 부럽던지…. 아, 안 되겠다. 더 이상 못 보겠어.
그 옆으로는 전원우와 부승관이 보였다. 그것도 한 조 안에서…? 헐, 왜 둘이 같은 조야? 내가 잘못 본 건가 싶어서 눈을 비비고 스크린에 띄워진 조 명단을 보는데 그 둘의 이름은 5조에 나란히 적혀 있었다. 와, 진짜 부럽다. 저기만 됐었어도 정말 괜찮았을 텐데…. 몇 번이고 속으로 승철 선배가 조 좀 잘 짜주기를 그렇게 빌었지만 내 기도가 부족했던 걸까…. 아니야, 그래도 김승민이랑 같은 조 안 시켜준 걸 정말 감사하게 여겨야지. 그나저나 걔는 어디 있지. 2조부터 차례대로 조 명단을 훑어내려가다 10조에 있는 그의 이름에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와, 완전 정반대 편이구나. 다행이다.
……잠깐.
"…어?"
믿기지 않는 이 상황에 나는 고개를 돌리며 너를 찾아다녔다. 네 얼굴을 보기 전까지는 납득할 수 없었으니까. 제발 아니기를 빌면서 너를 찾아보지만, 김승민의 맞은편에 앉아 있는 너를 보고선 나는 그만 할 말을 잃어버렸다.
……네가 왜 거기에 있어?
*
"……."
"……."
이걸 어떡하지. 정한은 아까부터 심기가 매우 불편한 상태였다. 후배라고 하는 새끼가 아주 분위기를 다 흐려놓고 있었으니까. 몸을 쭈욱 빼고 앉아 핸드폰만 만지작거리던 승민은 이따금씩 제 동기로 보이는 애한테 시비를 털기 일쑤였고, 14학번 애가 의견을 내달라고 말을 해도 씹고 엎드려 있었다. …지금 뭐 하자는 거야. 참다 참다 못한 정한이 말했다.
"야."
"……."
"야!"
"…저요?"
"안 일어나?"
정한의 말에 잠시 움찔하던 승민은 구시렁대면서 몸을 일으켰다. 가뜩이나 승철에게도 찍힌 상태였는데 정한한테까지 찍히면 제 학교 생활은 편치 못할 테니까. 씨발 누가 친구 아니랄까 봐 끼리끼리 지랄이네…. 여태까지 놀기만 했으니 이제 의견 좀 내보라는 정한의 말에 승민은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냥 아무거나 만들어요. 뭐 얼마나 진수성찬을 만들라고."
…아, 저 새끼를 어떻게 하지? 최승철 이 새끼는 왜 이딴 새끼랑 같은 조에 넣은 거야, 짜증 나게. 굳어지는 정한의 표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승민은 화장실 좀 다녀오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가. 앉아."
"아, 쌀 것 같단 말이에요. 금방 갔다 올게요."
"야!!!"
"어이쿠-!"
정한의 말을 곱게 무시하고 승민이 한 발자국을 옮기기 시작했을 때 갑자기 민규는 난데없이 다리를 쭈욱 뻗었고, 그 타이밍에 민규의 다리에 걸린 승민은 아주 보기 좋게 철푸덕! 소리를 내며 엎어졌다.
"씨발, 어떤 새끼야!!!"
"아, 죄송합니다. 다리가 저려서 스트레칭을 한다는 게."
의자 밖으로 나온, 가뜩이나 긴 제 다리를 주먹으로 툭, 툭 두드리고 있는 민규를 보며 승민은 이를 빠득 갈았다. 누가 봐도 고의성이 다분했던, 정말 예상치 못한 민규의 행동에 정한은 놀라기도 하면서도 저 후배는 뒷감당을 어떻게 하려고 저러는 건가, 싶은 마음에 만약 승민이 민규에게 뭐라고 하면 제가 나서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앞으로 조심해, 인마."
아프잖아, 쯧. 한 소리를 퍼부울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과는 다르게 승민은 별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먼지 묻은 제 바지를 털더니 이내 자리에 다시 앉았다. 그리고 다시 제 동기 놈을 갈구기 시작했지. 빨리 의견을 내보라면서. …이것 봐라? 정한은 시선을 승민에게로 한번, 민규에게로 한번, 다시 승민에게로 돌렸다. 그리고 생각했지. 김승민이 저 후배에게는 왜 관대한 걸까…, 하는 흥미를 가지면서.
*
"…민규야!"
예비 모임이 끝나자마자 부리나케 뛰쳐나온 나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학교 건물에 숨어 있다가, 민규가 제 친구들과 인사를 하고 헤어지는 걸 확인한 후 얼른 그에게로 달려가 그의 어깨를 툭 쳤다. 갑작스러운 나의 등장에 놀란 건지 눈을 동그랗게 뜨던 민규는 이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뭐야, 먼저 간 줄 알았잖아요! 어디 있었던 거예요?"
"어? 어… 잠깐 화, 화장실 좀 가느라고."
"그랬구나. 잘 됐다! 같이 가요."
와, 그러고 보니 민규랑 학교에서부터 같이 가는 건 또 처음이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주변을 두리번거려보지만, 우리 과 사람들은 보이지 않음에 나는 그제야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버스 타러 가는 곳에는 사람이 많을 테니 더 눈에 띄지 않겠지. 그런 나를 보며 민규는 무슨 생각을 하냐 물었지만,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누나네 조는 내일 뭐 만들기로 했어요?"
"우리 김치찌개! 너희는?"
"아… 우리…."
볶음밥이요. 말을 하는 민규의 입이 삐죽 튀어나와 있었다. 아 진짜 볶음밥이 뭐야, 볶음밥이…. 민규는 엠티의 꽃은 요리가 아니겠냐면서, 그런데 제 요리 실력을 발휘하지 못해 원통해 죽겠다면서 우는소리를 냈다. 민규네 조 메뉴를 듣자마자 딱 드는 생각. 아… 누가 정했는지 안 봐도 알겠다.
"그거 김승민이 정한 거지…?"
"네. 그 선배는 뭐 다 싫대요. 이거는 준비할 게 많아서 싫다, 저거는 복잡해서 싫다."
"…고생이 많네."
내가 사람들의 눈을 피해 가며 민규를 기다린 이유는… 걱정돼서. 걱정돼서였다. 10조에 김승민과 같이 적혀 있던 네 이름을 보고 얼마나 놀랐던지. 워낙에 사람을 깔보고 무시하는 애라 혹시 김승민이 너한테 해코지라도 했으면 어떡하지? 너한테 괜히 시비라도 걸면 어떡하지? 하는 마음에 나 혼자 마음 졸이기를 수백 번. 하도 너한테 김승민이랑 같은 조가 되기 싫다고 말을 했었기에, 혹시나 내 불운이 너에게로 옮겨간 건 아닐까 생각하기도 수천 번. 다행히도 별일은 없어 보인다만 나는 네가 걱정돼서 견딜 수가 없었다.
"봐봐. 내가 뭐랬어."
"……?"
"누나가 생각하는 그런 최악의 상황은 안 온다고 했죠?"
……아. 어제 네가 그랬었지. 내가 생각하는 그런 최악의 상황은 오지 않으니 너무 불안해하지 말라고. 떠오르는 어제의 기억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몸을 돌려 나를 바라보며 걷던 민규는 말했다.
"다행이에요."
"뭐가?"
"내가 그 선배랑 같은 조가 돼서."
"……어?"
그의 말에 자연적으로 멈추던 걸음. 나를 따라 걸음을 멈추던 그를 올려다보자 여전히 나를 보며 환하게 웃고 있는 너.
"이번 엠티는 누나가 힘들어하지 않아도 되니까 정말 다행이라구요."
"……야."
"누나네 조에 이석민이라고 있죠?"
"어, 어?"
"걔 약간 하는 짓은 또라이 같아도 착한 애니까 걱정 안 해도 돼요."
가요. 늦었다. 그 말을 끝으로 걸어가는 민규. 나도 얼른 그를 따라가야 되는데… 애석하게도 땅바닥에 발이 붙어버린 듯 나는 움직일 수가 없었다. 이렇게까지 나를 생각해주는 사람은 네가 처음이라, 나는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어. 고마운 마음 한 편로는 그만큼 해주지 못하는 것에 대한 미안한 마음.
"거기서 뭐 해요, 빨리 와요!"
아직도 제자리에 있는 나를 보며 소리치는 민규에 나는 한 발자국씩 천천히,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생각했지. 너에게 받은 것을 다 갚으려면 얼마나 걸릴지는 모르겠지만, 아니 그 이상을 주려면 얼마나 걸릴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간에 너에게 보답할 수 있을 때까지… 끝까지 노력하겠노라고.
*
아, 추워. 3월 말인데도 불구하고 아직도 떨어지지 않는 추위에 사람들은 모두 오들오들 떨기 바빴다. 날씨가 미쳤나 봐, 이제 4월인데 어찌 된 게 날이 풀릴 생각을 안 하네. 아무래도 곧 4월이 된다는 날짜 개념 때문인지 옷을 가볍게 입고 온 사람이 대다수였기에 사람들은 모두 춥다며 한 마디씩 내뱉곤 했다. 가끔씩 비속어가 들리기도 했고. 와, 진짜 추워. 그 대다수의 사람들 중에는 나도 포함이 돼 있었다. 내가 미쳤지. 후드집업이라도 하나 챙길걸. 그냥 후드티 하나만 달랑 입고 왔는데.
"자, 인원 체크 한 번 해볼게요!"
승철 선배의 말에 각 학년의 과대, 부과대들은 인원을 세기 시작했다. 나와 전원우도 물론이었고. 인원을 세는 와중에도 느껴지는 한기에 몸을 덜덜 떨고 있자 옆에서 전원우가 괜찮냐며 물어왔다. 어, 사실 괜찮지는 않는데…. 지금은 대답조차 하는 것도 버거워서 그냥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신했다.
"와, 핫팩 가져온 건 미친 짓이 아니었어."
"개부럽다. 지금 니가 제일 승리자네."
핫팩이라는 단어에 나도 모르게 그쪽으로 고정되는 시선. 와 진짜 부럽다, 저거 따뜻하겠지…. 사람들은 핫팩이 있는 몇몇 사람에게 들러붙어 같이 손 좀 녹이자고 하고 있었고, 그 중에서는 그것을 뺏어서 들고 튀는 사람도 있었다. 아, 지금 편의점 가서 사 오면 안 되나. 저걸 보면 볼수록 더더욱 시려오는 손에 후드티 앞 쪽에 있는 주머니에 손을 넣고 혼자 추위와 싸우고 있을 무렵,
"……?"
주머니 속으로 들어오던 따뜻한 무언가. 그리고 내 손을 잠시 스쳐 지나가던, 온기가 가득하던 손.
자, 인원 체크 끝났으면 이제 탑승할게요! 내게 핫팩을 쥐여주고 가던 권순영은 1조부터 차례대로 탑승하겠다며 소리쳤다. 와… 이거 뭐야. 이거 왜 나한테 주는 거지? 쟤도 분명 추울 텐데…. 내가 너무 불쌍해보였던 건가? 에이, 그게 무슨 상관이야. 고마워서 어떡하지…. 방금이라도 뜯은 건지 뜨끈뜨끈한 핫팩을 두 손으로 꼬옥 잡으며 인원을 통솔하고 있는 권순영을 바라보고 있다가 이지훈이 뭐하냐고, 얼른 안 타냐고 소리치는 걸 듣고 나서야 나는 내가 1조라는 사실을 깨닫고 허겁지겁 뛰어가야만 했다.
"……."
누가 지켜보고 있었다는 것도 모른 채.
예쁜이들에게 |
안녕하세요. 차차차입니다. 두 달 만이네요. 그때도 오랜만에 돌아와놓고서는 또 이렇게 늦게 찾아뵙게 되어 죄송하다는 말밖에 할 수 없는 제가 너무 한심할 뿐입니다. 미안하고, 또 미안합니다 우리 예쁜이들.
해가 바뀌면 바뀔수록 왜 이렇게 바빠지는 건지. 물론 나이를 먹다 보니까 바빠지는 건 당연한 거지만 이번 학기는 유독 힘들었네요. 연재 텀이 너무 길어 우리 예쁜이들이 화나고, 지치고, 실망했을 걸 다 알기에 사실 돌아오는 것도 조금 겁이 났습니다. 신알신도 열 분 정도가 해제한 상태기도 했고요. 다 제가 잘못한 것이니 뭐라 할 말은 없지만 미안한 마음에, 또 죄송한 마음에 막 양심이 찔리고 죄책감도 들고 그래서 이런 생각은 하면 안 되지만 그냥 이대로 잠수 탈까... 하는 생각도 했었습니다. 하지만 그건 제가 못하겠더라고요. 인티에서 글을 쓰는 건 제 삶의 낙이기도 했고, 가끔씩 쪽지로 구독료 수입이 날라오는데 아직까지 이 글을 잊지 않고 읽어주시는 분들을 보면서 저는 포기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염치 불고하고 다시 찾아오게 됐어요. 정말 죄송합니다.
이제는 기다려달라는 말도 못하겠어요. 여전히 저는 빠른 연재를 약속해드리지는 못 합니다. 하지만 항상 잊지 않고 있다는 거, 글을 쓰지는 못하지만 머릿속으로는 언제나 생각하고 있다는 거. 그거 하나만은 꼭 말씀드리고 싶었어요. 저는 여러분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여러분들을 더 애정하고, 아끼고 있으니까요.
암호닉은 그때 댓글에 달아주신 분들 모두 받도록 할게요! 제가 늦게 돌아오기도 했고 저와 같이 현생에 치여서 늦게 들어오신 분들도 계셨기에, 그 마음을 저도 잘 알기에 모두 받도록 했습니다. 암호닉을 신청하시고도 까먹으신 분들이 계실 거예요. 밑에 암호닉을 꼭 확인해주시길 바랍니다.
어느덧 12월이 되고, 날씨가 매우 추워졌습니다. 건강 관리 잘 하시고 저는 이만 여기서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10편은 16일 이후에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시험이 일주일도 안 남은 시점이라... 종강하면 활발하게 활동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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