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AM 10:37
[호석이는 많이 아파요. 눈도 좀 침침하고 가끔 당연한 걸 기억 못해요, 혼자서는 이 동네 밖까지 걸어가기 힘들어요, 몸에 피도 보통사람보다 많이 모자르고, 또 많이 말랐어요. 호석이는,음, 말도 많구 못생겼구]
"다 보인다."
"어, 아주 잘."
뒷통수로 날아오는 퉁명스런 목소리에 나는 헛헛하게 웃으며 연필을 내려놓고 지우개를 고쳐들었네요. 수첩에 지우개를 마구 문대 지우니 글씨가 빗겨나가며 지워졌어요. 어설프게 지워져 연필이 번진 자국 위에 다시 뭉툭한 연필 촉을 가져다 댔어요. 아까는 호석이가 안보이게 호석이에게 등을 돌리고 썼지만, 이제는 당당히 호석이가 잘 보이게 호석이와 마주보고서 수첩에 끼적끼적 적어내려가봅니다.
[그래두 나는 호석이를 사랑합니다.]
2. PM 2:18
얌전히 잠을 자던 호석이 발작하 듯 깨어났다. 옆에서 꾸벅이며 졸고있던 이름이 덩달아 어깨를 들썩이며 깨어났다. 호석은 이름과 눈이 마주치기도 전에 이불을 머리 끝까지 뒤집어 쓰고 등을 돌려 버렸다. 몸을 일으킨 이름이 이불 속 호석의 어깨 언저리를 잡으며 걱정스런 목소리로 물었다.
아…. 이름이는 잘게 수긍하고는 다시 옆 의자에 엉덩이를 붙였다. 장시간 앉아있다가 급하게 일어서서 그런지 무릎에 전압이라도 가한 듯이 저릿저릿 했지만 이름이는 무릎만 멍하니 감싸쥐고선 머리카락 한 올 내비치지 않는 호석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조금 더 바라보다가 탁상에 세워둔 책 한권을 꺼내 읽던 중이였다. 소설은 막 판타지 세계를 그려내고 있었다. 멍청하게 푸른 바나나와 악취가 나는 장미같은 말도 안되는 세계에 이름이 조금 웃음을 터뜨렸을까, 곧 우욱, 하고 속을 굴직하게 굵는 소리를 낸 호석이 침대 밖으로 상체를 빼내고 속을 게워내고야 말았다. 이름이는 놀라서 책을 떨어트렸다. 침대 끝의 시트머리를 잡은 손이 사시나무 떨리 듯 바들바들 떨더니 곧 진동이 멈춤과 동시에 호석의 몸이 침대를 벗어나 바닥으로 굴러 떨어졌다.
말도 안되게 역겨운 판타지 세계는 병원바닥에서 여전히 펼쳐지는 중 이였고,
무릎은 여전히 저릿했다.
3.AM 1:03
[계속 뒤척이던 호석이가 드디어 잠에 들었어요. 혹시 몰라 이불을 한 겹 더 덮어주니 마음이 한결 놓였어요. 그제서야 알았네요. 오늘 한 끼도 먹지 못했다는 걸요. 밖에 나가서 뭘 사오긴 늦은 시간이라 그냥 자판기에서 뭐 하나 뽑아 마시려고 왔다가 바로 옆 휴게실에서 오늘의 일기를 써요. 오늘은 호석이가 잠깐 기절을 했어요. 예전엔 길에서 걷다가 그냥 픽픽 쓰러졌는데, 요즘엔 발작하고 구토하고 쓰러지니까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그 전처럼 조용히 쓰러지면 그냥 자는 줄 알고 그대로 둘까봐요.]
[호석이는 전보다 쓰러지는 횟수가 많이 늘었어요. 먹은게 없어도 꾸준히 토해내고, 더 말라가네요.]
[나는 가끔, 아니 자주 자고있는 호석이가 숨을 쉬는지 확인해요. 그럴 때 마다 무서워요. 혹시 호석이가,]
거기까지 쓰다가 이름이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럴 때마다, 부터 주욱 주욱 연필로 그어 글씨를 가린 이름이 그 다음 줄의 처음에 뭉툭한 연필촉을 들이밀어 보았지만 쓸 글은 생각나지 않았고, 기분도 나아지지 않았다.
[호석이에게 화를 내버렸어요. 아프면 제발 내색 좀 해주면 안되냐고. 호석이는 한참을 대답이 없었고 답답하고 무서웠던 내가 얼굴을 감싸쥐자 그제서야 날 안아주며 미안하다고 했어요. 호석이는 내가 우는 줄 알았겠지만 저는 호석이 앞에서는 절대 울지 않아요. 호석이는 대뜸 명랑한 표정으로 자신은 괜찮다고, 설마 기절할 줄은 몰랐다고, 급똥신호 처럼 잠시 배가 아픈 거 일줄 알았다고 둘러대며 웃었어요. 거짓말 인걸 알았지만 거짓말 치지말라고 쏘아붙이진 않았어요. 호석이에겐 그게 최선이였겠죠.]
[그리고 사실 무서웠어요. 그렇게 하나하나 쏘아붙여 거짓을 깎아내리면 남은 것은 '정호석은 아주 더럽게 많이 아프다.' 라는 조촐한 진실 밖에 없다는 점이 무서워요.]
[무서워요, 호석이가,]
자꾸 왜이러냐 나. 한숨을 푸욱 쉰 이름이 결국 그 종이한 장을 주욱 찢어냈다. 종이를 구겨서 쓰레기통에 던지고 수첩을 접으려는데 문득 오늘 오전에 썼던 일기가 눈에 들어왔다.
[호석이는 많이 아파요. 눈도 좀 침침하고 가끔 당연한 걸 기억 못해요, 혼자서는 이 동네 밖까지 걸어가기 힘들어요, 몸에 피도 보통사람보다 많이 모자르고, 또 많이 말랐어요. 호석이는,음, 말도 많구 못생겼구]
[그래두 나는 호석이를 사랑합니다.]
그 밑에 삐뚤빼뚤한 글씨가 눈에 밟혔다.
[나도 이름이를 사랑해요.]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던지 한 획, 한 획 힘주어 그은 듯 종이가 눌려져 있었다. 그 투박하고도 연약한 글씨에 결국 참았던 눈물이 터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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