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천국
失樂園
루한레이
01
차였다. 우리 그만 만나자. 하며 나에게 이별을 고하던 남자를 보며 뺨이라도 내려치고 싶었다. 무슨 그런 이야기를 아메리카노 끝장나게 잘하는 커피전문점에서 하니? 어젯밤 봤던 개그코너가 떠올랐다. 나 딴 여자 생겼어. 남자도 아니고 여자가 생겼다는 그에게 뭐라고 할 수가 없었다. 그저 식어버린 아메리카노 한 모금. 입에 머금으며 속으로 실컷 욕하고 있었다.
“예흥아, 나보다 좋은 사람 만나.”
세상에나. 그렇게 형식적인 말이 어디 있어. 재수 없는 새끼. 오늘따라 쓰게 넘어가는 아메리카노가 참 싫다. 그래도 그대로 앉아서 벙어리처럼 버림받지는 않았다. 내 앞에 놓인 잔에 담긴 아메리카노를 그대로 그 잘난 얼굴에 부었다. 내가 먹었을 때 적당한 온도였으니까, 화상을 입지는 않았겠지. 감긴 그의 두 눈과, 굳게 쥐고 있는 주먹이 바르르. 떨린다.
“지랄 떠네”
나는 그 말을 하고선 그대로 커피전문점에서 튀어나와선 비가 내리던 길을 걸었다. 그의 차를 타고 와서 우산이 없었다. 시발. 좆같아. 좆같다고. 좆! 시발! 택시를 잡으려다 오랜만에 데이트라고 좋다고 쫄래쫄래. 아무것도 없이 나온 게 생각나서 비에 젖어 얼굴에 달라붙은 머리를 떼어냈다. 그래도 이 고물 같은 핸드폰은 물은 한껏 머금어도 멀쩡하다. 근처의 건물로 들어가서 신경질적으로 핸드폰을 꺼냈다.
“우산. 쓰실래요?”
노란 머리를 한 교복을 입은 소년이 내게 검은 우산을 내밀었다. 핸드폰에서 시선을 떼고선 그 소년을 쳐다보니 맑게 웃는다. 예쁘게 생겼다. 단정한 교복과 대충 훑어보기에도 비싸 보이는 신발, 그리고 가방이 눈에 띄었다.
“저 곧 부모님이 오시거든요.”
아. 바보같이 나는 입을 벌리며 그 소년이 건네주는 우산을 잡아들었다. 보면 볼수록 눈이 간다. 진짜 그 남자도 잘생겼지만, 이 아이는 더 매력적이게 생겼다. 기어들어 가는 거 같은 목소리로 고마워. 인사를 한 뒤 우산을 만지작거렸다.
“이름이 뭐예요?”
한 번 만나고 말 사람. 이름은 뭐가 궁금하냐고 성격대로 쏘아붙이려다 제 나이 또래들처럼 반짝이는 눈을 한 소년에 모습에 그저 입술을 짧게 깨물었다.
“장예흥”
내 말에 다시금 미소를 짓던 소년이 자신의 앞에 부드럽게 정차하는 차를 바라보며 짧게 탄성을 내뱉었다. 차 좋은 거 타네. 그 남자도 이렇게 비싼 차는 없었는데. 1억 조금 안되겠다. 그저 멍하니 그런 생각만 하고 있던 나는 점점 거세지는 빗소리에 눈을 느릿하게 깜빡였다.
“저는 루한이예요. 기억해주세요”
그 말과 함께 차의 문을 열고선 나에게 손 인사를 한다. 얼떨결에 같이 인사를 한 나를 보며 눈까지 접어가며 예쁘게 웃던 루한이 차에 올라타며 무슨 말을 중얼거린다. 뭐야, 내 욕인가. 부드럽게 사라지는 차의 뒤꽁무니만 바라보던 나는 젖어서 축축해진 신발이 그제야 찝찝하다고 느끼며 검은 우산을 펼쳤다. 그 위로 톡톡. 떨어지는 빗소리를 노래 삼아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집으로 향했다. 이상하게 기분이 좋다.
짧게 맞은 비인데도 이틀이나 꼬박 앓고서야 침대 밖으로 기어 나올 수 있었다. 아플 때 곁에 아무도 없는 건 별로 서럽지 않다. 근데 아프고 난 뒤 첫 끼 식사를 혼자. 그것도 퍽퍽한 밥에 몇 가지 없는 반찬을 꺼내놓고 먹는 게 조금. 외로울 뿐이다. 몇 일전 만해도 아프다. 이 한 마디에 맨발로 뛰쳐나와 죽을 사들고 울상을 짓던 커다란 대형 견 같은 남자가 있었는데. 입에 물고 있던 수저를 내려놓고선 의자에 몸을 기댔다.
아프다. 몸도 마음도.
그런 생각을 하는 내가 순간 웃겼다. 시발. 청승떨고 있네. 열 내리겠다고 켜둔 에이컨 덕에 닭살이 오른 팔을 쓰다듬으며 에이컨 리모컨을 찾았다. 바닥에 버려지듯이 놓인 리모컨을 들어 신경질적으로 전원을 껐다. 짜증나! 그냥 다! 한 번 해보는 이별도 아닌데. 너무 많은 마음을 줘버린 거 같다. 그래서 가슴 한 쪽이 텅. 하고 비어버린 거 같다. 근데 언제부터 나는 이렇게 사랑을 계산적으로 했을까. 아 머리아파. 골치 아픈 건 더 이상 생각하고 싶다.
바닥에 누워 높다란 천장을 바라봤다. 원룸인데 왜 이렇게 천장이 높아. 내 키는 이것뿐인데. 괜히 1년이나 잘 부대끼고 살아온 천장에 틱틱. 식탁도 치워야하고 몸도 좀 씻어야할 텐 데. 움직이고 싶지가 않다. 누워서 뒹굴뒹굴.
똑. 똑. 똑
정갈한 노크소리에 그대로 굴러서 현관까지 갔다가 일어나기 귀찮아서 그냥 없는 척 할까. 하다 그 사이에 다시금 울리는 노크소리에 대충 붕 뜬 머리를 누르며 문을 열었다. 그러자 검은 옷을 입은 사내가 빙긋. 그의 팔에는 커다란 노란 꽃이 있었다. 뭐지. 신종 살인수법 막 그런 거 아닌가? 혹시 저 꽃 속에 칼이라도 숨어있는 거 아니야?
“안녕하세요. 루한 도련님이 전해달라고 하셔서 뵙게 됐습니다.”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네는 그를 바라보며 루한이 누군지 곰곰이 생각했다. 누구지. 우선 노란 꽃을 건네받으며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조그마한 내 목소리에 미소를 짓는 남자를 보며 문을 닫았다. 누구지. 아직도 루한이란 남자가 누군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아니 근데 왜 남자한테 꽃을 선물 하는 거야. 기분 더럽게. 대충 꽃다발을 소파 위에 던져놓았다.
귀찮다. 세탁기의 버튼 하나 누르는 것도 귀찮아 죽을 지경이다. 도대체 군대 가서 그 많은 눈 치우기, 훈련 받은 건 어떻게 한 거지. 그땐 어려서 그랬나. 무심코 시선을 돌리다 어젯밤 신경이 쓰여 대충 유리병에 꽂아놓은 노란 꽃이 예뻤다. 꽃 이름이 뭔지 물어볼걸 그랬나. 텔레비전에서 보여주는 진부한 드라마에 인조적인 여주인공을 바라보다 나도 저렇게 백마 탄 왕자님이 나타나서 구해줬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돈 많고 외동에 명 짧은 남자. 내가 생각하고도 실없다. 부스스한 머리를 정리하며 소파에 몸을 구겨넣었다. 그래도 발은 삐죽. 모나게 튀어나온 발이 이상하게 추웠다. 시벌, 나 겨울 타나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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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지금 쓰고 있는 글들이 다 완결이 났으면 좋겠어요...끄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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