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바가 자꾸 들이대는데 어떡하죠?
ㄱ 말챠
03
"그래서 누나 좋아해요."
"..."
"..."
"..무슨 소리 하는거야 얘가!"
덤덤하게도 내뱉어진 정국이의 말에 오히려 내가 당황했다. 정국이를 퍽 치며 아무렇지 않은 척 다시 걷기 시작했다. 얘는 뭐 부끄럼이 없어. 요즘 대학생들 다 이런가. 설렘과 두근거림 보다는 당혹감이 더 크게 다가왔다.
"이것도 농담으로 듣는거에요?"
"어?아냐."
"진심이에요. 누나 좋아하는거."
"어..그래. 고마워."
뭔가 어색한 분위기라서 정국이의 시선을 피하려 앞만 보고 걷는데, 끈질기게 내 눈과 시선을 맞추려 한다. 얘가 요즘 나랑 너무 가까이 지내서 그런가. 거리를 둬야 하는 건가.. 이런 저런 고민을 하는데, 갑자기 정국이가 우뚝 멈춰선다.
"누나 제 말 듣고 있어요?"
"응? 들었지 당연히."
"내가 뭐라고 했는데요?"
"좋아한다고."
그저 들은 것 그대로 말했을 뿐인데, 정국이가 갑자기 심각한 표정을 짓더니 심장부근에 손을 얹고 후- 하고 쉼호흡을 한다. 왜이래, 또?
"잠시만요. 저한테 좋아한다고 고백하는 줄 알았잖아요."
"..? 야! 그건 니가 뭐라고 했는지,"
"와, 장난 아니다. 누나 나중에 나랑 사귀면 저 맨날 호흡곤란 오는 거 아니에요?"
"뭐라는거야 ㅋㅋㅋㅋㅋ"
정국이는 진심으로 말하는 것 같은데, 표정과 말투가 이상하게 웃음을 부른다. 그래서 그런지 정국이의 뜬금없는 고백이 부담스럽진 않았다. 아직도 후하후하 거리는 정국이의 등을 힘껏 밀었다. 얼른 사무실에 들어가자며.
"와 누나 장난 아니에요 아직도."
"알았다고- 들어가자고-"
"저 누나랑 꼭 연애해야겠습니다."
"네 아닙니다~"
정국이 밀기를 포기하고 먼저 빠르게 걸어가면서도 단호한 내 대답에 정국이가 아 누나! 하고 나를 쫓아온다. 내 예상인데, 저거 앞으로 더 적극적으로 능글거리게 생겼다.
#
정국이에게 고백을 들은 후로는 카페에서 일을 잘 안한다. 또 무슨 장난을 걸어올 지 몰라서. 오늘도 사무실로 출근한 정국이는 나에게 들이대기를 시전 중이시다. 내가 뭐만 하면 불쑥불쑥 나타나면서도, 막상 시킨 일을 검사하면 잘 해놓았다. 신통방통하단 말이지.
"이거 제가 해드릴게요."
"이거?왜."
"왜긴요, 내가 누나 미래 남친이니까."
"이자식 봐라? 자꾸 세뇌시킬래?"
"세뇌가 아니라, 사실이에요."
오늘도 활기차게 능글거리는 정국이와 장난을 치다가, 시끄럽게 울리는 전화 소리에 얼른 다가가서 전화를 받았다. 세상에서 가장 친절한 목소리로. 내 노력에도 불구하고 내용은 딱히 좋은 것이 아니었다.
"정국아."
"네?"
"일 다했어?"
"어..아직요. 왜요?"
"아, 골치아파."
나에게 업무를 맡겼던 클라이언트가 담당 프리랜서를 다른 사람으로 바꾸겠다고 연락이 왔다. 초기단계면 재수없어도 나중을 위해 알았다고 친절하게 말하며 철수하겠는데, 일의 진행이 절반을 넘어선 시점이었다. 밀려오는 짜증에 이마를 짚고 가만히 생각하다, 클라이언트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사장님. 이따가 잠시 시간 되시나요?"
사람 좋은 목소리를 낸다고 고생했다. 전화를 끊자마자 살벌하게 뒷담화를 해댔다. 주위에 검은 오로라를 펼치며 인상을 쓰고 자꾸 중얼거리는 내 모습에 눈치를 보던 정국이가 조심스럽게 묻는다.
"누나 왜요?"
"너 하고있던 거 있잖아. 그거 취소하겠대."
"네?? 이거요?"
"어. 그래서 만나서 결판내려고."
"아.."
"알바. 출장 업무다."
가만히 내 이야기를 듣던 정국이가 자신도 가는 거냐며 놀란 눈으로 쳐다본다. 그럼 가야지, 조수인데. 내 말에 기분이 좋은지 싱글벙글한 얼굴로 나갈 채비를 하는 정국이다. 혼자보다는 더 든든할 것 같아서 데려가기로 했다. 옆자리에 정국이를 태우고, 약속시간에 늦지 않기 위해 속도를 냈다. 왠일로 정국이가 조용한가 했더니, 역시나 멘트 날려주신다.
"누나. 다른 날에 가면 안 돼요?"
"뭐? 갑자기 무슨 소리야."
"오늘 누나 너무 예쁘잖아요."
그런 멘트에 나는 또 웃음이 터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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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으으.. 죽겠다.."
온 사력을 다해 클라이언트를 설득해냈다. 설득할 말을 생각해내느라 머리가 지끈지끈거린다. 힘이 쭉 빠져 천근만근인 몸을 이끌고 사무실로 힘겹게 들어갔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내 의자에 풀썩 기대 앉으늬, 정국이가 커피를 타서 나에게 건넨다.
"크, 맛있다."
"아까 완전 멋있었어요."
"내가 더 놀랐다. 니가 말을 너무 잘해서."
"누나 남자친구 되려면 이정도는 뭐."
쉴 틈이 없다 저 능글거림은. 으이그, 하며 툭 치자 해맑은 웃음을 지어버린다. 저렇게 웃으면 진짜 애기티가 나서 어떻게 하질 못하겠다. 평소 행동으로만 보면 충분히 어른스러운데, 자연스럽게 묻어나오는 분위기는 제 나이를 각인시켜주듯 분명하게 나타난다.
"부럽다, 애기라서."
"네? 저보고 애기라는 거에요 지금?"
"그럼 여기 누가 있습니까-"
"제가 자꾸 누나누나 거리니까 그런 것 같은데, 앞으로 호칭을 좀 바꿔야겠습ㄴ, 누나? 내 말 듣고 있어요?"
병아리처럼 삐약대는 정국이를 흐뭇하게 바라보다가, 짧은 알람음에 핸드폰을 들여다봤다. 지운 지 한참인데도 잊혀지지 않는 번호다. 짧은 한마디였지만, 나를 흔들기엔 충분했다. 심각해지는 내 표정에 정국이도 말을 멈추고 가만히 나를 바라본다.
"..거지같아."
"..누나?"
"미안한데 정국아, 오늘은 일찍 들어가. 미안해."
지랄맞지만 전화하게된다.
[잘 지내?] _ 04 : 12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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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읽어주시는 모든 분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