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의점 아르바이트를 구했다. 캐나다에서 보내오는 생활비로 혼자 살기에는 충분했지만 방과 후 시간을 때울 곳이 필요했다. 너를 하루 종일 졸졸 따라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었고 공부에는 큰 뜻이 없었다. 그저 중간. 너무 잘하지도, 그렇다고 못하지도 않을 정도로만 유지하면 충분했다. 편의점 아르바이트는 그런 내 상황을 뒷받침해주기에 충분했다. 손님이 없을 때는 적당히 공부도 할 수 있었고, 오랜 시간 근무할 수 있어 제격이었다.
"죄송해요, 늦었죠."
근무시간은 다섯 시 반부터 열한 시까지였다. 교대해야 할 사람이 열한 시 오 분을 넘겨서야 편의점에 도착했다. 언짢았지만 애써 표정을 숨기며 괜찮다 대답한 뒤 비품실로 들어가 유니폼을 갈아입고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나왔다. 유난히 피곤한 날이었다. 나와 교대한 남자는 벌써 손님을 받고 있었다. 총 칠천육백 원입니다. 손님인 척 카운터에 서 있는 남자와 눈인사를 나누고 자그마한 체구의 손님을 지나치려던 차였다. 생리대와 소주, 그리고 콘돔 서너 개를 담은 봉지를 건네받으며 위조된 민증을 내미는 손님의 손이 유독 희었다. 상관관계가 없다고 봐도 무방할 것들, 그리고 고운 손.
"감사합니다."
모자를 푹 눌러쓰고 소매 부분이 다 늘어진 낡은 카디건에 때이른 칠부바지를 입은 손님은 봉지를 건네받자마자 빠르게 편의점을 나섰다. 틀림없이 너였다. 모자 뒤로 흘러내린 긴 생머리도, 한없이 희던 손가락도, 살짝 보이는 발목과 종아리에 자리한 시퍼런 멍 자국까지. 전부 너였다. 내일 봬요. 네 뒤를 쫓아 급히 편의점 밖으로 뛰쳐나갔다. 저 앞 신호등이 마침 빨간 불로 바뀌어 너는 빠른 걸음을 늦추었다. 네 뒤를 따라잡으려다 문득 네가 손에 쥔 봉지에 들어있을 내용물이 떠올랐다. 생리대, 소주, 콘돔. 생리대를 제외한 다른 것들은 너와 어울리지 않는 것들이었다. 너와 일정 거리를 두고 섰다. 이러면 안 된다는 것을 잘 알지만 내게 있어 너는 늘 궁금한 게 많은 사람이었으니까.
초록불이 들어왔다. 너는 걸음을 재촉했다. 네 발보다 조금 큰 듯한 슬리퍼가 아슬아슬하게 버티고 있었다. 아무리 날이 풀렸다지만 아직은 해가 지면 싸늘한 공기가 감돌았다. 신발을 벗어주고 싶은 충동을 억누른 후 네 걸음 속도와 비슷하게 발을 옮겼다. 너는 점점 더 으슥한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우리 집과는 정 반대 방향이었다. 이런 곳에도 과연 사람이 살까 싶은 골목까지 오자 그제야 너는 걸음을 멈추었다. 깨진 가로등은 점멸했고 잔뜩 쌓인 쓰레기 더미 위에서 울어대는 새끼 고양이는 음산한 기운을 자아냈다. 지붕이 폭삭 내려앉은 집의 대문 앞에서 너는 숨을 골랐다. 네가 쇠로 된 문을 열자 얼마 전 옥상 문을 열었을 때 나던 소리와 흡사한 소리가 울렸다.
"…씨발."
처음 듣는 네 욕설에 나는 화들짝 놀라 내 귀를 의심했다. 너는 대문 안으로 고개를 넣어 기웃거리다 욕설을 내뱉은 듯했다. 입고 있던 카디건의 지퍼를 목 끝까지 올리고 들고 있던 봉지를 다시 한 번 쥐어잡은 네가 고개를 숙이며 대문 안으로 사라졌다. 인기척이 잦아들 때까지 그 자리에 가만 서 있다 너의 집 대문 앞으로 발을 디뎠다. 네가 고개를 숙여야 할 만큼 작은 대문이었지만 대문 옆으로 나 있는 담장은 내 키보다도 더 높았다. 까치발을 들어야 겨우 안이 보일 듯해 손을 짚고 살짝 까치발을 들었다.
밖에서 보이는 대로 내려앉은 지붕을 아슬아슬하게 받치고 있는 벽은 금이 쩍쩍 가 금방이라도 무너져내릴 듯했다. 손바닥만 한 마당에는 작은 평상 하나가 놓여있었고 그 위에 네가 들고 왔던 봉지가 놓여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정체 모를 네 아빠뻘 되는 남자가 대(大) 자로 뻗어있었다. 그때, 집 뒤편에서 네가 모습을 드러냈다. 깜짝 놀라 상체를 푹 숙였다. 너는 모르는 듯했다.
"사 왔어요."
"……."
"사오라고 시켜놓고 자기만 할 거면 시키길 왜 시켜요."
담장 너머로 새어 나오는 네 목소리가 적응되지 않았다. 비닐봉지가 쓸리는 소리와 함게 그제야 무어라 중얼거리는 남자 목소리가 들렸다. 어떡하지, 여기서. 집에 가야 하나. 담장에 등을 기대고 주저앉은 채로 애꿎은 입술만 물어뜯고 있을 때였다. 살과 살이 맞부딪히며 나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나도 모르게 입을 틀어막았다. 비명이 터져 나올 것 같아서였다. 씨발 년아. 느이 어미가 버리고 간 새끼 거둬들여줬더니, 은혜도 모르는 년. 너는 대답이 없었다. 적막했다. 기대고 있던 몸을 낮게 일으켰다. 집에 가자. 기계적으로 다리를 움직였다. 나는 걸을 때 보폭이 넓었다. 골목길을 빠져나오는 건 순식간이었다. 번화가에 다다라서야 다리에 힘이 풀렸다. 눈을 질끈 감아내렸다.
*
내일은 토요일이었다. 다음 주 월요일에 학교에서 네 얼굴을 어떻게 볼지 한참을 생각하며 걸었다. 물론 너는 나를 보지 못했지만, 괜히 네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할 것 같아서였다. 아니, 애초에 네가 학교를 나올지 의문이었다. 투박한 손으로 뺨을 맞았을 것이 분명한데. 푸르뎅뎅한 멍이 들었을 게 뻔했다. 또 일주일씩 빠지려나. 곧 중간 고산데. 내내 바닥을 보며 걸었다. 익숙한 지리였기에 굳이 고개를 들지 않아도 이제 곧 집이 나올 것이라는 걸 알았다. 아래로 내리깐 시선 끝에 낯선 신발 코가 걸렸다. 눈을 깜빡였다. 이 늦은 시간에 여자 신발이 웬 말이람. 신발 끝, 마른 다리, 여자가 매고 있던 크로스 백. 차례로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마침내 나타난 얼굴은,
"…태형아."
누나였다.
"……."
"…원래 이렇게 늦게 다녀?"
"무슨 상관이야."
누나가 입을 꾹 닫았다. 결국에 누나는 엄마를 이기지 못했다. 누나 성격에 순순히 한국까지, 그것도 동생 사는 집에 제 발로 오려고 하지 않았을 것이었다. 보나마나 등 떠밀려 먼 한국땅 을 밟았을 게 틀림없었다. 쌀쌀한 날씨에도 누나는 얇은 겉옷 하나만을 걸친 채 집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누나와 눈이 마주쳤다. 누나의 얼굴이 미세하게 일그러졌다. 누나의 겉옷이 얇다는 것을 알아챈 그때부터 내 얼굴에 드러난 감정을 누나는 이제야 알아챈 것이었다. 연민. 연민이었다. 꼴에 핏줄이라고. 나도 모르게 비싯 웃음이 터졌다. 누나는 크로스백 끈을 꽉 쥐고 있었다. 손끝이 창백했다. 너처럼.
"임신했다며."
"……."
"배 별로 안 불렀네."
"얼마 안 됐어."
누나를 등지고 현관문으로 향했다. 도어록을 해제시키고 문을 열며 누나를 돌아보았다. 안 들어갈 거야? 누나는 답지 않게 눈치를 보며 집 안으로 발을 들였다. 어색하게 거실 한구석에 무릎을 꿇고 앉는 모습을 보고서 문을 닫았다. 겨우 한 사람 늘어났을 뿐인데 넓어 보이던 집이 더 없이 비좁았다. 부러 부산스레 움직였다. 냉장고에서 찬물을 꺼내 컵에 따랐다가 잠깐 고민했다. 찬물 줘도 되나. 들었던 컵을 탁자 위로 다시 올려놓고 방으로 향해 보일러를 올렸다. 누나의 눈이 집요하게 내 뒤를 따랐다. 다시 부엌으로 향해 컵을 두 손에 쥐었다. 컵 표면에 금방 물기가 맺혔다.
"줄 게 없네."
"…고마워."
"여기서 살 생각 아니지?"
단도직입적인 내 말에도 누나는 흔들림 없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원래 너네 집에도 올 생각 없었어. 시간이 늦어서 어쩔 수 없었던 거지. 누나는 조곤조곤 말했다. 컵을 쥐고 있는 누나의 손에 물기가 옮겨갔다. 그럼에도 누나는 컵을 고집스레 쥐고 있었다.
"미혼모 센터 다 알아보고 왔어. 주말에 가 볼 거야."
"……."
"…같이 좀 가 줘."
그것만 해 줘. 누나가 고개를 숙였다. 부르지 않다고 생각했던 배가 눈에 띄었다. 자세히 보니 티가 났다. 누나는 필사적으로 숨기고 있었다. 죄도 아닌데. 알았어. 짧게 대답했다. 누나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태형아."
"그렇게 다정하게 부르지 마."
"김태형."
"왜."
"그때 나한테 왜 그랬어?"
어? 예상치 못한 누나의 물음에 멍청한 얼굴로 되물었다. 무슨 소리야.
"너 중학교 2학년 때."
"……."
"나 중학교 3학년 때."
"……."
"기억 안 나냐, 진짜. 나 아빠한테 죽어라 맞았을 때."
…아. 희미한 기억 저편에서 어렴풋이 우중충했던 그 밤이 그려졌다. 누나와 사이가 좋을 때가 잠깐 있었다. 아니, 사이가 좋다기보다는 데면데면한. 어느 가정에서나 다를 바 없는 사춘기 남매였었던 적이 있었다. 적어도 서로에게 식사는 챙겼냐, 물을 수 있는 사이. 그날 내가 왜 집에 늦게 들어갔더라. 허구한 날 싸우는 부모님이 보기 싫어서였나. 아니면 꼭 그 싸움 끝에 엄마를 때리는 아빠가 보기 싫어서였나. 그것도 아니면, 겁이 많았던 누나와 벌벌 떨며 밤을 지새우기 싫어서였나.
"엄마도 말리다 나가떨어져서 그냥 그렇게 맞고 있다 너 들어오는 거 보여서 마지막 발악으로 살려달라고 소리 질렀는데."
"……."
"너 그때 누나랑 눈 마주쳤지."
마주쳤었나.
"왜 못본 척 했어."
"……."
"아빠, 그만하세요. 한 마디만 하면 될 걸. 너 그때 이미 아빠보다 컸잖아."
"……."
태형아. 그새 울음이 섞인 누나의 목소리가 내게 와 닿았다. 입을 열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생각해보니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누나가 경멸에 찬 눈으로 나를 마주했던 게.
"누나한테 왜 그랬어."
"……."
"네가 그러면 안 되잖아."
"……."
"너 하나밖에 없는 내 동생이잖아."
그렇잖아, 태형아. 누나가 울었다. 속에서 응어리진 서러움을 그 자리에서 다 토해내기라도 할 듯이 누나는 울었다. 그렇구나. 나는 누나가 왜 나를 경멸했는지 이유조차 알려고 하지 않았구나. 그제야 그날 밤 누나의 처절했던 눈이 떠올랐다. 그때 나는 왜 누나를 구해주지 않았을까. 기억이 나지 않았다. 숨이 넘어갈 듯 우는 누나를 차마 위로할 수 없었다. 어디서부터 엉켰는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그만 울어."
"……."
"아기한테 안 좋아."
나는 무뚝뚝하고 살가움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는 그런 동생이었다. 누나는 아기를 언급하자마자 거짓말처럼 울음을 그쳤다. 누나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네 침대 좀 쓴다. 나는 그러라고 대답했다. 들고 왔던 가방을 집어 들고 누나가 내 방으로 향했다.
"미안해."
"……."
"미안해, 누나."
잘못했어. 누나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대로 방 문이 닫혔다. 잠이 올 것 같지 않았다.
*
안녕하세요, 썸머비입니다.
제가 바보같이 다른 필명에 글을 업로드 했을 때 댓글에 암호닉을 신청해주셨던 분들을 따로 적어놓지 않고 글을 날려버렸어요...
두 번씩이나 번거롭게 해드려서 죄송해요...ㅠㅠㅠ 다시 한 번 이 글에 암호닉을 신청해주시면 꼭! 꼭!! 추가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보고싶었어요 독자님들...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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