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범생의 클리셰 03
우리 친해지자. 그 말의 파급력이 이렇게 클 줄은 몰랐다.
정재현이 그 말을 내뱉자마자 갑자기 주위가 조용해졌고, 모두의 시선이 나와 정재현 쪽으로 쏠렸다.
그 날 이후로 여자애들에게 나는 눈칫밥을 먹으며 학교를 다녀야만 했다. 너 계 탔다? 라며 하루에 한번씩은 몰매를 맞았다.
언제 짝꿍 바꾸냐구요.... 맨 앞자리라도 좋으니까 제발 자리 좀 바꿔 주세요.
"오늘은 일찍 일어났으니까 걸어가야지. 지난번 같은 일이 있으면 안 돼, 정말...."
"아침부터 왜 혼자 헛소리를 하고 그러니, 응? 잠 덜 깼어?"
"아니.... 아뇨. 하하하."
집에서 학교까지 꽤 거리가 있었지만 오늘은 걸어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괜히 학교에 일찍 갔다가는 정재현과 어색한 시간을 보내야 할지도 모르니까.
신발끈을 묶으며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정재현한테서 선을 그어내고 말 거라고.
싫어하는 사람한테 한 번도 칼 같이 군 적이 없었지만 정재현은 왠지 잘라내야 할 것 같았다.
"진짜 아무도 없네."
천고마비의 계절. 바람 좋고, 하늘 높고, 햇빛도 따사로우니 좋은데 정말 길거리에 한 명도 없었다.
다들 버스를 타고 가는 거니? 그런 거니....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보니 좀 이른 시간이긴 했다.
어디서 그런 자신감이 뿜어져 나왔는지 모르겠지만, 그냥 이 거리를 혼자 자유롭게 누비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방에서 이어폰을 꺼냈다. 음악과 내가 ㅎrㄴr가 되는 time....
"오빠.... 목소리.... 씨발...."
전정국 오빠 없인 살아갈 수 없어.... P;ㅠ을 들으며 등교를 하니 마치 내가 런웨이를 걷는 기분이었다.
어차피 주위에 아무도 없으니 더 그랬다. 오빠가 원해 많이 많이를 외칠 땐 나의 영혼까지 팔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역시 인생은 홀로서기다. 나에겐 이어폰과 전자기기만이 필요할 뿐 다른 건 중요치 않아....
난 오빠만을 위해 산다....
"오빠 없이는 살아갈 수 없어.... 계좌 불러줘.... 울 엄마 아빠 돈 다 부칠게... 계좌...."
의식의 흐름대로 주위의 시선 따윈 무시하며 혼자만의 세계에 갇혀 길을 걸었다.
어젯밤에 글잡을 보고 자는 게 아니었어.... 오늘따라 막 전학생이 올 것 같고, 그렇잖아.... 막 전정국 같은 전학생이 와서 나한테 반하는 거지.
망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점점 증폭되는 마음에 혼자 피식피식 웃다가 허허 웃어 버렸다.
사는 게 이런 거지.... 오늘도 내 배경화면을 보며 마음을 다잡으려고 하는데 어딘가 모르게 뒤가 쎄했다.
인기척이 느껴졌다. 분명히 아-까 전까지만 해도 아무도 없었던.... 것, 같은데.
"오늘 기분 좋은 일 있어?"
"......아."
이어폰을 빼고 뒤를 돌아보니 정재현이 보였다. 정말 죽고 싶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건가.
웃음을 참는 건지 눈이 휘어져 있었다. 아, 나 이제 망했다. 난 이제 앞으로 학교를 어떻게 다니면 좋을까.
그냥 수치스럽기 짝이 없었다. 어디서부터 들었는진 모르겠지만 뭘 들었던 간에 나의 추한 모습이 들켜버린 건 확실하다.
정재현을 보자마자 다시 등을 돌렸다. 진짜 김시민 죽어... 왜 살아? 가을 하늘 공활한데 난 지금 쥐구멍에 들어가고 싶다.
"......모르는 척 해 줘."
"뭘?"
"......아, 아냐. 못 봤으면...."
"계좌번호 부르라고 한 거?"
"......."
"오빠가 내 인생의 전부라고 한 거?"
저 새끼 다 들었네. 이제 난 정말로 망했다. 내가 어설픈 춤사위를 하는 것만큼은 못 본 것 같아서 안심했지만 여전히 죽고 싶었다.
능글맞게 웃는 정재현이 얄미웠다. 내가 원래 누구한테 기가 눌려서 아무 말도 못하는 스타일이 전혀 아닌데,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죄 지은 사람 마냥 부끄러움에 달아오르는 얼굴을 푹 숙이고 발걸음을 빨리 했다. 정말 혼자 있고 싶다.
그런데 정재현이 굳이 옆으로 따라 붙어 걸었다. 본능적으로 정재현에게서 살짝 멀어졌다.
"너 춤 되게.... 잘 추더라."
"......다 봤니?"
"아니, 그냥. 너가 앞에 있길래."
"......그냥 잊어 주라. 못 본척 해 줘. 진짜 부탁이야. 제발. 그냥 언급하지 마."
"흐하하."
"나 진짜 죽고 싶거든?"
진심이 튀어나왔다. 빨개진 얼굴로 정재현을 바라보자 정재현이 살풋 웃었다.
내 눈치가 보이기는 하는 건지, 소리 내서 웃지는 않았다. 난 얘랑 정말 안 맞는 것 같아.
원래 교문까지가 이렇게 멀었었나. 정재현과 나 사이엔 적막만이 감돌았다. 하긴, 내가 얘랑 무슨 할 말이 있다고.
"너 아직도 얼굴 빨개."
"......."
"아까 그거 때문에 그러면 안 그래도 되는데."
"......허."
"귀여웠어, 나는."
-
난 체육 시간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사실 별로 안 좋아하는 수준을 넘어서 싫어한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놀이는 시체놀이요 잘하는 운동은 숨쉬기 운동이다.
오늘도 체육관 구석탱이에 박혀 누워 있으려고 만반의 준비를 해 왔다. 담요와 목베개만 있다면 천국행도 가능하다.
선생님 눈치를 살살 살피며 자리를 잡았다. 흐흐. 이제 잠만 자면 끝...인데.
"심심해."
딱 누우려고 했는데 정재현이 옆에 아빠다리를 하고 앉았다. 너 뭐야....
심심하다고 입까지 쭉 내밀고 말하는 정재현에 그냥 몸이 굳어 버렸다.
너가 심심한 거랑 나랑, 뭐, 뭐 어쩌라는 거야.... 눈을 도륵도륵 굴리며 어떻게 대답하면 좋을까 궁리했다.
그냥 여자애들이 우르르 몰려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네 왜 이럴 때만 열심히 피구하고 그러니? 응?
"그러면 그냥 잘래?"
"어?"
얘, 얘는 뭘 어떻게 알아들은 거야. 얼굴이 새빨개진 걸로 봐서 당황한 눈치다.
아니, 난 내가 자고 싶어서 그런 건데.... 음란 마귀가 씌였나. 어이 없다는 시선을 보내자 정재현이 뺨을 두 손으로 어루만졌다.
정말 일이 꼬이는 기분이었다. 성격이 얼마나 좋으면 목석같은 여자애랑 계속 말을 하는 걸까.
"나 음란마귀 씌였나 봐."
"어. 그런가 봐."
"미안...."
미안할 것 까지야.... 멋쩍게 웃어 보이자 정재현이 수줍은 소녀마냥 따라 웃었다.
얜 왜 자꾸 웃고 난리래. 정말 할 말이 없어져서 그 자리에서 벌렁 누웠다.
이제 관리할 이미지도 뭐도 하나도 없기 때문에.... 그냥 막 살기로 했다.
목베개까지 하고 바닥에 벌렁 누운 내가 당황스러웠는지 정재현이 맨바닥에서 자면 어떡하냐고 핀잔을 주었다.
"나 원래 아무 데서나 잘 자."
"아.... 그래."
"왜 농구 안 해?"
"손목이 삐어서...."
"아프지 마렴."
이제 나 정말 막 나가기로 했나 보다. 영혼 없이 아프지 마렴, 이라고 말한 뒤 눈을 감았다.
정재현이 무슨 속셈인진 몰라도 이렇게 나한테 친절하게 굴 이유는 없는 것 같았다.
이유 없는 호의에 굳이 내가 응할 필요도 없는 거고.... 어색한 건 정말 싫다.
그렇게 눈을 붙인 지 얼마나 되지 않아 엄청난 고음의 목소리가 들리기에 눈을 살며시 떴다. 분명히 이동혁이야.
"야 너 거기서 뭐 해?"
"아, 좀 조용히 말해. 애 자잖아."
"오.... 존나 챙겨주네."
"채, 챙기는 게 아니라 사람 자는데...."
뭔가 흥미로운 얘기를 할 것 같다는 여자의 촉이 곤두섰다.
이럴 땐 그냥 세상 만사 모르고 자는 척을 하면 되려나. 눈치 빠른 이동혁을 피해가려면 망가지는 수 밖에 없겠다 싶어서,
입을 살짝 벌리고 열심히 자는 척을 했다. 아니나 다를까 내 쪽을 훑은 이동혁이 김시민 얼굴 난리 난다, 라며 혀를 끌끌 찼다.
"친해졌냐?"
"......."
"쟤 잘생긴 남자 공포증 있어서 그럴 걸."
아, 씨발.... 내 치부를 들킨 기분이었다. 난 잘생긴 남자 공포증을 갖고 있다. 잘생긴 남자랑은 대화도 눈 마주치는 것도 절대 못 한다.
중학교 때 맥도날드 갔다가 잘생긴 알바생 있어서 주문 못 하고 나온 적도 있었다. 저걸 굳이 말하는 이유가 뭐니....
"근데 뭐하러 쟤랑 그렇게 친해지려고 그러냐? 그냥 식충이여. 맨날 얻어먹기나 하고."
동혁아, 오늘만 사는 게 아니지. 이러다가 이동혁이 나의 흑과거까지 풀어버리는 건 아닌가 싶었다.
예를 들면 나의 지난 짝사랑이라던가.... 짝사랑이라던가.... 말해 버리면 난 정말 죽을 거야.
등에서 식은땀이 날 것 같았다. 제발 나한테 신경 좀 꺼 줘라... 동혁아. 앞으로 얻어먹지 않을게.
"나도 몰라."
"뭘 몰라, 임마."
"몰라. 물어보지 마."
"얼씨구...."
얼씨구는 그냥 넌 나한테 맞아요.... 뒷담화 아닌 뒷담화를 듣고 있자니 골이 땡겼다.
정말 내가 잘 자는 줄 아는 모양이다. 일어난 척이라도 해볼까 했는데 정재현이 운을 띄워서 그냥 가만히 있기로 했다.
다음 시간 미적분인데 그냥 시간을 미분해 버리고 싶....
"그냥 뭔가...."
"뭐."
"자꾸 그냥 신경 쓰여서."
| 꼬기로케의 주저주저리 |
이번 화부터 뭔가 꽁냥꽁냥 하지 않나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제부터 슬슬 시동을 걸어야 할 것 같단 생각에 귀여운 재현이를 가득 넣었어요 호호호... 신경이 쓰인다의 다른 말은 뭘까요 호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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